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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 시인 / 도둑과 시인
이 사회에서 입 하나 살 길이 없어 잠시의 외출을 접고 다시 평생을 살았던 감옥으로 돌아간 늙은 도둑이 있었다 열 살 넘어서부터 살았던 밥 주고 재워주는 그곳이 그에게는 고향 같은 곳 막막한 자유보다는 더 절실했으리라 새장을 떠난 새가 결국 죽고 말듯이 등을 기댈 수 있는 한 평 반의 구석자리가 머물 수 없는 이 세상 어디보다 편하고 소중했으리라 모진 목숨만 남고 모두를 잃어버린 전과 30범 그의 얼굴은 초인처럼 평화로웠다
나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다시 빈방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아직 도둑만큼의 평화를 얻지 못했고 불덩이 같은 이마로 앓고 있다 창가에서 담 밑을 따라가며 핀 민들레를 바라보며 그는 나처럼 울지 않았으리라 허허 웃었으리라
김별 시인 / 연서(戀書)
유치환시인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10년 동안 5,000통의 편지를 보냈다.
평균 하루에 한 통 반, 요즘처럼 간편한 메일도 아니고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당했던 것이다.
괴테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7,000통의 편지를 보냈다.
세상에는 놀라는 일 불가사의한 일도 많지만 사랑이란 그렇게 아름다운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각 있는 사람으로 그들처럼 그토록 차고 넘치지를 못한다.
다만 어느 감동한 날에 시 한 편
즐겁고 행복하고 헛헛하고 밋밋하기에 사연 한 통
철새들이 날아가고 꽃이 피고 지는 날에 맑은 물에 띄워 꽃잎 몇장
계절이 가고 오는 날에 피어난 꽃 한 송이
별이 반짝일 때 풀벌레소리가 이슬처럼 맑아 잠못드는 날에 언덕 위에 달이 뜨고 달맞이꽃이 촉촉이 젖은 밤에 소식 몇통 겨우 그것뿐이다.
김별 시인 / 비(觀)
아침에 쓰던 시가 저녁이면 흐려지네 당신의 안경알 위로 들이치던 저녁의 빗소리처럼 자꾸만 흐려지네, 어느 비 오던 날 내 시에서 비관을 읽었다 말하는 당신을 말없이 안아주던 그날처럼 어두워지네, 그때 당신의 비관이란 가만히 앉아 하염없이 비를 바라보는 일이었단 걸 시간이 지나고 이제야 알게 되네. 돌이켜보면 내가 아는 당신이란 늘상 비관에 젖어 비 내리는 풍경일 뿐 그러나 이따금씩 햇볕 좋은 날에도 그때를 떠올리게 되는 건 당신이 항상 비관하던 그 자리에 남아 안개를 쏟듯이 흐려지는 당신의 실루엣 때문일까, 이제 나는 비를 내리는 것도 멈추는 것도 온전히 당신의 힘이라 믿네 비관하던 당신을 비관처럼 생각하는 나를 보면 혹시 당신은 비관할까. 아침에 찾아온 당신이 저녁에는 흐려지네 비를 내리고 멈추고 하는 것이 당신 아니라도 상관없네 어차피 창밖에는 계속 비가 오고, 우리 같이 비관하던 그 자리 흐려져 오로지 비관만이 남았네
김별 시인 / 한글
한글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와 언어와 문자의 불가마다. 그 모두를 고려청자와 같은 최고의 걸작으로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실현은 지구촌 인류 문명을 아름다운 행복과 진정한 발전으로 이끌 수 있는 직지와 같은 새로운 문화 창조이다.
그것은 일찍이 인류사에 존재한 어느 사상 종교 체제로도 이루지 못한 대동세상 홍익인간의 가치를 온 누리에 꽃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 한글을 통해 세상의 온갖 현상들을 보석으로 빚는 연금술사 시인이다.
한 생을 바치는 것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김별 시인 / 시대가 시인에게
시대가 시인에게 꽃이 돼라 하네
상처 입고 아픈 이에게 머리의 언어가 아닌 가슴의 언어로 다가가라 하네
삭막한 시대가 시인에게 나무가 돼라 하네 지친 이들에게 그늘이 되고
배고픈 이에게 열매를 나누어 주라 하네
절망과 탐욕이 가득한 시대가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 사는 시인에게 썩고 병든 것들을 위해 멈추지 않는 싱그러운 파도가 돼라 하네 바다가 솟아나 산이 되어도 소금 사막이 돼라 하네
미움과 증오가 가득한 세상이 죽을 만큼 아파도 사랑의 이름으로 다시 깨끗한 얼굴로 서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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