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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 시인 / 잔디의 검법(劍法)
아스팔트 틈에 자리잡은 잔디 줄기 하나 길가에서부터 길 안쪽으로 칼자국을 내고 있다 아무도 몰래 아스팔트를 잘라 나가는 저 여린 칼날의 끈질긴 힘 칼날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초고수의 검법(劍法) 나도 그 검법에 손가락을 베인 적이 있다 베인 것을 한 참 지난 뒤에야 알았다 이른 새벽, 푸른 칼날에 묻어 있는 이슬 방울들을 보았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별빛들이 칼날을 투명하게 벼리고 있었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 하늘에서 땅 속에서 땅 위에서 잔디 이파리 속에서 내 몸 속에서 달팽이 걸음처럼 일어나고 있는 쿠데타 저 잔디…… 아스팔트 보수반 사람들이 몇 번을 잘라내도 멀찍이 물러섰다가 다시 꼬물꼬물 기어 나와 아스팔트 속으로 파고 드는, 칼의 영혼. 아무것도 자르지 못하면서도 모든 것을 자르고 있다
강수 시인 / 걸레
저 걸레는 내가 아끼던 수건이었다 이제는 방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가 더러운 것들을 닦아내기 위해, 가끔 정체를 드러내는 신세가 되었다 내 삶에서 잊혀진 지 이미 오랜데 나는 이미 새 수건에 맛들인 지 오랜데, 저 걸레는, 한때 내 몸을 닦아주는 수건이었던, 저 걸레는, 이제는 이리저리 찢기고 뜯기어 쓰레기가 되어가고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이나 내가 품어온 사랑의 흔적이 꼭 걸레 같다고 느껴질 때,
아무리 더러운 걸레라도 아름다운 이력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늦게서야 알게 된다는 것은 절망이다. ‘걸레는 수건이었다.’라는 진리 앞에서 나는 더욱 슬퍼지다가도 수건이라는 이름이 걸레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은, 결국, 내가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 괴로워하느니 나는, 한 번이라도 걸레 앞에 진실했던 적이 있던가.
그런 것이다 우리는 모두 헤어질 때 걸레가 된다. 걸레가 된 만남, 걸레가 된 사랑 심지어 이별조차도 걸레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게 사랑이라고, 사랑일 것이라고, 사랑이어야만 한다고, 사랑에 빠져 더럽혀진 삶을 닦아내기 위해서는 걸레가 필요하다는 진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걸레가 된다 사랑을 위해 걸레가 되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웃는다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은 내가 흘린 오물을 닦아주기 위해 기꺼이 걸레가 되어 주었다 이제는 내가 스스로 걸레가 되어야 하는 시간, 그러나 내가 살아온 만큼의 내공으로는 부족해 그 누구의 오물도 닦아주질 못한다 오늘도 걸레가 되기 위해 면벽하는 시간, 걸레를 빨아내는 손의 성스러운 미소가 번진다
강수 시인 / 자장면의 힘
1. 이제는 사라져 버린 중화반점 앞니 빠진 주방장이 면발을 뽑아내던 중화반점 천장에는 파리 끈끈이가 살랑거리고 이소룡의 맹룡과강을 잘도 흉내내던 짱께네 집 우리는 파리처럼 그놈의 그늘 속으로 모여들었지 이제는 기억 속에만 있는 중화반점 우리는 고요히 복종하는 법을 배웠지 자장면 한 그릇…단무지…양파… 그 속에 들어있는 짱께의 은총 동네 꼬마들을 휘어잡던 자장면의 힘 우리는 너무 일찍 복종의 힘을 알아 버렸지
2. 아파트 계단과 사무실 문밖에 가끔 놓여지는 짱께 그릇들 살아가다 보면 가끔 그때 그 자장면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내가 걸쳐온 옷, 지금까지 그렇게 껴입었던 자존심의 옷들을 홀가분하게 벗어버리고 그 자장면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일회용 그릇에 담겨 있더라도, 일회용 젓가락으로 먹을 수밖에 없더라도 먹고 나면 다 버려질 운명의 것들일지라도 먹는 순간만큼은 황홀한, 사람아 내 가슴 밖으로 내밀어진 자장면 그릇과 나무 젓가락 때로는 눈물나게 누군가에게 복종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사람아,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사람아. 어쩌면 나는 그·때·그·순·간·의·자·장·면을 먹기 위해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3. 지금 자장면을 같이 먹는 사람아 비위가 약한 내가 침 묻은 네 젓가락이 면을 비벼도 아무렇지 않고 단무지에 묻은 티끌에도 개념치 않고 씨익 웃으며 함께 먹을 수 있는 기적을 가져다 준 사람아,
이제는 사라져 버린 중화반점 그 때 그 사람들도 다 사라져 버린 중화반점 먹고 먹어도 또 먹고 싶었던 자장면아
나, 아직도 여기 있다
강수 시인 / 위대한 밥
밥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세상은 살만할 것이다 밥을 먹기 위해 버려지는 시간이 아껴지고 설거지하는 시간도 절약되고 물은 오염되지 않은 채 맑게 흘러갈 것이다 가축은 자유로운 생명을 누릴 것이며 초원은 푸른 생명으로 가득할 것이다 밥그릇 싸움이 사라질 것이며 돈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고 사람들은 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다 밥을 같이 먹어주는 패거리에 들어가기 위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며 밥을 차지하기 위해 으르렁거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루 세 끼 밥을 먹는 게 힘들고 짜증이 나서 삶은 늘 고통스럽다 아, 먹는다는 말 속에 숨어 있는 쾌락과 고통이여 오늘도 기쁘게 울면서 나는 밥을 먹는다
강수 시인 / 구멍
살기 위해서는 막혀 있다가도 뚫려 있어야 하지 뚫려 있다가 막히기도 해야지
어떤 삶은 막혀 있어서 죽고
어떤 삶은 막혀 있어서 산다
어떤 삶은 뚫려 있어서 죽고
어떤 삶은 뚫려 있어서 산다
구멍이 보이지 않아 햇살이 비치지 않아 슬픈 어둠 속에서 구멍을 찾는다 뚫려 있으면 막혀 있는 곳이 있고 막혀 있으면 뚫려 있는 곳이 있다 막아야 할 구멍은 막고 뚫어야 할 구멍은 뚫고 죽어야 할 생명은 죽게 하고 살아야 할 생명은 살게 하고 구멍 하나로 구멍의 크기에 맞춰서 삶과 죽음을 조율하는 일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는데 늘 남 탓만 하는 모순
피리를 꺼내서 분다 막을 구멍은 막고 열어야 하는 구멍은 열고 세상에 울려 퍼지는 구멍들의 연주 세상의 구멍이라고 버려진 구멍들이 모여서 피리소리가 된다 구멍을 채우는 소리가 된다
강수 시인 / 저만치 -조물주의 낚싯법
닿을 듯이 닿지는 않게 보일 듯이 보이지는 않게 늘 저만치의 거리에서 팽팽하게 후려쳐지는 낚싯줄
나는 푸르게 푸들거리며 끌려가느니 저만치 낚싯줄의 길이만큼 허용된 몸부림의 시간......
이미 끝났어도 끝날 수 없는 것처럼 죽었어도 죽을 수 없는 것처럼 여전히 팽팽한 낚싯줄의 긴장
가난한 자들의 밥상 위에 놓인 횟접시에서 온 살점을 발라내고 난 뒤에 나는, 눈을 한 번 질끈 감고 등뼈를 타고 내려가는 바다의 기운을 모아 온 몸을 펄떡였다
-≪다층≫ 2018 가을호
강수 시인 / 가을을 따다
사람들은 발가벗고 산으로 간다 마음을 모두 벗고 단풍빛 옷을 입는다 나무들보다 먼저 단풍이 들어 산 속으로 들어간다 무엇이든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피워내는 불꽃은 황홀하다 나무들은 가지마다 낮에 오히려 밝게 빛나는 불빛을 피워내고 있다 그 불빛이 탐나서 산으로 온 사람들은 그 불빛에 가슴이 온통 활활 타오르고 돌아올 때는 발자국마다 재를 떨어뜨리며 온다 사람들은 발가벗고 산으로 간다 나무들이 온통 켜 놓은 불꽃에 빠알갛게 익고 익어서 뻘뻘 땀을 흘리고 흘리다 마음에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제낀다 마음까지 벗어버리고 우유색으로 반짝이는 살빛으로 하산한다 산은 어느 곳으로나 길을 만들어 놓고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까지 쫓아가서는 가만히 사람을 내려놓는다 가끔은 사람이 사는 고층아파트까지 쫓아왔다가 샛노란 은행잎을 데리고 돌아가기도 한다 그런 날 밤에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남자와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꽃을 피워내기도 한다 산의 어깨에서부터 슬금슬금 내려온 단풍잎이 다시 한 번 얼굴을 붉히다 툭 떨어져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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