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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영란 시인 / 언어의 양성평등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30.
김영란 시인 / 언어의 양성평등

김영란 시인 / 언어의 양성평등

 

 

기울어진 운동장에 질문들이 쏠린다

 

효자상품 있어도 효녀상품은 왜 없는가

바지사장은 있는데 치마사장 못 찾겠네

자궁은 남자 아기 집, 그럼 여자 아기 집은 어디

아이를 못 낳는 것도 안 낳는 것도 여자들 탓

저 출생을 저출산이라 굳이 말해야 하나

여교사 여의사 등은 여씨들의 종친회인가?

여중 여고 있어도 남중 남고는 왜없지?

 

아직도 멀고 먼 세상, 평등하게 가는 길

 

《세모와 네모가 만나》 제주시조시인협회, 2022

 

 


 

 

김영란 시인 / 게메마심*

 

 

섬에선 나무들도 바람의 눈치를 본다

 

머리채 잡혀 끌려가던 북촌마을 머귀나무도

 

"예"인지 "아니오"인지 끝내 답을 못 했나

 

직립을 포기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거 봐

 

무자년 섬사람들의 생존의 그 화법처럼

 

쉽사리 꺼내지 못한 채 맴돌고만 있었지

 

* '글쎄요'의 제주말

 

-시집 《연못과 오리와 연꽃》에서

 

 


 

 

김영란 시인 / 서른일곱의 낯선 이름

 

 

 너에게 가는 길엔 암호가 걸려있어

 

 내 이름은 써니 선희 순희라고 했던가 널 찾아 헤매다보면 내가 자꾸 무너져 나라고 믿었던 난 어디서 왔는지 눈 작고 키 작은 난 어디서 왔는지 갓 눈뜬 4개월생 서쪽으로 보내놓고 별처럼 떴다 지는 비밀번호 신복순, 그 이름 하나 믿고 찾아온 대한민국 신복순 내 엄마, 서른일곱의 낯선 엄마

 

 한 번은 불러봤을까 먼 시간 속 그 이름

 

-《좋은시조》 2021.여름호

 

 


 

 

김영란 시인 / 나무의 시

 

 

생각대로 산다는 건

쉽지만은 않았어요

 

머리와 가슴이

엇갈린 그 길 위로

 

바람이

기척할 때마다

 

휘청이는

당신과 나

 

-『연못과 오리와 연꽃』  고요아침, 2023

 

 


 

 

김영란 시인 / 슬픈 자화상

― 나혜석을 다시 읽으며

 

 

꽃이 피었다 한들

그대 위해 핀 건 아냐

금지된 소망 앞에

슬픈 꽃말 피어난다고

세상에 맞춰 살라는

그런 말 하지 마

수없이 피고 지는

삶이 곧 사람인 걸

덧칠해도 더 불안한

세월은 마냥 붉고

한 시대 행간을 건너는

여자가 거기 있네

 

-『누군가 나를 열고 들여다 볼 것 같은』, 시인동네, 2020.

 

 


 

 

김영란 시인 / 두가시*

 

 

삼십 년 살았어도

모르는 게 더 많아

 

기 싸움 줄다리기도

승패가 나질 않아

 

후생엔 만나지 말자

용케 그 뜻 일치하네

 

제주해협 건널 무렵

멀미가 심했는지

 

가시버시 오던 길에

버시만 떼어놓고

 

아득히 멀고도 가까운

두가시만 남았네

 

*부부의 제주어

 

-《시와문화》2023. 가을호

 

 


 

 

김영란 시인 / 동백 졌다 하지 마라

 

 

탄압이면 항쟁이다

 

마지막 저항 같은,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운명의 뿌리 같은,

 

핏줄이 핏줄에게 보낸

 

무언의 당부 같은,

 

-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2, 7월호

 

 


 

김영란 시인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