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우진 시인 / 지구가 멈춘 순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4.
정우진 시인 / 지구가 멈춘 순간

정우진 시인 / 지구가 멈춘 순간

 

이 세계의 모든 것

지나는 사람들의 들숨과 날숨

놀이터를 채우던 웃음

바람이 구름을 스윽 쓸거나

자전과 공전이 만드는 백색소음같은 것들이

잠깐 멈추는 그런 때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정말 사랑받던 사람이 사라진 순간

지하철이나 신호등 같은 데서 지나친

나라는 전체의 일부가 된 사람의 숨이 사라져

잠시,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흐름들이

내가 수정되기 직전의 그때로 돌아간

묵념의 시간

 

사라진 이가

어제 보았던 작은 고양이

신호를 기다릴 때 보았던

가지가 다 잘린 플라타너스

한참 보지 않았던

어떤 시인이 아니기를

내 소중한 사람들을 돌이켜보기도 하고

어딘가 전화를 하기도 하는

지구 위의 그늘이 잠시 투명해지는 순간

​​

-월간 『모던포엠』 2025년 6월호 발표

 

 


 

 

정우진 시인 / 새들의 I.C.

 

잠긴 창은 적막하고

방음벽엔 가루가 된 비명이 덕지덕지

 

서로는 늘 바쁘고

또 서로 알고

또 모른 척하고

그게 또 맞는 거고

 

나는 가야 하고

너도 그렇고

 

아무것도 못 가는 것 같지만

가로수 잎은 쉼 없이 흔들리고

조바심과 눈치가

한 바퀴 한 바퀴 굴리고

 

아무도 동정하지 않고

아무도 욕도 하지 않고

그럴 겨를이 없고

바로 또 겨를이 없고

 

어제의 길은 어제치를 보내고

오늘의 길은 오늘치를 보내고

 

여기 길과 저기 길은 모두 이름이 다른 길이고

다른 이름인데 같은 길이고

 

나는 길처럼 흐르고

 

길에는 주인이 있고

땅에도 주인이 있고

 

발이 없는 나는

종일 앉지 못하고

 

하루에 마침은 불시착같고

내일 다닐 일을 걱정하고

 

감은 눈은 적막하고

창에는 별들의 비명이 덕지덕지

 

-계간 『상상인』 겨울호 발표

 

 


 

 

정우진 시인 / 내가 지은 내 이름

행방불명이 되고 싶었다

내가 지었다면 내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검은 잠바를 벗고

괜히 소중하던 흰 이어폰을 빼고

듬성듬성 가로수가 잘린 조각난 길을 지나

아무도 날 아는 이 없는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여기까지 왔다

앤디 듀프레인처럼 가루가 된 마음을 바람에 흘렸다

내일 아침엔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을 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테다

대답할 일도 없을 테다

갈 곳이 없을 테다

이유가 없을 테다

이름이 있을 이유가 없을 테다

이름을 알 이유가 없어질 테다

빈 곳으로 통하는 바람

투명하게 날 불렀던 네 목소리를 닮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노을처럼 무해한 죽음이 지닌 자연스러움을 가리키며 주고 받던 눈빛

날 똑같이 보던 너

내 슬픔은 좀 전까지라는

사는 유해함을 덜어내고 나뭇가지 사이같이 웃던 너

한 번씩 떠나는 것은 괜찮았다

다만 늦지 않게 가야 했다

내 이름을 다시 짓는다면 너의 이름으로 하겠다

-계간 『열린시학』 2025년 봄호 발표

 

 


 

정우진 시인

1979년 서울에서 출생 가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13년 「기형도 시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2016년 〈흙과 뿌리의 교우록〉외 2편으로 《서정시학》 신인상 수상. 현재 〈미래서정〉 동인, 계간 『서정시학』 편집 교정. 현 가천대학교 강사. 시집 『지구가 멈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