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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상미 시인 / 별이 빛나는 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6.
김상미 시인 / 별이 빛나는 밤

김상미 시인 / 별이 빛나는 밤

 

 

 종로2가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황지우 시선집을 이천구백원에 샀다. 횡재다. 아주 싼 커피값에 시에 눈뜨게 해준 정수, 여전히 이 시대의 불행과 비극의 골목길을 온몸으로 버티고 서 있는, 이 뛰어난 시집을 이천구백원에 사다니. 종로점을 나와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마음은 자꾸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좋아하는 애(愛)시인들은 모두 언제나 그리운 나그네들 같아 어느 날 문득, 다시 찾아오면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다. 온 밤이 별이 빛나는 밤으로 변한다. 수만 수천 사람들이 반짝반짝 눈을 뜨고 시를 밝히는, 별이 빛나는 밤!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문학동네, 2022.

 

 


 

 

김상미 시인 / 반성

 

 

깊이 깊이 후회해

너를 사랑했던 것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

너에게 내 시를 보여주었던 것

너랑 영화관에 갔던 것

너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사주었던 것

네 품에서 알몸이 되었던 것

아무렇게나 던져진 텅 빈 우주에 너를 초대했던 것

너와 함께 비엔나의 숲속에서 치즈버거를 먹었던 것

너에게 가장 친한 내 친구를 소개했던 것

너 때문에 비 내리는 센강에서 울었던 것

너 때문에 불같이 타오르는 꽃잎 하나가 내게로 떨어졌던 것

너의 모든 말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환하게 웃었던 것

네가 한 모든 약속을 모래로 가득채워 흘려버렸던 것

너를 떠나보내기 위해 나보코프를 읽으며 모나코 나비를 찾아 헤맸던 것

그러고도 네 꿈을 자주 꾸었던 것

그러고도 너와 함께 잘 먹던 꼬투리 완두콩을 아직도 좋아하는 것

그러고도 이런 시를 쓰고 있는 나

그 모든 것을 후회해

깊이 깊이 후회해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문학동네, 2022

 

 


 

 

김상미 시인 / 에릭 사티를 들으며

 

 

누군가가 그리울 때면

예쁜 찻잔에 김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을 부어

햇볕 잘 드는 창가에 놓고

햇빛 속에서 김이 무지개색으로 춤추는 걸 바라보아요

아주 천천히, 그러나 아주 뜨겁게

수많은 팔레트 앞에서 처연히 춤추는 수잔 발라동을 바라보며

에릭 사티도 그런 눈으로 <짐노페디>를 작곡했을 거예요

수잔 발라동을 향한 한결같은 마음

괴팍했지만 마음은 항상 따뜻했던 남자

그가 치는 피아노 건반엔 언제나 비가 내려

늘 우산을 지니고 다닌 남자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던 그의 옥탑방에 나란히 걸려 있던

그림 두 점

수잔 발라동이 그린 에릭 사티와

에릭 사티가 그린 수잔 발라동

언제나 똑같은 흰색 음식과 똑같은 검은 정장과 모자,

똑같은 손수건과 우산, 똑같은 사람만을 좋아했던 남자

한결같은 그 마음으로 작곡한

챙 없는 흰 모자 같은 그의 피아노곡이

햇빛 속에서 무지개색으로 춤추며 증발하는 걸 바라보며

오늘은, 오늘만은 나도 사무치게 그리운 누군가를 불러내

그를 듣고 또 들어요

이 멜로디 또한 간절히 내게 다가온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간절히 나를 떠나가겠지만

햇볕 잘 드는 창이 아직 내게 있는 한

언제든 그리운 사람은 늘 그리운 사람

햇빛만 비친다면 햇빛 속에서 하염없이 함께 춤추고 싶어요

아주 천천히 그러나 아주 뜨겁게

에릭 사티를 들으며

 

 


 

 

김상미 시인 / 비밀

 

 

 애인을 가슴에서 꺼내 벽에 걸어두니 참으로 조용하다.

벽에 걸린 벽의 침묵이 세속과 다른 냄새를 애인에게 발

산하여 애인은 지금 한창 침묵중이다.

 

 침묵이란 본래 심장 가까이 두는 물건이라 맛만 들이면

세상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깊은 맛을 발산한다.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침묵 속에 침전해 있던 애인이 어

느날 덜컹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불과 얼음의  우화 따위

는 저 멀리 던져버리고, 방안은 금세 격동으로 치닫는다.

 저마다 제 몸에서 흘러나온 침묵의 해류에 휘감겨 십자

가에 매달리듯 서로에게 매달리게 된다.

 

 마치 그 속에서  정화되어 다시 솟는  분출만이  달리는

기차를 멈추게 할 수 있다는 듯!

 

제4회 「박인환 문학상」수상작품집 '자선시'중에서

 

 


 

 

김상미 시인 / 그 집

 

 

언제나 그 집이 그립습니다

대청마루 한켠에서 들려오던 엄마의 다듬이질 소리와

혀를 끌끌 차시면서도 끝까지 신문을 읽어내리시던 아버지

토닥토닥 싸우면서도 동생과 함께 듣던 모차르트,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 김민기의 노래가

뭐든지 숨길 수 있고 그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타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던 집이,

집 안의 집,

우리 집이 그립습니다

 

그 집에서 나는 삶의 계율을 익혔습니다

동그랗게 깎인 사과의 심장을 맛보았습니다

불가사의한 가족의 현, 그 나긋나긋한 갈등들을 호흡했습니다

평탄하진 않았지만

사방으로 난 창문 밖으론 하늘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그대로 보였습니다

마당 한 모퉁이 깊은 우물 속 짙푸른 이끼 냄새가

벽돌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냄새만으로도 세월의 굴곡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지붕 아래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포클레인의 방문과 함께 시작된 생체해부 이후

그 집은 도로가 되어버렸습니다

크고 작은 차들로 흩뿌려진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족애는 존재하지만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추억이, 음악이, 환희의 정령들이, 짙푸른 숨소리가 한없이 배어 있던

벽돌들은 다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집의 내력 또한 거기에서 끝이 났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더이상 그 집은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세계는 집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집 안의 집, 우리 집은

형이상학 속으로 잠겨버렸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발굴되지 못한

황금의 사닥다리

그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건

햇빛뿐입니다

바람뿐입니다

기억뿐입니다

가까스로 타오르는 옛정뿐입니다

 

그 집이 그립습니다

그 집의 활기, 그 집의 유리창, 그 집의 우물, 그 집의 흙,

그 집의 채송화, 그 집의 가족들이

다 그립습니다

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워 잠을 설쳤다던 옛 켈트족처럼

내 삶에서 그 집이 무너져 내릴까 겁이 납니다

하여 나는 아직도 그 집에 빗장을 걸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집의 영화처럼 초목을 삼키고, 보도를 삼키고, 시간을 삼키고,

슬픔을 삼키고, 체취를 삼키고, 사람들의 뜨거운 한숨을 삼켜

어찔어찔한 옛 향기로

천천히 심연으로,

심연으로 기울어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집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 끝에 있었습니다

그 집이 그립습니다

눈물겹게 그립습니다

 

 


 

 

김상미 시인 / 엔젤피시

 

 

내 머리 속 수족관에 엔젤피시 한 마리 살고 있어요

엔젤피시는 내 소녀 때 이름

 

물결치는 분홍 줄무늬가 너무나 예뻐

어느 날 생물 선생님이 한입에 꿀꺽 삼켜버려

죽어버린 소녀

 

남몰래 울다 미술시간에 발견한 뭉크의 '사춘기'

엔젤피시를 닮은 너무나도 작고 창백한 소녀

나는 얼른 그 소녀를 내 머리 속 수족관에 넣어버렸지요

 

괜찮아,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이젠 내가 너를 지켜줄게

 

엔젤피시는 이제 내 머리 속 수족관에 살아요

분홍 줄무늬 지느러미를 팔랑, 팔랑거리며

이 세상에 없는 더 넓고 광활한 내 머리 속 꿈들을 먹고 살아요

 

가끔씩 내가 눈을 꼭 감고 입을 꼭 다무는 건

내 머리 속 엔젤피시의 부드러운 애무에

내 온몸이 너무나 나른해졌기 때문

아침이슬보다 더 영롱한 엔젤피시의 노래에

내 온 마음이 너무나 청명해졌기 때문

 

그러니 이제는 누구도 내 소녀를 삼키지 말아요

소녀는 소녀끼리 서로서로 아껴주며 어른이 되어야 해요

꿈꾸는 어른

 

설혹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죄가 된다 해도

힘차게 분홍 줄무늬 지느러미를 팔랑, 팔랑거리며

 

 


 

 

김상미 시인 / 내 안의 오필리아

 

 

운향꽃을 입에 물고 강으로 뛰어드는 오필리아

운향꽃은 임신중절용이라는데

 

태어나도 활짝 피지 못할 사랑을 품에 안고

내 안의 오필리아, 너는 어디로 가니?

 

죽어가는 두개골 속 꼬인 내장과 순진한 뼈 속에 존재하는 어둠

그 어둠 하나하나가 네가 두고 간 식탁 위에 꽂힌 로즈메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데

 

(이젠 제발 나를 잊어줘요

우린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어요

한번 잘못 낀 단추는 뒤바뀐 운명과 상관없이 다시 끼워야 해요

 

그러나 다시 낀 단추는 그만큼 이미 서로를 낭비한 시간

어느새 노을이 어둠을 부르는 시간

 

그러니 이제는 제발 나를 잊어줘요

밝고 온순했던 내 비둘기들을 모두 다 날려 보내줘요

 

세상에서 가장 서글픈 남자는

임신한 여자를 강물에 뛰어들게 하는 남자)

 

하루 종일 제 이야기로만 엮은 사랑의 화환을 짓이기며

오필리아, 너는 차디찬 회한보다 더 창백한 시간을

베어 넘어진 나무처럼 모두 강물에 띄워 보내네

 

무성한 소문에 입맞춤하고도 끼리끼리 모여 있는 이들에게

새하얀 목을 드러낸 채

그 부끄러운 핏빛 산고를 혼자 치르며

 

죽어서도 활짝 피지 못할 사랑을 품에 안고

아름다운 오필리아, 너는 어디로 가니?

 

(누가 그녀를 좀 말려줘요

내 안에서 울고 있는 오필리아

그녀에게 누가 내 삶을 좀 나눠줘요

 

그녀가 얼굴을 파묻은 강물에서 일어나

나와 함께 동쪽으로 동쪽으로 새로운 지비을 찾아갈 수 있도록

 

누가 그녀에게 내 삶을 좀 나눠줘요

죽은 고기를 먹고 사는 새카만 새들이 강둑을 넘기 전에

내 안의 오필리아, 착하디착한 그녀에게!)

 

 


 

김상미 시인

1957년 부산에서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로 등단.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산문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 『오늘은 바람이 좋아, 살아야겠다』 등. 박인환 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