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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육호수 시인 / 落夢―遺言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7.
육호수 시인 / 落夢―遺言

육호수 시인 / 落夢―遺言

 

 

얼마 전 다시 찾은 코창에서

친구들과 돌아가며 시를 읽었다

 

나한테는 내 시가 없어서

네이버에서 검색해서 찾아 읽었다

 

누군가

블로그에 한 구절을 틀리게 올렸는데,

이후로 사람들이 그대로 복사해서 올렸는지

모두 똑같은 부분이 틀리게 올라와 있었다

 

“야, 네이버에 내 유언들이 전시되고 있어”

웃음이 한번 터지니까 멈추질 않았다

“근데 유언에 오타가 났어”

“누가 니 유언 별로래, 뭔 말인지 모르겠대”

 

여기가 내 묘지네, 공동 육호수 묘지

두 번째 시집 나오기 전까지

나는 절대 죽으면 안 되지만,

 

혹시 내가 먼저 죽으면

여기 블로그에 와서 댓글로 추모하라고 했다

 

“추모 댓글엔 오타 내지 말고”

 

애들이랑 웃음이 숨넘어가게 터져서

읽으려던 시는 못 읽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슬픈 유언만 썼구나 싶었다

이것도

지금 생각하면 웃기고

 

 


 

 

육호수 시인 / 落夢-馬頭琴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 딱 한 번

어린 첫 딸을 산에 묻고 돌아오던 날 이야기를

내게만 해준 적 있다

칠십몇 년 전, 나의 부친이 태어나기 전 일이었다

죽은 아이의 아빠는 나의 조부가 아니었댔나

 

기억이 온전하지 못한 이옥순 할머니의

온전한 기억이었다

 

나의 부친이 중학교에 가던 해였댔나

나의 조부 육부연은 자살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집안 어른들에게 처음 들은 이야기였다

 

그날 이후로 종종 꾼다

방금 어미가 떠난 달걀이 되어

천천히 식어가는 꿈

이 꿈에서 깨고 나면 꼭

그때 옥순이한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이 꿈이 그날 이후 내게 찾아오는 거란 걸 알게 된다

 

아흔의 할머니가 잠시

스물한 살의 호수와 동갑내기인 옥순이가 되었던

이천십이년 전농동 산 32 다시 몇 번지

 

기억이 피가 되는 꿈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나의 눈과 귀가 생겨나고

차가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도로 식어가는 꿈

 

(중학교 삼학년 겨울, 청평종로기숙학원에서 친해진 여자애가 나한테

편지로 쓴 적 있다

“호수야, 네 눈을 보고 있으면 비밀을 말하고 싶어져”)

 

이 시는

나와 피를 나눈 누구도

읽지 않으면 좋겠다

 

인터넷에 올리지 마시오.

 

 


 

 

육호수 시인 / 추억은 배낭에 쓰레기는 가슴에

 

 

그러니까, 철수와 영희가

장기 여행자이자 인스타 헤비 업로더였을 때

기억 속에 수많은 객실을 가진

임대업자들이었을 때

그러나 세 들어오는 이 있을 리 없이

 

축제가 한창이던 어떤 도시에서 영희는

텅텅 빈방들을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고서

“Do you have an available room?”

빈방들을 욱여넣을 빈방을 찾다가

찾아 걷다가 찾다가 영희는

텅 빈 이 몸을 이국의 귀신에게 물려주고 싶었다지

 

온통 소똥뿐인 골목에서 철수는 심통이 나 카메라로

똥만 찍고 다니다

골목에 쭈그려앉은 영희를 처음 보게 된다

소똥, 개똥, 쥐똥, 새똥, 사람똥, 돼지똥,

철수(selfie), 똥에 파묻힌 꽃잎, 소똥 속에 죽어 있는 쥐, 일렬로 난 똥, 똥 위로 난 바큇자국, 그리고... 영희

“그러니까 철수야, 모든 걸 그만두고 모든 걸 함께하고 싶어”

 

어느 밤, 악몽에서 내쳐진 영희에게

잠든 철수의 눈잔등은

열쇠를 삼킨 채 닫힌 싱글 룸처럼 막막해지고

그래도 이 악몽만은 우리를 진실하게 사랑한다 믿고 싶고

사랑 안 한다, 사랑한다, 사랑해라, 사랑해, 사랑 안 한다...

 

다음 날 아침, 영희와 나란히 거울 앞에 서서 양치를 하며

‘우리의 여덟 개의 눈동자가 마주칠 4의 4제곱 개 경우의 시선’에 잠겨 있던

철수에게

영희의 빈방들이 어항처럼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을 때

영희야말로 구원에 최적화된 영혼 같다고 느끼게 되었을 때

 

서로가 서로의 끝을 배통 속에 감춰둔 것처럼

가까워지며 끝으로만 가는 것 같았지

 

손가락 총을 서로에게 겨누고

“이 놀이에 먼저 질리는 사람은 진짜 총 맞는 거야”

 

빵! “철수를 좋아하는 영희”

빵! “철수를 좋아하는 영희를 좋아하는 철수”

빵! “철수를 좋아하는 영희를 좋아하는 철수를 좋아하는 영희”

“철수를 좋아하는 영희를... 영희를...”

 

그렇게 수많은 서로를 잃고도

아직 그들이 철수와 영희라는 건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철수 같은 철수의 눈을 알게 된 영희였다

철수는 철수라서 영희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철수였다

 

이젠 악몽도 찾아오지 않는 빈방에서, ‘내가 살고 있는데

왜 이곳은 빈방이지?’ 생각이 들 때면

내가 찾으려던 철수 너를 이제 너도 찾게 되었을까 궁금해지는 영희였다

절대 기억 안 한다는 영희의 말을 영희가 잘 지키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철수였다

 


 

 

육호수 시인 / 물길

 

 

오늘 골목 한 귀퉁이엔

그곳이 제 자리인 양 앉아 우는 사람이 있다

오래전

그 사람을 잃었던 것 같다 골목은

그 사람이 몸을 끌었던 자국 같다

 

오늘 골목엔 보도블록이 많고

보도블록엔 조개껍데기가 많고

조개껍데기 위엔

달에 이끌려 부풀던 바다가

가로줄 무늬로 남아있다

 

바다 ,라고 말하면

바다를 잃은 적 있는 것 같아

빗금으로만 칠해놓았던 해변은

다시 찾을수록 옅어지고

매일 한 사람씩 잃으며

골목은 둘레를 넓혀왔다

 

숨을 바다가 없었던 거야

갑자기 바다가 밀려왔던 거야

 

혼잣말이 다 사라질 때까지

눈을 감고 백까지 셌다

모래 속에 발을 감춘 나무에게

걸음을 나누어 주었다

 

하나,둘,

잎사귀 사이 피어나던 포말과

같은 방향으로 흔들리던 버스 손잡이와

아흔일곱,아흔여덟,

시계추처럼 오가던 파도와

 

 


 

 

육호수 시인 / 물끄러미, 여름

 

 

거울에 붙은 모기를 죽이려다

무언가를 죽이려 다가가는 얼굴을 들켰다​

 

웅덩이에 빠져 몸을 휘젓는 지렁이를 빤히 바라보다

깜짝 놀라 지렁이를 건져냈다

정오의 태양은 태양으로 가득했고

손차양을 하다

손등에 난 점 하나를 처음 발견했다​

 

기적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구름에게 하루를 다 내어주어도 좋았다​

 

그해 여름엔

거울에 피를 묻히지 않았고

거울 속에 손을 넣어 지렁이를 건져냈다​

 

감감히 잠겨가는 감나무 그늘 아래 앉아

외면할 수 없음은

포기일까 망설임일까 생각했다

몸을 휘젓기도 했다​

 

구름에게 하루를 떼어주고 맞바꿔온 소원을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다시 하루와 맞바꿔왔다

 

― 시집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문학동네, 2023)

 

 


 

 

육호수 시인 / 스노우 볼

―난민의 육아

 

 

새장 속에서도 새는 가볍습니다

 

벽과, 창살과, 유리와,

유리를 통과하는

빛과, 유리를 통과하지 못하는 빛의 입자와, 꿈

속으로 새어 들어오는 목소리와, 새어 들어온 적 없는 목소리와,

파문과 시간의

인과와, 사랑과, 별과, 어둠 없이 당신의 부재를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포장된 과자봉지 안의 서늘함

 

천사는 자신이 곤궁할 때를 대비해 나를 살찌우고

덕분에 나는 낮잠을 자는 등대지기입니다, 빛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나는 쇠창살을 태연히 통과하는 아기 고양이

흔들리는 커튼과 수줍게 입을 맞춥니다

 

하늘을 향해 흔들리는 끊어진 거미줄 하나

지나던 빛이 거미줄에 베일 때

세상은 잠시 금이 간 스노우 볼 같습니다

 

필연

기도를 할 때면 사진 속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참호 위에 내일의 만나가 쌓여 썩어갑니다

나는 나의 유일한 상주가 되어

씨앗의 춤, 이미 잠에 빠진 사람을 위한 노래

필연 나의 귀는 먼 곳에 있는 것입니다

 

새장 속에서 비로소

혼자 있고 싶어 더럽습니다

 

 


 

 

육호수 시인 / 일곱 살의 그림자가 나를 따라 들어오고

 

어떤 꿈에선 내가 정말 일곱 살이었다

그런 날엔 일곱 살로 깨어나

착하게 이불을 개고

문법 수업을 듣고

국밥을 먹고

신문을 보고

사랑을 했다

그러나 일곱 살의 나는

시를 못 써서

의자에 앉아 한꺼번에

나이를 먹어야 했다

꾸역꾸역

울음이 쏟아졌다

눈에서 그림자가 쏟아졌다고

일곱 살이 아닌 내가 받아 적었다

―시집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

 

 


 

 

육호수 시인 / 희망의 내용 없음

 

우리가 우리에게

발각되지 않는 곳으로 가자

 

더 많은 공기를 정화할

더 많은 허파가 필요한

오래된 세계에서

 

더 많은 빙하를 녹일 더 많은 체온이

더 많은 어둠을 흡착할 더 많은 악몽이

더 많은 멸종을 지켜봐줄 더 많은 마음이 필요한

오래된 세계에서

 

사람인 채로 더 이상

망가지고 싶지 않아

 

적막 속에 찾아오는 수치심은 아름다웠음

몸을 떠난 살은 몸보다 먼저 썩었음

희망의 내용 없음

 

여러 겹의 몸을

몸 위에 겹쳐지는 무수한 유령들을

허물로 남겨두고

밤의 아름다움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자

푸른 하늘 은하수 끝나지 않는 손장난

밤이 기어이 밤을 어기는 곳으로

 

우리라고 부를 이 없음

우주선 없음

다른 세계 없음

희망의 내용 없음

 

내가 너에게 발각되지 않는 곳에서

울지 않고 기다릴게

거울에 갇힌 구름은 갈 수 없는 곳

어린 신의 어항 속

천사의 아가미를 달고

면벽의 안식 속에 감금되어

죽음과의 문답으로부터 소외되어

 

나의 굴레만을 나의 것으로

소유자 없는 나의 소유로 여기며

기다리는 이 없는 기다란

기다림

무색무취 수신자 없는 기도를

잇고 있을게

 

오래된 세계에서

지나치게 외로워서

지나치게 정직했음

영원에 진 빚 없음

-시집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2023.

 


 

육호수 시인

1991년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석사과정. 2016년 대산대학문학상 수상. <창작과 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시집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