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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희 시인 / 건너가는 과정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8.
이정희 시인 / 건너가는 과정

이정희 시인 / 건너가는 과정

 

 

잘 엎드려야 비로소 앉을 수 있다

 

또 잘 앉아야 잘 설 수 있다

 

그러나 잘 엎드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앉고 서고 눕는 일은

이 지구상의 습관이거나

종사하는 자세

 

부지런히 나를 엎드리는 중이다

 

끝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때까지

 

 


 

 

이정희 시인 / 거름

 

 늘그막의 아버지

 벗어놓은 양말이며 옷가지에서

 거름냄새가 났다

 그건 아버지가 비로소

 아버지를 포기하는 냄새였을까

 그 옛날 장화를 벗을 때나

 땀에 전 수건을 받아들 때 나던

 그 기세등등한 냄새에서

 초록을 버린 풀들이 막 거름으로

 이름을 바꿀 때의 냄새가 났다

 

 아버지가 앙상한 등짝으로 부려놓은 풀 더미에 가축 오줌과 똥을 잘 섞는다 각자의 냄새를 지켜내겠다고 서슬 퍼렇게 날뛰던 것들이 오래 지켜온 습성을 버리기 시작한다 저마다의 냄새로 진동하던 것들이 고집을 버려 삭아지고 토해내며 거름으로 될 때의 냄새가 난다 검은 흙빛 미지근한 열감으로 모든 냄새들이 포기하여 뭉쳐진 거름

 

 들녘을 키우며

 아낌없이 주는 거름

 깜빡 졸고 있는 그 틈에도

 아버지의 밭은 성성했다

 러닝셔츠 구멍 사이로

 기력 다 빠져나간 아버지의 밭에

 폭 삭은 거름 한 짐 뿌리고 싶은데

 지금쯤 아버지는

 어떤 냄새로 접어들었을까

 

 


 

 

이정희 시인 / 기우뚱거리는 물

 

 

여자가 길어오는 물은 바닥까지 기우뚱거렸다

 

한 번도 채워보지 못해 가득이라는 말을 모르는

가족들은 늘 기우뚱거리는 물을 먹었다

 

파도처럼 요동쳤던 물도

 

그릇에 따라 놓으면 언제나 반듯했다

 

여자의 한쪽 다리는 난간처럼 짧았다

 

아니, 다른 한쪽이 조금 길었는지

길이의 편차로 겅중거리는

그 한쪽이 짧은 물을 먹고 살았다

 

이상한 일은 그런 물을 먹었음에도

가족들 중 누구도 기우뚱거리거나

한쪽이 짧은 사람이 없다

 

어깃장 놓는 힘으로 기우뚱거리는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힘주어 걸어야 하는 그 한쪽에 진땀이 베어 나오고

먹구름이 따라다녔다

 

갈아입을 수 없는 몸에 비명이 부지불식간에 솟아도

숨의 처마에 적막을 우겨넣던 한숨

 

여자의 심장이 싸늘할 때 기우뚱,

 

허공을 치받던 불균형도 잠잠해졌다

 

기우뚱거리는 울음과 한쪽이 짧은 통곡이

장례 내내 들렸다

 

 


 

 

이정희 시인 / 옹알이

 

 

꽃들이 말문을 튼다

꽃이빨의 따뜻한 온도는

3월 끝의 햇살쯤 될까

할머니 입속에 뿌리내린

몇 안 남은 이빨에서 정~아 웅얼거리신다

 

말투가 따뜻해지는 것은

이빨이 다정해서이다

 

말문을 트는 사람끼리 이해와 오해들이 생겨난다

손가락이 가라키는 것들은

이름을 갖게 되고

오해는 결별이 되기도 한다

 

또박또박 제 할 말 있어 피어나는 꽃들

 

꽃들은 이제 막 튼 말문으로

곧 사라질 아지랑이를 우물거리거나

겨울잠에서 꺼낸 햇빝들을 대신해

웅웅 소리를 낸다

 

꽃의 말이

다른 꽃에게는 들리지 않아

 

나의 방백으로

 

할머니의 엉성한 이빨 속에

뿌리를 내린다

 

-시집 <꽃의 그다음>에서

 

 


 

 

이정희 시인 / 오늘처럼 보고픈 날에

 

 

오늘처럼 외로운 날엔

가슴에 하나 가득 꽃향기를 담겠어요

그 향기 속에서 그대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오늘처럼 그대가 보고픈 날엔

빨간 꽃잎 하나 가슴에 꽂아 두겠어요

꽃처럼 밝은 마음을 전해주는 그대이니까요

 

오늘처럼 그대가 그리운 날엔

들녘에 이름모를 새들과 노래를 부르겠어요

 

부르는 그 소리가 노랫말이 될터이니까요

오늘처럼 그대가 기다려지는 날은

봄바람 타고 춤을 추겠어요

바람타고 오실 그대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오늘처럼 그대를 가슴에 두고픈 날엔

한편의 시를 쓰겠어요

그대가 그리운날 펼쳐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정희 시인 / 한끗

​공중이 휘어지면

계절의 한 부분이 꺾인다

휘어짐의 끝은

붉게 익은 홍시 몇 개 달려 있는 것

높은 곳의 가지를 휘는데

튕겨나가며 잘 휘어지지 않는다

그건 감 몇 개를 지켜내겠다는

나뭇가지들의 완고한 힘이다

그들만의 반경이고 외침인 것이다

높은 것들은 다시

높은 것들이 와서 먹겠지만

허공은 한 번의 그 빈자리를 망각한 적 없다

잡아당겼던 힘으로 겨우

이파리만 훑어 민망한 적 있다

나뭇가지들은 휘어지는 일로

얼마나 자신을 증명해야 할까

무수한 사이와 간극에

함몰된 긴장을

허공으로 튕겨 내려했을까

불안의 간격 그 갈라진 틈 사이

한끗으로 비켜간 안도가 수북하다

끝까지 지켜낸 것들은

결국 바닥의 것이 되겠지만

휘고 또 휘어지더라도

지켜내고 싶은 생명이 있다

-시집 『꽃의 그다음』 (상상인, 2021)

 

 


 

 

이정희 시인 / 머리맡

 

 

물 한 그릇 놓아두면 머리맡이다

 

물그릇엔 물이 말라간 흔적이

천천히 각인되어 있다

아래로만 트인 물의 의중에 따라

꽃피고 마르고 다시 잦아든 지층처럼

고요와 냄새가 내려앉은 흔적

더 이상 민망이 없는 몸에

여름옷 한 벌이 입혀져 있다

머리맡은 산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 예의 같은 곳이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검은 그림자

갑작스레 당한 일들처럼 민낯을 접지 못하고

징검돌처럼 이어붙인 시간의 배웅과

켜켜이 앉은 물그릇의 날짜를

아무도 세지 않고 어림짐작으로

한 죽음을 정리했다

마른침 삼키듯 남은 숨을 들이켠 주저흔

물그릇은 자신의 목마름을 천천히

지층으로 쌓았을 것이다

 

죽은 사람도 갈증의 속도가 있었을까

살아서 마셨던 벌컥, 그 갈증을 지우는 속도

조금씩 느슨해지는 아귀의 힘

꾸물거리는 일조차 갈증이고 조바심이었을까

마지막 목격담이

물의 기억으로 말라 있다

 

 


 

이정희 시인

1961년 경북 고령 출생. 효성여대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20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꽃의 그 다음』. 제3회 해동공자 최충문학상 시부문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