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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성미정 시인 / 절 옆에서 고기를 굽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8.
성미정 시인 / 절 옆에서 고기를 굽다

성미정 시인 / 절 옆에서 고기를 굽다

 

 

논둑길을 따라 가다 산언덕에 올라앉은

동서남북 산으로 둘러싸인 어느 절.

가출이나 출가의 이력이 있는 시인 몇 모여

두루미, 까치, 참새 소리에 귀를 씻는다.

흰 쑥부쟁이, 보라색 패랭이꽃 흐드러지는

산사에는 청매실, 적앵두 흑버찌가 익고 있다.

수련으로 덮인 연못 두 개를 지나

된장이 익어 부풀고 있는 장독대 옆에 앉아

장작을 피우며 우리는 삼겹살을 굽는다.

절을 지키는 개 두 마리가 허겁지겁 달려온다.

너희도 입이지. 잘 읽은 고기 한 조각 갖다 주자

꼬리를 내린 채 기겁하며 도망을 간다.

내가 무서운가? 표정도 부드럽게,

발걸음도 조용히 다시 다가가자

이번에는 법당 쪽으로 줄행랑을 친다.

개의 불성에 대해, 부처와 예수의 욕심에 대해

갑론을박하다가 우리는 개만도 못하다며

큭큭거린다. 노릇노릇 잘 익은 고기를

상추쌈을 해 입이 미어지도록 먹어치운다.

여기저기서 목이 메는지 캑캑거린다. 살생을 하는

중생들이 가는 칼산지옥 따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성미정 시인 / 시인의 폐허*

 

 

어느 날 책을 정리하여 갑자기

시를 쓰고 싶은 마음과 시에 대한 열정에게

트렁크 가득 주고 나니

 

남은 것은 수경야채 입문과 베란다 가든

그의 도자기 책과 차 관련 서적

이걸로 무슨 시를 재배하고 우려낼 수 있으랴

이제 그는 아끼는 책들의 제목을

나직이 불러주지도 않고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느낌에 대부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

        

어쩌면 이제 시인은 시인의 시인과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시인 또한 하나의 환영

속에서 사실 다른 시인이 시인을 꿈꾸고 있을지도

 

그 꿈 또한 어지럽고 지리멸렬한

서로 만들어진 낡은 트렁크

하나를 두고 한 말일 뿐일지라도

 

* 시인의 폐허 : 보르헤스의 소설 「원형의 폐허」에서 제목과 모티브를 빌려옴.

 

 


 

 

성미정 시인 / 대머리와의 사랑 1

 

 

대머리를 위하여 그녀는 머리털을 뽑는다

대머리를 위하여 그녀는 음모를 잡아뜯는다

대머리를 위하여 그녀는 겨드랑이털을 깎는다

검은 털이 수북하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그녀는 추억 속의 벗겨진 머리가죽 말라붙은

가죽 위에 털들을 꼼꼼히 심는다 대머리가

만족할 만한 가발을 가지고 대머리에게 간다

진짜 머리털보다 더 진짜 같은 가발을

대머리에게 준다 이걸 만드느라 일찍 오지

못했어요 대머리는 가발을 던져버린다

기다리느라 비를 너무 많이 맞았어 머리가

불어서 이제 그 가발은 나에게 맞지 않아

대머리의 육체 가득 출렁이는 빗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공들여 만든 대머리를 위한 가발이

찢겨진 우산처럼 빗속에 버려져 있다

 

 


 

 

성미정 시인 / 심는다

 

 

 꽃씨를 사러 종묘상에 갔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꽃씨를 주며 속삭였다 이건 매우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입니다 꽃씨를 심기 위해서는 육체 속에 햇빛이 잘 드는 창문을 내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너의 육체에 창문을 내기 위해 너의 육체를 살펴보았다 육체의 손상이 적으면서 창문을 내기 쉬운 곳은 찾기 힘들었다 창문을 내기 위해서는 약간의 손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밤이 새도록 너의 온몸을 샅샅이 헤맸다 그 다음날에는 너의 모든 구멍을 살펴보았다 창문이 되기에는 너무 그늘진 구멍을 읽고 난 후 나는 꽃씨 심는 것을 보류하기로 했다 그리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에게 찾아가 이 매우 아름답고도 향기로운 꽃을 피울 만한 창문을 내지 못했음을 고백했다

로운 꽃씨를 부탁했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상점 안의 모든 씨앗을 둘러본 후 내게 줄 것은 이제 없다고 했다 그 밤 나는 아무것도 줄 수 없으므로 행복한 나를 너의 육체 모든 구멍 속에 심었다 얼마 후 나는 너를 데리고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을 찾아갔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내가 키운 육체의 깊고 어두운 창문에 대해서 몹시 감탄하는 눈치였다 창문과 종묘상의 모든 씨앗을 교환하자고 했다 나는 창문과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을 교환하기를 원했다 거래가 이루어진 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내 육체 속에 심어졌다 도망칠 수 없는 어린 씨앗이 되었다

 

 


 

 

성미정 시인 / 대머리와의 사랑 2

 

 

그의 머리카락이 뇌 속으로 자라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저 그를 보면 대머리라고

낄낄대느라고 바쁠 뿐이다 그는 뇌 속으로 머리카락이

엉켜 폭발 직전인데 빗질조차 할 방법이 없다

어떤 참빗 같은 손이 그의 뇌 속까지 들어올 수 있을까

그는 일단 늙고 노련한 이발사를 찾아간다

늙고 노련한 이발사도 뇌 속까지는 속수무책이다

괜시리 애꿎은 턱수염만 시퍼렇게 밀어버린다

이발소에서 돌아온 밤 그는 머리카락이 가득 찬

뇌를 현실로 받아들이기로 다짐한다 그 밤 그는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청했는데 폭발이 일어난다

머리카락을 더 이상 누를 수 없었던 뇌가 그를

배반한 것이다. 사람들은 가엾은 그의 조각난 머리 주변에

몰려들어 그가 대머리가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성미정 시인 / 육봉달

​​

 

​장장 한 달 째 머릿속에서 육봉달이 손에

북경오리를 들고 뛰어다닌다 한때 나도

북경오리를 먹고 싶어했다 하얀

밀쌈에 바삭한 오리 껍질을 얹고 파채를

올려 까만 춘장을 살짝 발라 먹고

싶었다 TV 중국 여행에서 본 그대로

북경오리는 관념의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육봉달이 나와

북경오리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고 했을

때 난 북경오리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저 녀석이 나보다 먼저 북경오리를

때려잡다니 그것도 맨손으로…… 하긴

그것도 북경오리를 먹는 한 방법일 수 있는데

아직도 내 머릿속에선 북경오리가 꿱꿱거리고

있는데 육봉달이는 맨손으로 북경오리를

때려잡고 달리는 마을버스 2-1을 타고 보란

듯이 여행을 떠나는구나

아! 나는 언제쯤이라야 맨손으로

북경오리를 때려잡고 창백한 관념의

접시를 박살내고 달리는 마을버스 2-1에

올라타 익숙한 풍경 속으로도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시집 『상상 한 상자』, 랜덤하우스중앙, 2006

 

 


 

 

성미정 시인 / 어쩌면 시인이 아닐지도 모르는 증후군

 

 

코딱지를 씹어 먹어봐도 내 콧구멍

냄새를 맡을 수 없어 절망하고 있는

나는 어쩌면

 

불면증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루에

한 시간 꼭 낮잠을 자줘야 하는

나는 어쩌면

 

수요일이 오면 오천 원에서 육천 원

사이의 가난한 꽃다발을 고집하는

나는 어쩌면

 

백합꽃의 봉우리가 조금이라도 열리면

거기에 코를 대고 킁킁대고 있는

나는 어쩌면

 

시인의 변태일지도 모르는

나는 어쩌면

 

그러나 이 넓디넓은 광화문에선 누가

시인인지 아무도 모르니 내가 시인의

변태일지도

 

아무도 모르는 셈이다

 

귀와 코 중 어떤 것이 더 길어져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도 없는 셈이니

 

어쩌나 나는

 

-시집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에서

 


 

성미정 시인

1967년 강원도 정선 출생,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 『사랑은 야채 같은 것』 『상상한 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