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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애란 시인 / 사색(思索) 한 모금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8.
최애란 시인 / 사색(思索) 한 모금

최애란 시인 / 사색(思索) 한 모금

 

 

간장 달이는 냄새가 코끝을 후벼판다

훅, 들이치는 기운 아련하다

 

아궁이 속 이글거리는 불꽃

꽁꽁 묶여 있던 삶의 보자기 풀어헤치고

어머니의 한, 한 움큼씩 움켜쥔 채

바람 따라 일렁인다

 

짱짱한 햇살 아래 졸아드는 간장 속에서

어머니의 삶 보글보글 피어올라

가마솥 묽은 내 삶 진해진다

 

흐르는 세월 속

달이고 조려지고 배어드는

그대 삶

 

 


 

 

최애란 시인 / 관계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지베르니로 간다 아내가 없는 모네는 아내를 정원에 심었다지 안녕 아네모네, 아내가 있는 모네의 정원에선 아내와 모네는 불가분적 관계라지 가볍게 받아버린 노을 한 장도 그런 것 안녕 K, 모네가 다녀간 뒤 한참을 설레던 저녁 밥상이 카톡을 덮어 버렸네 곁에 없는 노을과 없는 모네와 없는 나를 만난다는 건 이미 이별이 시작되었다는 기미 보내준 노을은 물난리 속에서도 여전하네 끝도 시작도 없는 사랑도 그런 것 안녕 모네, 나를 덧대고 삭제하는 사이 107동 뒷벽이 살구나무 한 채를 들여놓았네. 잎들이 다 떠나고 나서야 나무의 말이 들리기 시작하네

 

 


 

 

최애란 시인 / 책장 속으로 사라진 엄마

 

 

 오전 열시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열 시의 사막을 빌린 나는 모래비 털다 아는 아이의 이름 적어 봅니다 도마뱀붙이, 사막여우..... 모르는 아이가 정글짐 근처 열두 시 한가운데로 꽂힙니다 엉덩방아 찧는 모래 위로 울음이 솟구치고 놀란 오릭스가 모래바람으로 달아납니다, 무얼 기억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처럼, 달아납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열한 시 오십 구 십분의 엄마

 

 자정 지나

 노래 쌓인 책장을

 덮습니다

 

 책장 속으로 사라진 엄마

 

 속이 상한 엄마와 겉이 말짱한 엄마는 검은 모래 쓸고 다닐지도 모릅니다 사라지지 않는 사막의 한낮을, 한낮의 한밤중을

 

 기억하고 있는 아이와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모래바람 털어내며

 거기, 모래 말뚝 꽂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구의 시> 2022

 

 


 

 

최애란 시인 / 푸자

 

 

강가*의 신을 만나러

사이클릭샤를 타고 가트로 간다

해는 이미 떨어졌고

신을 부르는 불의 의식이 한창이다

푸자, 산 자를 위한 힌두 의식이라는 걸

오늘에야 알았다

무심히 흐르고 있는 강가에서

강가가 허락한 강가에서

신을 생각하다 신을 벗었다

홀가분한 그거면 충분하다

그것, 참 좋다

제단 위로 꽃비가 내리고

죽은 자가 스치는 사이

꽃가지, 곱내를 드리우는데

타다 남은

꽃잎을, 두 손으로

받아 낸 아버지

 

살아남지 못한 나를 강물에 띄우고 있다

 

 


 

 

최애란 시인 / 촉

 

 

노파가 비린내 나는 세상을 손질하는 사이

수평선에 걸린 배 한 척 사라진다

구붓한 손가락은 파닥거리다가

주저앉은 좌절을 탁,

몇 차례 씻어내자

흔들리던 부표가 파도를 가르며

일어선다, 늦은 점심

노파가 내민 희망 한 접시엔

엄지의 끝이 같이 올라선다

지느러미 없는 몸 이끌며

저리도 불거지고 휘었을 터

허겁지겁 허기를 달래고 나서야

붉게 배어든 바다를 베어 물었다

남은 햇살 몇 점에 베인 듯

명치 끄트머리 쓰려온다

행간을 다스리지 못한 속이

또, 촉을 세우는가 보다다

 

 


 

 

최애란 시인 / 허공

 

 

생떼를 부리던 구름이 들이닥쳤다

물때썰때는 잊은 지 오래

일생 풍랑주의보 속에서도

한결같이 만선을 고집하며 너는 내게 그물을 던졌다

삐딱하게 때론 죽어라 온몸으로 붙들었지만

파도에 휩쓸려 가라앉을 뿐

근질근질 미끼 물은 입간판만

방파제 가는 길목 막고

불쑥 새 명함 들이민다

‘원조 바다횟집, 원조 꽃게랑 낙지……’

원조라고 우기며 자리 잡은 터

바다 경전을 일구고 있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아쉬운……’

횡설수설 날 부르며

물보라 일으키는‘구름노래방’

 

다시 네 꿈으로 환생한

 

나는,

 

 


 

 

최애란 시인 / 아슬란, 자작나무숲이 보낸 답장

 

 

 내 안의 아이들에게 편지를 쓴다

 

 분홍색 원피스 끝단을 배배 꼬는 아이, 다락방에서 훌쩍 대다 다리를 배배꼬는 또 다른 아이, 옷장 문을 열고 분홍으로 발발 들어간 아이, 마녀를 따라 숲으로 발발 들어간 아이, 아슬아슬 아슬란을 따라 별별 소문에 들어간 아이, 자작나무숲에서

 

 나는 내안의 아이들에게 설익은 마음을 들켰다네

 

 아슬아슬 맘까지 말며 내려간 아이, 목소리가 커져 들리지 않는 아이, 덜익은 별별 아이들을 마녀가 우울하게 내려다본다네

 

 나보다 팔다리가 긴 내안의 아이들, 데려와야겠네 더는 흘러들지 않도록 더는 흘러내리지않도록, 주저앉혀야겠네 단단히 나를, 접어야겠네

 

 내 안의 아이들로부터 답장이 왔다

 

 


 

최애란(崔愛蘭) 시인

대구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및 同 대학원 졸업. 2006년《심상》으로 등단. 시집 < 종의 출구는 늘 열려 있다>. 2000년 <인터넷 문학상> 작품공모에 '가을배추'로 대상 수상. 2019년 대구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선정.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심상>시인회 회원. 현 달성문인협회 편집장. 2021년 대구 달성군립도서관 상주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