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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홍순 시인 / 어머니의 상사喪事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3.
정홍순 시인 / 어머니의 상사喪事

정홍순 시인 / 어머니의 상사喪事

 

 

어머니 그 이름에는 그리움으로 성글게 한 뼈들의 아파함이 들었다

어머니 이름 속에서 뼈가 자라며 새겨진

까마득한 우리들 생의 부호가 있었던 것

고여 있는 나이테처럼

내가 알기 전 사람 또한 그 속에 고이 잠드는 것이 있었다

 

-시집 <뿔 없는 그림자의 슬픔>에서

 

 


 

 

정홍순 시인 / 쌀바람

 

 

처서가 지나고

아흔두 살의 집에 바람이 왔다

갯고랑 하얗게 꼬리치며

쌀바람이 왔다

간사지 벼꽃 뿌리며

무른 눈썹 헤치고 바람이 왔다

살아서 왔다

고맙게 왔다

징검돌 뒤집으며 가을비 타고

노두길이 왔다

족두리꽃 차일 치는 마당

찰랑찰랑 흔들며 벼슬이 왔다

 

 


 

 

정홍순 시인 / 중마동에서 동주를 생각하다

 

 

제 몸 밀어야 간다

뿌리쳐야 갈 수 있다

널 두고는 강이 깊을 수 없고

저 산이 높을 수 없다

달 싣고 돌아오던 밤배 득실거리던

여기는 광양항

복판 달리는 말처럼 서서

뱃고동 울리는 중마동(中馬洞)이다

북간도, 평양, 연희전문학교, 후쿠오카

종말의 닻 부리고

밧줄로 묶어놓은 시

곰삭는 바람이

비리다

매화마을에 꽃은 가득하고

올해도 순질한 너의 시 다 읽을 수 없다

 

 


 

 

정홍순 시인 / 카타콤

 

 

 겨울 상주처럼 물집 서린 발바닥 집어넣었다 생의 조각들 조심히 디뎌가며 이생의 안부 전했다 더듬더듬 흙 속에 필사한 몸들의 방식 읽고 방종한 내 삶을 반성했다 종잇장같이 젖어 누운 첩첩 둘러 밀봉한 그들의 더 깊은 자리로 들어갔다 푸른 얼굴로 천년을 거슬러야 닿을까 또 하나의 지실(地室)에 머물러 섰다 하늘이 꽤 멀어졌다 내실의 끝 뼈의 벽 칸칸이 넘어 헤치고 격자로 새길 비문(碑文) 한 줄 몰래 도굴하였다

저승의 글 물고 날아가는 저 하늘에 머리터럭 한 올 묶어 휘갈겨 몇 자 쓰고 죽어야겠다

 

​-시집 <향단이 생각>에서

 

 


 

 

정홍순 시인 / 하나님 뜻이라니요

 

 

난 항상 구름에 모가지 길게 빼고 서서

멀리 산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허리 구부리고 가까이 보아도

질문은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저 돼지들은 언제 조각조각 해체되는지

합격도장 받은 껍데기

반 근에 반 근도 얻을 수 있는지

입술의 재난에 우리는 덮어집니다

한때는 내 탓이오

딱따구리처럼 용서 살렸는데

뻐꾸기 울어 적시는 산(山)에

새 신탁이 내렸습니까

하나님 뜻이라니요

원망 돌리며 합리주의 팔아먹는 역사는

운명의 도살장으로 내모는 민주의의는

절망하게 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아이티 선지자의 소명 언제였습니까

변신로봇 같은 망할 놈의 입술

언제 봉헌했습니까

발바닥에 붙어 하는 말

뒤통수에 붙어 하는 말

똥구멍에 끼어 하는 말

하나님 뜻이라니요

귀신 다 풀어

자잘한 나부랭이들은 걷어치우고

허방 모가지

오랏줄 걸 만한 놈 없습니까

악어 낚을 수 있겠느냐고요

우리는 용서하는 욥이 아닐는지요

허면 피의 밭에 뉘 주둥아리 묻어야겠습니까

 

-시집 <국화는 뜨겁다>에서

 

 


 

 

정홍순 시인 / 프라하의 밤

 

 

사월, 비 내리는 프라하

돌사과꽃 가만가만 밤 받쳐 들었다

가로등 헤치고

수런수런 피고 있는 마로니에

눈부시지 마라

조등처럼 밝히지도 마라

라일락 언덕에 강바람이 차다

말발굽 소리, 늦은 저녁 꽃 몰아

수작 걸어본들

쳐다보지도 않는 냉이꽃

민들레꽃

우리들 천박한 얼굴로 슬프겠느냐

조선의 역사에

변주할 수 없는 드보르작의 선율이

아리랑, 아리랑 울 수 있느냐

전쟁 없는 역사는 역사도 아니다

상처 받아보지 않은 모든 것은

봄이 가기 전 떠났다

칭칭 감아 피는 등꽃 프라하

우리에게도 봄이 있다

밤새 출렁이는 프라하

업어치기 한판 걸어 내일은

꽃으로 주저앉히고 말없이 빛나는

역사 앞으로 떠나야겠다

 


 

 

정홍순 시인 / 도장을 팠다

 

 

 충장로 도청 앞에서 인장 명인에게, 한 자에 만오천 원씩 주고 도장을 팠다 한 달 식권 값도 더 되는 삯, 선뜻 퍼주고 도장을 팠다 탄피만 한 상아, 한글로 새겨야 깨지지 않는다고, 떨면서 파던 명인의 손끝이, 광주를 더 슬프게 하였다 팔십칠년, 망월동에는 새 무덤이 늘어났다 비석에 그 이름 새겨지는 동안, 나는 인감도장을 팠다 혁명의 유월, 도장나무 까만 열매같이 가슴마다 검정 리본 달고, 독재 목 놓아 파내고 있는 동안, 나는 상아도장을 새겼다 붉은 피 묻혀 찍지도 못할 뼈다귀, 나도 낯선 내 이름을 팠다 코끼리처럼 죽은 유월의 아들, 도장밥에 대가리 박을 때마다, 꽃보다 더, 그 이름 붉게 떠오르는 도장을 팠다

 


 

정홍순 시인

1964년 충남 태안 출생.  2011년 《시와사람》으로 등단. 시집 『뿔 없는 그림자의 슬픔』 『물소리를 밟다』 『갈대는 바다를 품고 산다』 『바람은 갯벌에 눕지 않는다』 『향단이 생각』. 〈화순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