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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화 시인 / 세숫대야만한 웅덩이
저렇게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저렇게 몸이 가벼울 수 있다니 하늘, 구름, 나무, 돌, 건물, 사람, 자전거 육교를 들여놓고도 또 기웃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다
지나가던 소나기가 파놓고 간 공사장의 세숫대야만한 웅덩이 얼마나 많은 살림들이 있나 싶어 얼굴을 살짝 들이밀면 양푼만한 내 얼굴만 달랑 들여놓는 웅덩이
정유화 시인 / 반석의 샘물
나를 미워하며 떠난 사람들 때문에 자주 갈증이 났다. 그래서 날마다 마음에 샘물을 팠다.
얕게팠는지 해가 뜰 때에는 금방 말랐고 비가 올 때에는 모래와 함께 무너지기도 하였다.
피던 꽃들이 와서는 "피” 하고 비웃고 가고 지나던 새들이 “짹" 하고 비웃고 가고 안면 있는 얼굴들이 "쳇" 하며 스쳐가도
선한 생각으로 샘을 팠다.
쓴 물이 나서, 메웠다가 다시 팔 때에는 미워하며 샘을 팠다.
일생을 다하여도 파지 못할 것 같아 가슴을 텅텅 치며 하늘을 우러러볼 때 가슴속 어딘가에서도 텅텅 소리가 따라 나왔다.
궁금해서 몇 날을 굶어가며 파고 또 파들어가다가 어둠 속 바닥에 깔려 있는 반석을 발견했다.
미움의 세월이 몰래 만들어낸 저 단단한 반석 깨뜨려야만 버릴 수 있는 저 무거운 바윗덩어리 나는 핏대를 세우며 망치로 반석을 쳤다.
“땅~” “땅~” “땅~" 하는 순간,
오! 깨진 틈에서 터져 나오는 이 물, 이 샘물 오! 미움이 깨질 때에 나오는 이 생명의 물
꽃과새와 해와 달과 얼굴들 깨진 그릇처럼 떠난 이들을 날마다 불러 모으리라.
반석의 샘을 지닌 이몸
정유화 시인 / 껍데기의 사랑
나는 알맹이를 사랑하는 껍데기가 좋다. 품속의 어린 눈빛들이 소란을 떨며 빛을 그리는 순간에도
소나기와 함께 서서 하루 종일 젖은 얼굴로 웃고 난세의 햇빛 몰려와 등허리까지 타고 놀 때
얘들아 다 왔다 가을의 종착역이어야 하며 손 툭툭 털고 일어서는 껍데기들
이제 내게로 와서 일생을 껍데기로 살자고 한다. 삐걱거리는 걱정의 창문을 기쁨의 창문으로 갈아 끼우며
가난한 영혼까지 감싸는 빛의 껍데기가 어떠냐고 묻는다.
-월간 『시인동네』 (2017. 6월호)
정유화 시인 / 번역의 즐거움
왕잠자리가 공터 울타리에 앉아 지구본만한 눈을 이리저리 가볍게 돌리고 있다 나는 그 눈의 의미를 번역하기 위해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잠자리 역시 나를 번역하기 위해 요리조리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 같은 침묵
가슴이 설레네
처음 만난 그대를 여관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그 마음을 번역하려고 애를 썼던 것처럼
정유화 시인 / 공터에 노는 햇살과 함께
공터의 유일한 식량은 여유이다 뜨듯한 시래깃국 먹고 나온 겨울 햇살 아침부터 모래알을 간지럼 태우고 모래 등을 올라타거나 귀를 잡아당겨 발 굴러도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기더니 다시 잠을 청하는 모래밭, 늦잠의 모래밭 하얀 서리를 포근한 이불로 삼아 늦잠 자며 잠꼬대 하는 모래알 그 모래알 사이로 끼어들어 늦잠 한번 자 보고 싶어라 늦잠의 여유 아니면 여유를 취미 생활로 하고 있는 저 햇살과 함께 하루 종일 놀고 싶어라 햇살아, 내 귀를 잡아당겨 줬으면 좋겠다 나를 간지럼 태워줬으면 좋겠다 나도 시래깃국 먹고 여유 있으면 너의 귀를 잡고 둥둥 발 구르며 소풍갈 수도 있어 나는, 햇살과 마음으로 함께 놀다가 다 함께 놀아보지 못한 나머지 햇살을 두 손으로 거둬 와서 겨울 감옥에 갇힌 뱀 눈에도 뿌려 주고 어머니 무덤가에 홀로 선 백일홍 꽃나무에도 뿌려 줘야지.
정유화 시인 / 이슬
정유화영명한 몸으로 빛난다 풀잎에 닿으면 풀잎의 눈 풀잎이 영명하게 빛난다 이슬의 문을 열고 들어가 눈 한번 깜박여 보고 싶어라
정유화 시인 / 복사꽃 피는 숨결 사이로
복사꽃 피는 숨결이 내 배꼽에 와 닿는지 느닷없이 몸이 부풀어오른다 느닷없이 입덧하며 흘러가는 시냇물 난산하는 바위돌의 신음소리 바람으로 듣다가 느닷없이 떠오르는 얼굴 사촌 누이 같기도 하고 술도가의 딸 같기도 한데 구멍 속에서 눈뜨고 나오는 뱀의 노란 눈 복사꽃 피는 숨결 사이로 언뜻언뜻 배고픔처럼 떠오르는 얼굴 봄날의 식량은 없어도 좋을 듯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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