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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욱 시인 / 반야사 배롱나무
늙었어도 나무가지에 꽃 일만 개 쯤 매달 힘은 아직은 있어. 누가 날 보고 늙었다고 하지 젊은 것들은 날보고 늙었다고 뒤담화를 몰래 수근 대지만 한 오백년 살면서도 바람한번 피우지 않고 꽃피고 질 때를 알지, 한번 꽃피면 백일동안은 거뜬하게 버티지. 젊은 것들은 꼭 사랑하다가 지치면 배롱나무 아래 찾아와서 세상 떠나가도록 울지만 그래도 나는 외면하지 않아. 더러는 부드러운 입술 같은 푸른 잎을 드리우고 포근하게 위로해 주기도 하지. 눈가에 눈물 대롱대롱 달고 가는 젊은 것들을 보드라운 바람으로 달래주기도 하지, 세상 늙지 않는 건 없어 나처럼 곱게 늙어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살다보면 알아. 이제부터 날 늙은이 취급하지 마.
정성욱 시인 / 빙하기
바위 속에 숨은 꽃씨 천년 화석 되었나. 물과 물이 만나고 공기가 공기를 만나 꽃이 될 공중의 시간, 싹의 순간을 기다린다
진정 어떤 말을 해야 닫힌 가슴을 여나 얼어붙은 강물 속을 대안은 풀리지 않고 남과 북 빙하의 시대 봄은 아직도 멀었다
-《열린시학》 2018. 봄호
정성욱 시인 / 구운몽, 그 꿈에 대한 유폐의 시 -김만중 아홉 개의 꿈
꿈인가 싶어 깨어 보니 노도에 눈 내린다 태속 같이 보드라운 눈밭 얼굴을 파묻으면 주름살 깊은 어머니 내 눈가에 선명하다
먼 길 노 젓다 돌아오는 쪽배인 양 그리움 몰아치다 파도 위로 사라지면 갯바위 조가비처럼 적셔드는 흰 적설
이른 새벽 깨어나 필묵 들어 시를 쓴다 사록은 등불 속에 시절 없이 흔들리고 뇌리에 지난 생들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돌아보면 내게 있어 한갓 생은 꿈이었네 말 잃고 벼슬 잃은 유폐의 날들을 생각하니 금강경 한 줄 공처럼 내 무심에 젖어든다
인간사 부질없음을 단 하룻밤에 깨달아 눈 감은 눈 감은 듯 써 내려간 일필휘지여 내 미처 어찌 몰랐을까 이생이 한갓 꿈임을
산마루에 앉아서 먼 바다를 바라보니 흰 눈은 내려 앉아 백발의 내 몸을 덮고 손에 든 서책에 쌓이는 왕조의 시름이여
희빈의 치마폭 왕 그 또한 내 님이거늘 오교에서 기울던 술잔 지금도 생각나네 님 계신 그곳을 떠나 홀로 달랜 사년이여
반생을 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네 노도에 맺힌 한이 한 생각에 풀어지고 그대가 품고 있던 경 또한 모두 꿈인 것을
찢어진 가슴 씻고 나니 이곳이 어디인가 통한은 마르다 못해 한지에 스며들고 이 한 몸 망부석 되어 만리 서포를 지키네
자나 깨나 품속에 금강경을 품었더니 내가 겪은 세상이 아홉 개의 허공이었네 손들어 잡아보아도 그냥 그저 구름이었네
-「정형시학」(2020, 겨울호)
정성욱 시인 / 석남사 가는 길
길 끝에 놓아버린 幻(환)인가 싶었더니 어느새 심장 날카로운 針(침)으로 박힌 고독 이 불혹 견디지 못했던 내 사랑이 있었다
문득 돌아보면 실타래처럼 풀려 가는 인연 아찔하게 눈물 핑 도는 눈물인가 싶었더니 비구니 홍조 띤 얼굴 그런 사랑이 내게 있었다
내가 버린 것들 이제 다시 주워 모으고 버리지 못했던 것들 다시 다 버리고 나면 몸 중에 오래 남았던 그런 사랑이 내게 있었다.
정성욱 시인 / 몸 속의 새
저문 길을 돌아가면 적요 속의 새가 보인다 날개, 저 푸른 날개 내 몸 속에 새가 있다 비상의 힘찬 하늘로 사라지는 새가 있다.
언젠가 내 몸 속의 새 한 마리 보았다 어둠 속 적요를 날카로운 부리로 쪼개는 저 새를 아무도 몰래 오래도록 키워 왔다.
정성욱 시인 / 장성역 - 서옹 큰 스님
저 새 우는 소리는 내가 목놓아 우는 소리다 그 소리에 내가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 꺼억 컥 세상 뜬 스님 풀지 못할 적, 멸, 탈
길에 던져버린 화두 다시 주워 삼키다가 무장무장 내리는 눈꽃 눈꽃 무게에 눌린 몸, 씹어도 다 씹을 수 없는 결코 소화할 수 없는 公案(공안)
정성욱 시인 / 어머니의 금가락지
지금은 교정의 마지막 학기, 비싼 등록금을 어머니의 금가락지로 등록하고 교문을 빠져나오던 날 그해 마지막 폭우가 내렸다 집의 경제가 넉넉한 학우들은 남은 가을 학기의 추억을 걱정하고 나는 어머니의 가는 손가락의 허전함을 생각하였다. 이미 두 아들의 학비를 위해 저당잡힌 옛 고향집이 마을 농협에 접수되고 잘리운 열 여덟의 추억이 스민 어머니의 결혼 가락지마저 팔았을 때 어머니의 굳건한 법도에는 왜 그리 많은 폭우가 내렸는지 강의실에 앉아 돈도 밥도 되지 않는 시를 쓰며 이 땅의 불안한 정세를 이야기하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밤새 읽으며 치부할 수 없는 그리움을 홀로 달래었지만 끝내 내 몸을 칭칭 감아 올리던 다섯 돈의 금가락지 나의 어머니의 슬픔을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이 땅의 어머니는 모두 금가락지를 빼주었을까 종일 쓰디쓴 탕약 같은 아픔이 유리창에 번지고 지식의 몇 두께보다 더 튼튼한 어머니의 팔뚝 어머니의 낯설지 않은 희망 이젠 비 개인 가을 교정에 흩어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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