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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시인 / 들판의 권력
꽃은, 자기 자리가 좋으면 얼른 씨를 뿌려 그 자리를 내어주고 홀연히 사라진다 계절을 넘어 더 좋은 꽃으로 피고 들판은 무상으로 임대를 내어주고
그 대부분의 배경과 풍경인 잡풀들은 더욱 생식력이 좋아 더불어 번성하면서 혼자인 듯, 모두 다인 듯 어깨동무할 이유가 없지 않아서 그 아래의 자잘한 것까지 거듭 거두어가며 지평을 넓힌다 창백하나 검소한 겨울이 가면 본능적으로 포실한 봄이 오는 없어도 많은, 넘치는 공간 순환이 순한 곳
그것이 들판의 권력
널브러져 있는 사소한 것들 미세하게 산소를 공급하는 존재들 잊혀진 것들 그러나 아무도 평등이나 계급을 요구하지 않으니,
그 충만한 무욕(無欲), 구름의 미끄럼틀이라 낄낄거리고 바람의 정거장이기도 해서, 그냥 오줌 막 누고 싶은 들판 그렇게 갈망이 팽팽해도 해소가 되는 곳 그러한 마음의 권력이 들판이지.
-시집 <빛 바른 외곽> 도서출판 선
이우근 시인 / 강(江)
이 나라의 가장 작은 사내인 이등병으로 백 킬로 행군하면서 야산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똥 누며 바라보았던 강물 비까지 내려버리면 나는 조그맣고 외로운 벌레 그렇게 묻혀진 스무 살 또 그렇게 이어온 나의 강물 돌아서서 꽃잎 같았다고 위로하고 싶지만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어림없다고 한다 그래서 괜찮다 잔인하게 나를 짓밟았던 추억은 세상을 살아가는 짭짤한 밑반찬,주머니에 가득하고 갈대에 찢긴 상처 따위로는 강물의 마지막 배경이 되지 못 한다고 다짐했던 시간 별사탕이 각성제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 나름대로 기특했지만 달빛에 부서지는 잔물결의 박수소리에 안주하지는 않고 다만 바람에 응수한 나의 저항은 부질없기도 하지만 또한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으리 그래서 맑은,나름대로 쓸쓸한, 결코 증발하지 않을 나의 강물.
이우근 시인 / 바다가 보이는 교실*
우리 사는 세상이 법당이고 교실이야 흔들리는 게 마음인지 깃발인지 중요하지가 않아 들판 같은 마음에 열리는 가을운동회 형형색색 만국기가 정답에 가깝다 선생님들은 뛰어난 사기꾼들 극한의 선인(先人)이자 악인(惡人)의 품성으로 충만한 선인(人) 돌아보면 과연 그럴까 싶어 그 마빡에 오줌을 갈기고 싶은 그러나 사해동포(四海同胞) 호혜평등(互惠平等) 가파른 가르침은 나름의 나침반 쓰잘데기 없는 망초는 왜 둑길마다 지천인지, 불편한 마음으로 순응하기 그래, 흔들리는 대로 마음이 따라가고 혹은 마음대로 흔들리면 그 뿐, 언덕을 넘어 뛰어가 저 수척하게 빛나는 하구(河口)를 보라 처음에 비로 내려 산이나 들판에서 찔끔거리며 시작하여 결국엔 여기에 이르러, 그 닮고 닳은 평상심으로 바람에 물결이 파닥거려도 상처는 없고 오직 흐르며 중심은깊은 곳에 있고 그리하여 모든 강은 바다에서 스스로 만나서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수평(水平) 하여 오늘도 맨발로 달리는 강물의 끝 선사(禪師)들이, 혹은 우리가 가려는 곳.
*정일근 시인의 시집 제목을 빌림.
이우근 시인 / 들꽃
풀숲이나 기타 경계 모호한 곳에 꽁초처럼 톡, 던져졌지만 한때 뜨거운 꿈도 있었지 절대 바람을 탓하진 않지, 비겁하니까 그러나 땅의 거름도 못 되고 바람의 생채기만 되어 우리, 만만한 얼굴들 하나쯤 제거되어도 표시나지 않지 서로 기대고 뭉개며 존재의 의미를 주무르며 사소한 책임전가로 옹알대는 즐거운 들판 그것이 우리의 생업(生業)이지 어둠이 별의 배후라면 땅은 우리의 막후 실력자, 그래, 우리는 부드러운 폭력, 별의 배설물 의미 없는 항거의 나날들, 변두리의 공화국들, 독립이 아니라 폐기되는 소외일지도 몰라, 그래서 찬밥 신세, 하여 꿈의 실크로드를 무단으로 점령하여 자빠지고 넘어지며 무성한 생식으로 대책 없이 지평 넓혀가며 일말의 존재감 과시, 나는 없어도 우리라는 평화, 그 무모한 위안, 그렇지만 한없이 울타리가 그리운 나날들.
이우근 시인 / 학생부군신위
제사 때, 아들이 물었다 할아버지는 무슨 학생이셨고 어떤 공부를 하셨나요?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다만, 니 애비 먹이고 가르치려 삶을 실천했다고, 그만한 공부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이미 신(神)의 위치에서 책임 없는 하늘에서 떵떵거리며 사실 것이다 지상에서 못한 거 화풀이로 횡포를 부리면서
창밖을 봤다
그 쓸쓸함의 생애가 사무친다.
-시집 <빛 바른 외곽> 도서출판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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