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민채 시인 / 시 익는 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
김민채 시인 / 시 익는 밤

김민채 시인 / 시 익는 밤

 

 

조개구이집에 앉아 조개를 깐다

 

불에 그슬려 찔끔거리는 조개를 까뒤집는 폼이

시인답지 못하다며 친구가 낄낄거린다

 

시인 아닌 친구는

시인다운 걸 어디서 배웠는지

 

적당히 취해 시를 읊어댄다 그 소리에

파도가 서로를 부등켜안고 밀려갔다 밀려오고

 

고양이 두 마리 발밑까지 왔다갔다 한다

 

친구의 시낭송에 붙들려 장단을 맞추는 나는

시인스러운 게 어떤 건지도 모른 채

그 판이 다 끝나도록 조개만 깐다

 

-시집 『노랑으로 미끄러져 보라』 2022 상상인

 

 


 

 

김민채 시인 / 강구항

 

 

강구항에 부는 바람은 집게발로 온다

발 크게 벌려 해파랑 오르내리며 파랑의 높이를 잰다

오늘은 대체로 파랑,

엄지와 검지로 바다를 당긴다

 

집게에 물린 손가락이 줄줄 엮인다 입이 엮인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바람을 너무 몰라

엮이는가 싶으면 밀어내고 멀어졌다 싶으면 다시 당겨도

아직은 무사한 사이

 

집게에 걸려든 게를 집게질한다 게가 그랬던 것처럼

게를 가위질 하는 오늘, 나는 대체로 파랑

자꾸만 넘어지는 바람을 세우려 파도가 파도를 탄다

 

눈 감고도 콕 찝을 수 있는 햇발 한 가닥 감아볼까

불면의 수조에 안개처럼 스모그처럼

비몽과 사몽의 중간대를 견디는 대게를 위해

 

강구항에서는

해가 사람 얼굴로 떨어져야 진짜 밤이 온다

 

 


 

 

김민채 시인 / 그리움이 행복에 기댈 때

 

 

어제 흐르던 눈물 닦게

손 내밀어 준 당신

 

아침에 눈 크게 떠

바라볼 수 있어

감사합니다

 

겨울 산벼랑에 걸린 목숨

어둔 생각 버릴 때까지

 

이리도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

 

내가 나를

꺾은 몇 가지 운명

 

허우적거려도

언제나 눈동자처럼

지켜봐 준 당신 있어 행복합니다

 

내일도

내손 붙잡고 지켜줄

든든한 그대 마음

행복 전합니다

 

 


 

 

김민채 시인 / 기다림

 

 

그대의 음성이 바람결을 타고

내 가슴에 내려앉던 그날처럼

 

은빛 별빛은 달무리 타고

정염을 토해내며

내 가슴을 붉게

물들여 놓습니다

 

푸른 새벽을 걸어오시는

햇귀처럼 내 마음을

붉게 물들이는

그대여

 

그대 오시는 그 길위에서

나 두팔 벌려 맞으리.

 

 


 

 

김민채 시인 / 풍경

 

 

처마 밑 황동 금붕어

물 한 모금 못 먹어도

바람 데리고 잘 놀더니

오늘은

꼼짝하지 않습니다

꽃들도 무슨 일인가

몸 낮추고

바람은 더 아래로 허리 숙이는데

생각 깊어진 금붕어 눈에

달빛이

한 자반이나 쌓였습니다

 

 


 

 

김민채 시인 / 심장이 틱톡 틱톡

 

 

광대가 있어

하루를 건널 때마다 메롱거리는 비웃음에

쪼그라드는 건 어쩔 수 없어

 

둘러치고 엎치고

짧은 말로 흥정하는 것도 척척, 심장이 쿵쾅거려

 

그냥 가던 길이나 가는 게 좋아

화초나 옮겨 심고

바닥 청소하고 밥 짓는 것도

 

나는 손만 커지고

광대는 입만 벌어지고

 

나보다 앞서 입이 튀어 나가면 까르르 지갑을 여는 손들,

나는 가만히 뒤에 숨어 웃기만 하면 돼 리뷰 리뷰,

도돌이표에 어지럼증이 걸릴 것 같아

 

공중에 매달린 틸란이 가쁜 숨을 쉬고

호름밴세가 퍼즐을 달그락거리면 베고니아 다초점 렌즈가 흔들려

 

노래진 하늘, 터벅터벅 광대의 말이 걸어오는 소리, 오늘의 리뷰는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어

 

파김치 된 오후가 씩씩거리고

광대는 내 어깨에 걸터앉아 잠들었어

 

우울이 전등갓에 매달려 틱톡 틱톡

 

누군가

나의 하루를 마감하고 있어

 

 


 

 

김민채 시인 / 발랑리를 달리고 있어요

 

 

 그는 내 눈 속에서 자신을 보려고

 

 가끔,

 나를 한 입 베어 물고 나이 먹은 게 아직도 덜 여물었다 핀잔을 주기도 해요 저녁나절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요 그는 광명에 있고 나는 파주 발랑리를 달리고 있어요 팔랑팔랑 치마를 펄럭이며 분홍으로 물들고 싶은 날, 날마다 분홍이고 싶었지만 붉거나 노랑으로 미끄러져 보라로 끝나기 일쑤죠

 

 한때,

 그의 눈에 갇히고 싶어 안달했지만, 갇히면 견딜 수 없는 파랑새였어요 난,익숙해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예요 그의 호흡이 발랑리까지 달려오는 것처럼요 내 입이 완곡어법을 택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면서 쉽게 물러서지 않네요 그걸 뚝심이라고 말하지 말아요

 

 이젠,

 그에게 난 여자가 아니에요 그는 늘 내 밖에서 나를 찾아요 광명에는 가지 않을 거예요 나는 이미 나를 벗어났거든요 대리의 시간을 기꺼이 져 주던 우리의 분홍은 어디로 갔을까요

 

 지금,

 발랑리를 시식 중입니다 무슨 맛일까 닥치는 대로 달려드는 내가 너무 신나요

 

 


 

김민채 시인

1967년 전북 고창 출생. 2008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빗변에 서다』 『노랑으로 미끄러져 보라』. 제18회 푸른시학상 수상. 2022년 인천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