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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선오 시인 / 나무에 기대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7.
김선오 시인 / 나무에 기대어

김선오 시인 / 나무에 기대어

 

 

 물소리가 나를 흐르게 한다. 햇빛이 나를 하얗게 거두어들인다. 몸은 다 사라지고 나는 물이 되었구나. 물이 되었구나. 아무것도 아프지가 않다.

 

 눈을 뜬다. 눈앞이 온통 거미줄이다. 나의 검은 야구 모자 챙 아래로 거미가 집을 지었나 보다. 어둠 속에서 거미줄이 흔들린다. 거미도 흔들린다.

 

 거미줄을 떼어낸다. 손이 끈끈하다. 그러나 거미줄 여전히 눈앞에서 흔들린다. 비가 오려는 건가. 나는 주먹 속의 거미와 함께 돌아간다.

 

 


 

 

김선오 시인 / 야간비행

 

 

나는 저 인공의 빛들이 너무 아름다워

비행기 창가에 앉은 네가 말했다

새벽의 비행은 적요하고 모두 잠들어 있어

우리 어디로 가는 걸까

이 여행을 왜 시작했을까

물어도 너는 여전히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 곧 차오르는 햇빛이 이 모든

인공의 빛들을 지울거야

너는 창밖의 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출렁이는 비행기가 우리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별은 우리를 지우지 않는구나

햇빛처럼, 다른 빛을 지우지 않고도 빛으로 남아 있구나

밤하늘은 너와 나의 발밑에 가득 차 있고

이제 곧 동이 틀 거래

옆얼굴이 빛으로 물들어도

잊지 않을게

지상에 두고 왔다고 생각할게

너는 이미 빛이어서

동이 트면 사라지는 거지?

해에게 졌지?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줄게

승객들의 숨소리가 희미해질 때

왜 나는 네가 희미해진 것처럼 멈춰 있을까

목적지가 더 멀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

충분히 긴 밤이었는데

아침이 오지 않기를 기도했을까

 

 


 

 

김선오 시인 / 출구는 이쪽입니다

 

 

 그림 앞에서는 오래 서 있지 못했다 옆에 선 너를 재촉했다 넘어가자 넘어가자

 

 정물화의 뒷면은 정물입니다 몇 걸음을 걸으면 다른 풍경 앞에 설 수 있었다 다음 그림으로 가자 또 다음 그림으로 액자 말고 문이 튀어나올 때까지

 

 오른쪽으로 걸으면

 오른쪽이 계속되는 전시가

 

 뒤돌아선 너의 어깨를 돌려 세우면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뒤통수가 있고 뒤통수가 연쇄되고 뒤통수는 벌어지고 벌어진 뒤통수 안에 고여 있는 숲

 

 나는 너를 산책시키는 중이었어, 방향이 너를 해치지 않게 하는 중이었어

 

 하지만 우리는 군중 속에서 공간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

 함께 걷는 일이 가능하다면

 

 너의 오른쪽을 보며 왼쪽도 똑같이 생겼을 거라고 믿었다

 

 다음 그림의 앞으로 걸어가면서

 너를 나의 왼쪽에 남겨둘 수 있었지만

 

 너는 너의 뒤통수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곳은 아주 아름답다고

 

 텅 빈 벽 앞에서 눈을 감았다

 나의 바깥이 나를 넘나들었다

 

 


 

 

김선오 시인 / 증거

 

 

내가 너의 커피를 훔쳤다

이 얼룩이 그 증거다

 

네가 소파에서 펜처럼 쓰러져 잠들었을 때

너의 꿈을 빼돌렸다

검은 잉크 번진이

얼룩이 그 증거다

 

나는 너를 가로챘다

그러니까 네가 모르는 새에

네가 거울 보는 동안

뒷모습을 훔쳤다

길어진 내 그림자를 좀 봐라

 

그런데도 너는

오늘은 눈밭을 좀 걸어야겠다고

커다란 장화를 신고 왔다

 

걷는 동안

나는 네 발자국을 훔칠 것이다.

 

다시 눈이 내리고

눈이 너를 조금씩 지우면

하얘진 네 머리카락 훔쳐서

 

나의 미래에 갖다 붙일 것이다.

너를 넓게 간직하면

나의 지금이 늘어날 거다

 

더러워진 티셔츠 티셔츠

빨아대다가

얼어버린 손으로

 

뜨거운 커피

끓여놓고 앉아 있으면

 

너는 하얀 붕대처럼 돌아오겠지

 

나는 널 기다린 적 없을 거고

 

-시집 『세트장 2022』 문학과지성사

 

 


 

 

김선오 시인 / 내가 이렇게 쓰고 있으면

 

 

너는 사과를 깎아놓고 간다

내가 이렇게 쓰고 있으면

너는 내 책상을

창문 쪽으로 약간 틀어주고 가고

내가 이렇게 쓰고 있으면

너는 하늘을 조금 떼어

필통 안에 넣어놓는다

내가 이렇게 쓰고 있으면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끔은 가지도 않는다

내가 이렇게 쓰고 있으면

너는 허밍을

하면서 정원의 새들을

온종일 서성거리는 발들을

구경하고

그러나 새들은 떠나고

내가 이렇게 쓰고 있으면

너는 텔레비전 소리를 줄여

태풍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그곳에 조용히 가둔다

내가 이렇게 쓰고 있으면

너는 회색 소파에 누워

내가 이렇게 쓰고 있으면

너의 잠 속으로

깊숙이

촛농 떨어지는 소리

내가 이렇게 쓰고 있으면

너는 화상을 입겠지

내가 이렇게 쓰고 있으면

멀리서 태풍이 온다고

오고 있다고

내가 이렇게 쓰고 있으면

내가 이렇게  

  

-시집 『싱코페이션』, 2024, 아시아

 

 


 

 

김선오 시인 / 핀

 

 

 확성기에 대고 크게 웃었다. 도시가 불타고 있었고 마침 우박이 쏟아졌다. 불은 얻어맞고 멈추었다. 불이 자기 흉터를 봐 달라며 찾아왔다. 화상이네요, 금방 나을 거예요. 확성기에 대고 말하자 불은 조금 슬픈 표정올 지었다. 불을 위로하려다 한 걸음 물러났다. 괜찮아요, 연고를 드립니다. 화상 연고를 불에게 던져 주었다. 불은 연고와 함께 사그라들었다. 도시가 아늑했고 다들 태어나고 있었다.

 

 


 

 

김선오 시인 / 모빌

 

 

 피부 위에 거리가 지어지고 있다. 손등에 수영장이 고이고 허벅지 안쪽에는 사막이. 나를 만지는 손은 물에 빠지거나 모래 속으로 사라지거나 슬픔이 없는 거리를 지어 보자던 애초의 다짐이 희미해지고 자꾸 우는 사람이 생겨난다. 내 몸을 그만 적셔요. 이 작은 친구들아. 말하면 팔뚝으로 눈가를 홈치며 사과하는 작은 친구들. 그들에게 뺨을 내어 주고 누워 있었다. 코피가 나서 허겁지겁 다시 일어났다.

 

 


 

김선오 시인

1992년 서울 출생. 2020년 <나이트 사커> 출간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나이트 사커> <세트장>. 산문집 <미지를 위한 루바토> <시차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