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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금기웅 시인 / 허기의 기억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
금기웅 시인 / 허기의 기억

금기웅 시인 / 허기의 기억

 

 

휠체어 탄 중증 여자 장애여인이

도서관 한쪽에 붙박이처럼 붙어 있다가

지나가는 아이를 손짓으로 부른다

허리춤에 끼워두었던 식빵 봉지를 꺼내

말라붙은 잔디밭에 모여 있는 새들에게

잘게 잘라주라고 두 팔로 온몸을 더듬거리며 부탁한다

잘라주지 않으면 힘센 놈이 모두 독차지 한다고

약한 놈들에게는 한 입도 내주지 않는다고

 

새들은 아까부터 떨며 모여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가 매일 정오쯤 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허기의 기억이 몸에 저장되어 월세입주자처럼 그 땅에 머물며  

언 바닥을 쪼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여서 한 목소리로 울며 수없이 머리 조아렸던 것이다

 

세상은 늘 혼자 있는 것들은 따돌리는 습성이 있지

모여서 한 목소리로 울며 요구하지 않으면

무시해 버리는 인심처럼

저들도 그렇게 등 떠밀려 온 거였지

 

그녀의 밥 차는

새들의 배고픈 기억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밤마다 주인의 가슴을 향해 달려들기 때문에

매일 헉헉거리며 식은 땀 흘리며 얼어붙은 이 언덕까지

그녀가 잘 올라오도록 길을 내는 것이지

 

 


 

 

금기웅 시인 / 물

 

 

하반신이 뻐근해지도록 강을 걷다보면

몸은 물을 실컷 들이켜고 길 위에 뜨게 된다

아침이슬들도 껍질 벗은 작은 들콩처럼

아직 초록빛 남아 잇는 풀들만을 골라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그러나 이미 물기 다 말라버린 억새들은 아무리 뜯어말려도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낯선 사람들을 향해

허연 머리털을 미친 듯 뽑아 내던지고 있다

바싹 마른 산으로 떠난다는 너의 떨리는 목소리는

수면 위로 머리 내밀고 힘껏 물 뿜어내는

저 입 큰 붕어의 몸놀림과 어쩌면 그리 닮았는가

오늘 너의 다짐들은 또 물기 말라 단단해진 네 속을 빠져나와

저무는 이 세계를 온통 휘저어놓고 있다

 

 


 

 

금기웅 시인 / 공중에 달린 목숨들 2

- 능소화

 

 

나무 아래쪽에서 보름 내내 입 다물고 있던 그가

무슨 이유로 저 높은 곳까지 기어올라

제 몸을 온통 긁히며 아픈 수행을 하려는가

 

오늘도 기다리던 전갈은오지 않는다

소식 대신 저 담홍색 꽃들이 가슴속 뚫고 나와

길고 긴 여행길을 알려주려 하는가

어제까지도 분명히 나무 중간쯤 머물러 있던 그가

오늘은 우듬지에서 몸뚱어리를 모두 열고 있다

활활 태우고 있다

기다림은 쉽게 멈춰지지 않는 법

우리가 상처받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저 꽃의 몸부림처럼

쉬운 해법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다

어둡고 힘든 길을 밤새 기어오를 때

말없이 등판을 내주었던 소나무는

혹시 그가 바늘에 찔려 떨어지지 않을까

한밤 내내 한쪽으로 비켜서서 기다렸을 것이다

 

 


 

 

금기웅 시인 / 얼음공원 1

 

 

그곳은 지금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

바람에 잘린 갈대들 사이사이에서

서로 온몸 껴안고 가쁜 숨 쉬고 있다

그 뜨거웠던 긴 시간들을 잠시 묶어놓은 채

갈수록 견고히 자리잡는 그 공원은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두터운 셔터들을 내리고 있다

한때 즐거웠던 일들을 마음껏 품어보기도 했겠으나

지금은 입구를 완고히 닫아걸고

폐품이 된 생각들을 문 밖으로 봉투째 내다놓고 있다

내 슬픈 기억들도 그의 내부에서 받아준다면

한쪽 구석이라도 좋으니 그곳에 보관하고 싶다

가슴속 한동안 담아두었던 희망들

내 쓸쓸한 눈물 방울방울들이 저 혼자 흘러내리지 않게

은밀한 내부 속 깊이 받아주었으면 싶다

짓밟혀 문드러지더라도

절대로 깨지지 않도록 꼭꼭 저장해두고 싶다

 

 


 

 

금기웅 시인 / 흔들린다 누군가

 

 

흔들린다 누군가 높은 다리 밑 난간에

위태롭게 걸어둔 외투

바람이 불자 잠시 멈추고

가늘게 떤다 외투의 두 팔

흔들린다

입김으로 뿌옇게 덮여진 안경 너머로

다시 두 발 쭉 뻗는다

 

요란한 자동자 경적음 들으며

젖은 생애 드러난다

 

결코 다시 돌아 갈 수 없는 땅

이쪽 돌아보며 손 흔들고 있다

 

- 시집 <끝없는 생각들>에서

 

 


 

 

금기웅 시인 / 이유

 

 

낫선 바닷가 벼랑 끝에 자리잡고 섰는

벽에 하이얀 옷을 입힌 것같은 이태리풍 식당에 앉아 있었다

피아니스트가 온 몸을 짜내어 두드리는 음표들은

샹드리에로 휘감은 천정과 대리석 바닥으로 낮게 깔리고 있었다

오밀조밀 모여앉아 서로 깔깔대며

진한 초코릿 시럽 같은 저녁을 마시고 있는

노랑머리들 사이를 헤집고

그녀는 색색의 털실들을 기일게 짜내다가

어느순간 재빨리 풀어내어

황홀하게 입 벌리고 있는 사람들의 목에 하나씩 걸어주고 있었다

와인그라스 잔들을 서로 부딪치며

큰소리로 노래하며

가슴 붉어진 사람들 틈에서

생각은 가라앉지 않은 채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저녁 무렵 낡은 고향집 사립문을 열고 들어가

어둑한 부엌 아궁이 안에 던져져

제 몸 활활 태워지는 가을 삭정이 가지들처럼

흔적하나 남가지 않고 그들 틈에 끼어들어 벌겋게 타오르고 싶어졌다

들녘 농가지붕 위를 천천히 기어오르는

저녁밥 짖는 연기같이 흔적도 없이 태워져

아득하게 공중으로 내던져지고 싶었다

혼자 마시는 알콜로는 쉽게 뜨거워지지 않는 것처럼

빨리 연소되지 않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곳 알 수 없는 공간 속까지

떠밀리듯 들어왔으나 어울리지 못하고

걷돌고 있는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계간 『문학·선』 2010년 여름호 발표

 

 


 

 

금기웅 시인 /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

 

 

 뉴타운 소문을 태우고 마을버스가 들어왔다

 미숫가루처럼 흙먼지만 내려놓고 폐교를 한 바퀴 돌더니

 제비처럼 고샅길을 빠져나갔다

 

 언젠가부터 절개지 묵정밭엔 어린 의혹들이 심겨지기 시작했다 깨진 항아리 속에 갇혀있던 뻐꾸기 소리에 둔덕 까마중 몇, 복부인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귀고리를 흔든다 전과자인양 담장 안을 기웃거리던 햇살, 굴다리 밑으로 잠입하고 배 밭으로 달려간 그림자 하나가 이른 아침부터 풍선 불 듯 바람의 평수를 후후- 부풀린다

 

 두부장수 확성기에 귀를 열던 도토리들 일제히 상수리나무를 버린다 선거벽보 어지럽게 붙어있는 축대 아래, 사방치기 놀이를 하던 아이들 오후가 오랜만에 찾아온 밀짚모자 주위로 몰려든다

 

 뻥튀기 소리에 놀란 해바라기, 발밑에 검은 태양들을 투투둑- 파종하고 늦게 외출한 채송화는 발뒤꿈치를 높이 꺼내 분꽃의 망설임을 흔든다 태양이 시작되면 빨간 인주통이 열렸다 몇 평 봄이 처분되는 계약서 그 끝, 마을경로당에선 코스모스와 금잔화가 형광빛 포스트잇처럼 끝도 없이 유예되고 있었다

 

 이장 집 옆 모과나무가 늙은 귀띔이라도 들은 걸까 오래된 우물 속에다 노란 주먹을 툭툭 박았다 내가 헐값에 처분했던 그 시절 변두리 네온사인과 외딴집에 세를 든 귀뚜라미의 지하 방엔 오래도록 해가 들지 않았다 지난밤 거처를 잃은 두견새와 갑작스레 약수터에서 쫓겨난 달빛은 창문 틈에 허리가 끼어 아침까지 웅웅거렸다

 

 누가 분실한 것일까

 공사 중인 안테나처럼 힘껏 꼬리를 세운 고양이 한 마리

 방금 눌러 찍은 붉은 태양이 채 마르지도 않은 부동산 계약서를 입에 물고서

 인적 드문 논밭을 검은 천 조각처럼 가로질러 어디론가 재빨리 구겨지고 있다

 

 


 

금기웅 시인

충북 옥천 출생. 동국대 문예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고려대 언론대학원. 200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자신없는 것들은 걸려 있다> <끝없는 생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