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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민 시인 / 눈 없는 얼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6.
안민 시인 / 눈 없는 얼굴

안민 시인 / 눈 없는 얼굴

 

 

정말 다행입니다 눈이 없어서

 

기억 아득한 곳에 머물 그대는 목마를 낳고

고양이를 낳고 드디어 나를 낳았지요

 

계절은 묵시록처럼 불안했고

실낙원이 그러했듯 그대의 손가락은

슬픔을 판각하다 그 옆에서 순교했습니다

 

삼위일체처럼 그대는 새의 날개일 수도

오래전의 내 호흡일 수도 후생의 어떤 저녁일 수도 있겠군요

혹,사마리아 여인을 낳지는 않았나요

 

그대의 피가 흐르는 나의 몸도

사람의 남자를 사랑하였습니다

사람의 남자를 사랑한 죄로 눈은 금지 되었습니다

 

닿을 수 없는 창가에서 모르는 눈이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입니다 그대를 볼 수 없기에

다행입니다 눈이 판각되지 않아서

고양이와 목마의 그림자가 무겁게

가라앉는 밤,

몸속에 천 개의 물방울이 맺힙니다

 

지은 죄는 잘 보존될 것입니다

우울한 무늬 결로 혹은 고갱이로

 

내 심장 근처엔 깨어진 유리조각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랑해서

 

통각 잃은 얼굴이 자꾸만 시립니다

 

*눈 없는 얼굴<이별>부분/피나무/ H 40cm / 2008홍경님

 

 


 

 

안민 시인 / 묵찌빠

 

 

전면전을 선포했다 아름다운 네가 돌아오면서 무엇도 하지 않을 권리를 외치며 무엇도 할 수 있는 권리를 외치며

 

피할 수 없는 전쟁,

공격이 개시되었다 어떤 연민도 없이

 

갈등도 딜레마도 없는 너

갈등도 딜레마도 많은 너

 

그렇다고 너는 애초에 번역될 문장이 아니었다 어떤 문장이든 지문이 흘러나왔다 나는 포위되었다.

 

유리는 깨어지기 위해 만들어지고

손은 무너지기 위해 태어난다

 

백동전은 딱 하나

너는 오빠들의 백동전을 훔쳐 피아노를 장만했다

 

피아노 위를

횡단했던 건 손가락이 아니라

주먹이었다

주먹이었다.

 

쾅─쾅─쾅─

소리에 놀란 너

음률이 악보 뒤편으로 넘아가듯 너는 사춘기로

사춘기의 문양으로 그 성격으로

여기에 왔다

 

*

 

네가 묻는다

산산이 부서진다는 게 뭐죠?

 

웃자란 네 애인들이 대답한다

피아노의 손을 찾아봐

나무의 손금을 찾아봐

귀 잃은 악사의 손바닥을 들여다봐

 

닮았다는 건 곧 몰락

닮았다는 건 곧 침몰

 

늙은 네 오빠들이 도끼로 피아노를 내리찍는다

피아노의 내장들이 이빨을 들어내 놓고 웃는다

가위를 든 네가 또 묻는다

그럼 너희들의 어제는 뭐지

손목을 덜렁거리며 잘린 손목을 이어붙이며 네 애인들이 대답한다

손목 없는 바위지

몸을 버린 우직한 주먹.....손바닥을 펴라

손금이 깨어져 버려라

손금이 깨어져 버려라

 

*

 

전쟁에 속하지 않으려는 손들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있다 그사이 패배와 승리가 밀물과 썰물처럼 드나든다 또다시 저녁은 오고

 

긴 평화가 시작되고 있다 숨이 막힌다 전쟁은 전쟁이 끝난 뒤 시작되는 법 규칙대로 네 애인들이 죽는다 잎사귀 들도 차례대로 죽는다

 

죽은 네 애인들이 내 몸을 정탐한다 귀퉁이에서 패배의 눈물을 마신다 어둠의 보자기를 펼치면 그 사이로 가위 같은 비가 내린다

 

비는 누가 버린 눈물입니까?

 

*

 

간첩은 밖에도 안에도 거주한다

자주 갈등한다

자주 망설인다

 

그리움도 유통기한이 있습니까

 

가위바위보를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상이 다른 지대입니다

 

그럼 난 누가 버린 폐기물입니까

 

영혼을 꺼내 말려야 한다고 간첩이 자주 속삭인다 정말이지 세상은 네 손처럼 의아하고 다수이며 나는 한 번도 다수에 속하지 않았다

 

룰을 배운다는 건 자기를 지우는 여정이라며 네 애인들이 울먹거린다 화분 잎사귀에서도 안개가 흐르고

 

사람 속엔 길 잃은 손들이 그득하다

 

-월간 <현대시> 2018년 7월호, 신작특집 -

 

 


 

 

안민 시인 / 바람의 書

 

 

 나는 질주한다.

 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원래 숨을 헐떡인다. 느리게 걷지 않는 것은 보이는 전부가 다 저장되어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다. 나는 무엇도 낳지 않았고

 

 수억 년 전에서 왔다. 아버지가 나이고 내가 아들이다.

 

 연인이었고 음악이었고 애증이었다. 유령이었고 고독한 손결이었고 결국엔 성난 눈이었다.

 

 잎사귀가 죄다 추락한 나무, 쓰러진 채 깜박이는 가로등, 펄럭이다 흐느끼는 간판, 브레이커가 고장 난 사랑, 피의 혁명, 그 무엇도 나와는 무관하다. 나는 누구의 울음도 원하지 않았다. 단지 깨어져 버릴 관능을 동경했을 뿐

 

 그대는 내가 해석되지 않고 나도 내가 해석되지 않고

 단지 멈추지 않고 주행토록 왜곡되었을 뿐,

 그 무엇과도 공범은 아니다.

 물론 역주행은 있었겠지. 허공을 향해서도

 

 수천 개의 뼈가 덜거덕거린다. 스산한 신음을 뿌리며

 

 고백건대 어둠과 침묵의 덩어리인 내가 스스로 울음을 흘린 적은 없다. 진흙이 목구멍까지 밀치며 들어오곤 했다. 나무와 강물과 바다와 바위와 모래가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들이쳐

 

 나인 듯 울었다.

 

 국경과 국경을 지나면서 혹은 해변과 산정을 지나면서

 몸 안의 슬픔이 너무 많이 사냥당했다.

 

-시집 『몸 안의 슬픔이 너무 많이 사냥 당했다』에서

 

 


 

 

안민 시인 / 자화상

-마음에게

 

 

 그리하여 나는 나 대신 그대를 팔아 여기까지 왔고 그대는 유리 절벽 위에 놓여 있다 지나온 경계마다 은빛 눈이 내려 슬픔은 메우지 못했다 이제 벽 너머에선 어떤 음률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왜 허공에 발을 헛디디고 있었을까 햇살조차 깨어진 부도浮屠처럼 날카롭다

 

 그대의 동공 속에 불안한 속도를 견뎌낸 경계인이 보인다 그 동공의 무늬는 미로다

 

 여기까지 오면서 나는 그대에게 비겁하거나 용감했고 말이 많거나 적었고 무거우면서도 중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희망을 떠올리며 절망에서 허우적거렸다 얕게 분노하고 깊게 뒷걸음질 쳤다 얼굴을 외면한 어느 철학자처럼 이 모든 것은 계산된 연극이었던가 몸 위로 젖은 나뭇잎 겹겹이 쌓인다

 

 그대에게 늦은 안녕을 고한다 미안하다 나의 철창이여 허물어지는 육신을 지탱한 중심이여 이제부터 나를 외면하라 그러면 본 적 없는 표정이 그대에게 스며들 것이다 잘 있거라 어찌하지 못할 눈동자여 해빙점을 분실한 심장이여

 

이름도 없이 절벽으로 밀린 그대는

허구로 뭉쳐진 몸을 견뎌낸 비겁한 나의 나였다

 

 


 

 

안민 시인 / 눈동자에 새장이 맺히고부터

 

 

 천지가 감옥이다

 

 검은 비 내리고 기억 저편의 그림자 흘러온다 새 한 마리 갖지 못한 채 쓰러진 나목이 내 안을 향해 무겁게 걸어 들어온다 죽었는데 다 시 또 죽어야 하는 침묵의 소리

 

 심장을 수몰시키려 한다.

 어디라도 좋다 어디라도 그 어디가 여기가 아니라면

 

 까닭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청빛 새벽,

 새들이 버리고 간 악보가 흩어져 날린다

 

 영원한 잠이어야 한다.

 나로부터의 탈옥을 위해

 

  *

 

 등 뒤에서의 눈물도 새 떼가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지표면에선 새의 눈물을 볼 수 없다

 

 새의 눈물은 허공에서 수습되고 허구만 지상에 놓인다 허구에 흰 천이 덥혀 있는

 이곳은

 

 새장의 내부다

 

 


 

 

안민 시인 / 출가

-걸어서 인도까지

 

 

「굿판벌인 것처럼 집은 소란했고 회사는 혼미했음. 친구는 돈 떼먹고 줄행랑쳤고

애인은 나를 버리지 못하고 매일 위험했음. 사는 일이 팥죽 모양 끓어 넘쳤음.」

 

"길바닥에 몸을 내다 버렸다.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도 없이

인도를 향해 바닥을 저어가기로 했다. 애인과의 동행은 일찌감치 접었다.

사랑도 지긋지긋한 業일 테고 인도까지 가는 길은 숱한 人道가 인도해 줄 거로 믿었다.”

 

 

 버린 내 몸, 낮에는 무거운 태양을 밤에는 젖은 어둠을 지고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팽이보다 더 느리게 바닥을 저어가고 있다. 인도는 느리디느린 제국, 내 몸은 느럼을 오관으로 느끼며 아주 천천히 흐른다.

 

 베이징, 시안, 청두, 라싸, 카트만두를 거쳐 인도까지는 수만 키로

 

 지금쯤 아내는 바람난 들고양이 모양 싱싱해져 있으리라.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술병이랑 애인을 수집하고 있겠지. 아빠를 쓰레기로 취급한 딸매의 귀여운 입술이 떠오른다. 얘야, 곧 깨닫게 될 거다. 누구나 쓰레기더미를 뒤적이다 쓰레기가 되어 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을....

 

 회사에선 잠시 술렁대다 내 그림자조차 치워버렸으리라. 책상과 집기는 물론 기획실장 명패까지도 무참히 버려졌겠지, S라인 비서도 폐지처럼 버려졌을 거고 직원들은 밤마다 유쾌 발랄 파티를 벌였으리라, 구조조정 시퍼런 칼날을 휘둘렀던 저승사자였으니......

 

 시인 나부랭이였다는 흔적도 죄다 버려졌을 거다. 개나 소나 다 시인인 세상에 개 한 마리 어찌 된들 뭔 상관이겠는가!

 

 어머니, 지금은 허공이 비를 버리는 지대입니다. 언젠가는 허공이 눈을 펑펑 버려대는 파밀 고원에도 닿겠지요. 울화병은 아직도 어머니를 버리지 못했나요? 「막되어 먹은 놈! 천하에 불효막심한 놈!」 어머니 음성이 쇠꼬챙이처럼 몸을 찌릅니다. 하지만 저는 눈물까지 이미 다 내다 버렸습니다. 저는 원래가 엉망으로 생겨먹은 놈이잖아요.

 

 버린 몸들의 낙원, 인도는 아직도 아득히 멀다. 이렇게 굼벵이처럼 느리다 보면 우주도 버려지고 지워지리라. 나는 오늘도 바닥을 저으며 천천히 흘러간다. 이왕 버린 몸, 재가 되어서도 절대 돌아가지 않으려...

 

 


 

 

안민 시인 / 파절되는 건반

 

 

정확한 애증을 위해 경전을 읽는 대신 잠든 건반을 뽑아내야 한다

펜치를 품은 이가 보인다 동굴을 향해 누군가 고함을 쳤고 건반은

사력을 다해 몸을 꽉 움켜잡는다 파절은 그런 구간에서 발생한다

 

 

 1

 오늘 치과에 다녀왔다고 일기장에 적었다면 그건 건반을 깨버렸다는 고백과 같은 거다 창밖에는 파절된 눈발이 날린다 예각으로 흩어지는 하얀 입자들, 피아노의 무릎을 끌어안고 우는 여자는 대체 불가한 음악이다

 

 2

 조율되지 못한 음률이 야음을 틈타 잡입한다 조율사는 발치를 포기하고 건반을 징으로 쪼고 있다 쾅-쾅-쾅- 당신의 연주는 거짓이었습니다 피아노의 심장이 추락한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녀는 치가 떨린다고 악보에 적는다 버림받은 이는 입을 헤벌리고 잠든다 여자의 날선 눈빛이 떠나간 이의 치근에 꽂히고

파절된 음률이 뿌옇게 달려간다 결빙된 길 위를

 

 3

 치근 속에서 펄펄 끓는 신경이 대뇌의 중심에 날카롭게 파고든다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오선지 위 음표들

 

 4

 또 다른 어금니를 발치하던 날 흰 가운이 펄럭였고 유리창 너머에선 뿌리가 뽑힌 치아처럼 허공이 노을의 붉은 혈을 머금고 있다

 

 5

 슬픔이 깊은 그녀는 조율사의 침묵을 수집한다 이 빠진 피아노를 버리지 못하기에 그녀는 송곳으로 작곡한다 주홍빛 음률을 껴안은 그녀에게 조율사가 말한다 그것은 고독도 한탄도 아니었습니다 건반은 이미 금이 깊어져 있었어요 조율사의 목이 음률에 감긴다 줄이 끊긴 신경이 치근 쪽으로 흐르고

 

 6

 피아노 소리를 쾅쾅 지르며 입술을 닫는다 근관이 경련을 일으키고 발치도 조율도 실패한다 음률 속을 떠다니는 기억은 파절되고

 

-월간 《현대시》 2023년 1월호에서-

 

 


 

안민 시인

경남 김해 출생. 본명: 안병호. 동국대학교 회계학과 졸업. 201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제18회 부산작가상을 수상. 2013년 제2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 당선. 부산작가회의 회원. 시집 『게헨나』 『아난타』 『몸 안의 슬픔이 너무 많이 사냥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