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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기원 시인 / 웃는 데드마스크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6.
강기원 시인 / 웃는 데드마스크

강기원 시인 / 웃는 데드마스크

 

 

얼굴은 어디로 갔지

오늘도 죽음을 향해 걸어갔어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는 생각한다

문제는 늘 드러나는 속내

차라리 가면을 만들자

포커페이스

흐린 눈에도 멍한 귓속에도

석고를 붇는 거야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견고하여 붙는다

미련하게 솔직한 혀도

이 목 구 비 차례로 사라지고

이름 없는 무표정의 얼굴 하나

얼굴 위에 무겁게 덮인다. 납덩이처럼

떼어 내지 말아야 해 익숙해져야 하니까

아침마다 그는

만나야 할 로봇 같은 면상들 떠올리며

거울 앞에서 낯선 이목구비를 그린다

때로는 근엄하게 때로는 인자하게

중요한 건 카리스마와 유머를 잃지 않는 일

늦은 밤

바퀴와 회전문 에스컬레이터와 칸막이 사이를 누비고 다녔던

그가, 그가 아닌 그가

무너지듯 잠자리에 든다

가면 벗는 것도 잊은 채

그 밑의 숨 막힌 얼굴이

뭉클하게 썩어가는 것도 모르는 채

그리고

다음 날

그는 또다시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데드 맨 워킹

웃는 얼굴은 어디로 갔지

 

-시집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민음사, 2010년

 

 


 

 

강기원 시인 / 거북

 

 

내 몸속에 거북 한 마리 들어와 산다

언제부터였을까 나 대신

주억거리고 도리질하고 비굴하게 움츠러들기도 한다

 

학이라면 모를까 거북이는 되고 싶지 않았는데

녀석이 머리에 달려 있으니

걸음도 갈짓자, 등도 시멘트 들이부은 듯 딱딱하게 굳어간다

 

횡단보도 건너갈 일이 사막처럼 아득해지고

낯가림이 심해지고

낳아 놓은 자식들 제 알아서

살 놈 살고 잘못돼도 내 탓 아니려니 싶어진다

이미 지난 일 후회하면 뭐하나 뒤돌아보는 일도 없다

 

그 뿐인가

짧은 목 길게 빼어 바라보는 곳은

비린 바람 불어오는 바다 뿐

태내에서부터 출렁이던 양수의 바다 뿐

 

나 죽거든 문무왕처럼 나라지킴이는 못되어도

낙산 바다에 뿌려 달라 유서도 쓸까한다

 

이 난감한 녀석을 어찌 내보내야할지 궁리하는 대신

나는 점점 거북이 되어간다

침침한 눈 끔뻑이며, 홀로 거니는 고독한 거북

 

내 등판이 돌덩이인줄 알고 누군가 주저앉아도

무심결에 밟아도

끄덕끄덕과 도리도리 사이에서

굼뜬, 굼뜬, 거북한 거북이

 

-<애지> 2023년 가을호에서

 

 


 

 

강기원 시인 / 정오의 카페 7그램

 

 

그곳에서 만나

너와 내가 깃털보다

가벼워지는 곳

우리의 윤곽이 사라지는 곳

미농지보다 얇게 널 볼 수 있는 곳

오지 않은 너의

발걸음이 내 심장 속에서

쿵쿵거리는 곳

불현듯 당도한 네가

늦은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곳

우리의 질량이 같아지는 곳

나의 7그램에

너의 7그램을 합해도

여전히 7그램인 곳

우리가 흔적도 없이 스며

더 이상 진화하지 않는 곳

비로소 네가 너인 곳

내가 나인 곳

영혼에도 냄새가

있다고 믿는 곳

누가 어떤 저울에

우리 영혼을 달아본 걸까

아무튼

그곳에서 만나

눈부시게

캄캄한

정오에

 

-시집 『그곳에서 만나, 눈부시게 캄캄한 정오에』에서

 

 


 

 

강기원 시인 / 공포 두 알

 

 

유난히 노랗구나

탁! 깨뜨린 껍질 안에서 흘러나온 쌍알

죽음의 공포 앞에서 암탉은 一卵이 아닌 雙卵을 포태한다지

 

달궈진 팬 위 옹골지게 맞붙은 쌍란 속에 맺힌 밤의 닭장

번뜩이는 점박이들고양이 눈동자

오들오들 돋아난 암탉의 소름

 

바다절벽에 아슬히 매달린 노란 꽃술처럼

죽음의 순간에 맺힌 쌍란의 절박함

난경의 공포 두 알

 

그 위에 소금과 후추를 뿌리며 생각한다

돌연한 죽음에 맞닥뜨렸던

주검의 맛으로 시작되는 아침을

 

계간 『문학과 의식』 2022년 겨울호 발표

 

 


 

 

강기원 시인 / Dust

 

 

먼지의 기억 속으로 널 초대할게

 

천장이 기운 다락방 계단을 오르면

까르르 어린 날 웃음소리

콩콩 작은 발이 마루를 울리는 소리

뜨다 만 털실처럼 팡이실이 피어 있는 곳

 

올 풀린 군용담요, 열쇠가 사라진 빨간 일기장

썩은 젖니들, 탯줄 상자

노끈으로 묶은 편지들이 풍기는

떠나간 혈육의 냄새

 

계단을 내려와 뒷마당, 말라버린 검은 연못을 지나

오래된 창고로 갈까

빗장을 풀면 굳은 관절이 간신히 펴지듯 삐-그덕

심장이 멈춘 툰드라 아기비단거북처럼 숨어 있던 곳

흐느껴 울다 잠들어버린 곳

세 사람이나 죽어나간 폐가의 체취

깃털만 남은 빈 새장 냄새

기억나지 않는 동생의 기일

멈추지 않는 찬송가 소리

모아 모아 작은 병에 담을게

‘Dust’라는 이름의 향기

 

프로작을 삼켜야 하는 노란 하루가 또 오고 있어

죽은 너와 덜 죽은 나의 맥박이 뛰는 곳에

방울방울 뿌리자

 

향수(鄕愁)의 향수(香水)

 

계간 『아토포스』 2022년 겨울호 발표

 

 


 

 

강기원(康起原) 시인 / 강아테이블은 듣는다

 

 

죽어, 테이블이 되었다

 

테이블은 듣는다

오전 열한 시

익숙한 그녀의 발걸음 소리

노트북을 펼쳐 자판에 손을 얹은 채 멍하니 바라보다

어제의 이야기를 빠르게 이어가는 소리

에스프레소 흙갈색 향기를 듣는다

 

테이블은 듣는다

오후 두 시

결별을 고하는 남자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는 채

외면한 여자의 가슴이 사선으로 갈라지는 소리

태중의 아기 숨소리

세피아빛 홍차 식어가는 소리

 

테이블은 듣는다

오후 네 시

깨알 같은 글씨의 계약서를 좌르륵 펼치며

채 읽기도 전에 서명란을 가리키는 우렁한 소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 부딪치는 소리

 

테이블은 듣는다

저녁 여덟 시

연인들의 은밀한 눈빛이 오가는

소리 없는 소리

맞잡은 손으로 테이블은 잠시 데워지고

카페라떼 우유 그림 보얗게 풀어지는 소리

 

빈 테이블 위

유령들의 독백처럼

점점이 흩어진 하루의 부스러기들

쟁반 위에 무심히 쓸어 담는 소리

듣는다, 테이블은

다만, 듣는다

 

계간 『시인수첩』 2021년 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나비의 너비

​​

한 사람을 알아요

​울지 않는 새, 뿌리 없는 꽃

내일을 위해 아무것도 모으지 않죠

쿠푸쿠푸 라파라파

환청, 환시, 환촉 속에서

시공의 물결 따라

다만 날아가는 자

내 이마 깊숙이 제 뼈를 남겨 두고

다만 날아가는 자

그를 사랑하는 일은

마법의 음료를 마신 것처럼

잠시 만난 신의 얼굴을 잊는 일

쿠푸쿠푸 라파라파

날개를 접는다는 건

팔 없이 스스로를 안아주는 일

기록할 수 없는 신의 상형문자

어느 날 문득 사라지는 미소처럼

시취도 없는 찬란으로

오색 가루 되어 가뭇없이 흩어질 자

구름이 질료인 노숙의 무정부주의자를 잡으려

발뛰꿈치 든 세상과

나비와의 너비, 그 아득한 간극

쿠푸쿠푸 라파라파

끝내 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한 사람을 오래도록 생각합니다

 

 


 

 

강기원 시인 / 만두

중국의 용문(龍門)에선

인간으로 만두를 빚었지

그곳의 만두 맛은 정말 특별해

한 번 맛보면 잊을 수 없지

인육을 구하는 건 쉽지 않지만

맛만 있다면 사람들은

먼 거리도 마다 않지

바람을 뚫고

모래를 뚫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제 발로 찾아오거든

그날은 별미의 만두가 나오는 날

자모검을 쓰는 주방장은 보이지 않고

새벽녘 나오는 푸짐한 만두 속엔

알 수 없는 재료가

찰지게 반죽돼 있다네

나는 만두를 좋아해

만두를 맛있게 먹는 모습

바라보는 걸 더 좋아해

사랑하는, 망설이는 널 끌고

용문으로 가야지

허기진 네게

인상 깊은 만두를 먹여야지

만두소처럼 나로 너를

온전히, 맛있게, 그득하게 채워야지

시집 『바다로 가득한 책』(민음사.,2006) 중에서

 

 


 

 

강기원 시인 / 먹먹하고 막막한, 색의 반죽, 색의 번짐

 

 

 조금 취한 여자가 말했다. 타자와 관련해서 사랑은 신비하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타자를 만나 매혹에 빠지고, 타자의 초록빛에 물들고, 영원할 것 같은 사랑도 마침내 아픈 이별을 맞이하겠지만 사랑을 통해 비로소 나와 타자가 화해를 하는 거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가고 혼자 남은 나는 여자가 두고 간 원고를 뒤적거리다가 뭉크와 베이컨과 실레와 클림트 그리고 마그리트와 칼로를 불러냈다. 여자의 문장은 색이다. 색의 반죽이고 번짐이다. 영성과 세속, 차안과 피안, 실제와 상상, 삶과 죽음, 에로스와 파토스, 성聖과 성性, 영혼과 육체, 추함과 아름다움, 미각과 후각, 청각과 시각이 반죽되고 뒤섞이고 번지고 마침내 그 경계를 수시로 무너뜨린다. 마침내 취한 나는 영화 <밀양密陽>을 떠올렸다. 곤이젓처럼 절이고 삭힌, 먹먹하고 막막한, 어떤 빽빽한 사랑을 떠올렸다.

 

 


 

 

강기원 시인 / 먹태

 

 

날이 추워 하얗게 된 백태

속이 붉고 딱딱한 골태

몸통 잘린 파태

머리 잘린 무두태

흑태, 깡태, 망태, 조태, 졸태, 짝태, 바람태, 바닥태.....

 

이 모든 걸 먹태라 부르면 안될까

황태로 가는 길 위에서

다만 먹먹해지고 막막해진 저것들을

 

덕주와 화주 사이에서

베링해와 진부령 사이에서

할복과 관통 사이에서

산 것과 죽은 것 사이에서

너나없이

피 마르고 살 마르는 일월 속에서

 

황태가 되지 못한 것들의 이름

결코 성골이나 진골은 될 수 없던 것들을

내 이름처럼

지끈거리는 형제들처럼

중얼중얼 불러보는

속쓰린 아침

 

 


 

 

강기원 시인 / 복숭아

 

 

 사랑은..... 그러니까 과일 같은 것 사과 멜론 수박 배 감・・・・・・ 다 아니고 예민한 복숭아 손을 잡고 있으면 손목이 가슴을 대고 있으면 달아오른 심장이, 하나가 되었을 땐 뇌수마저 송두리째 서서히 물크러지며 상해 가는 것 사랑한다 속삭이며 서로의 살점 뭉텅 뭉텅 베어 먹는 것 골즙까지 남김없이 빨아 먹는 것 앙상한 늑골만 남을 때까지............ 그래, 마지막까지 함께 썩어 가는 것・・・・・・ 썩어 갈 수록 향기가 진해지는 것...... 그러나 복숭아를 먹을 때 사랑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시집 「바다로 가득 찬 책, 민음사, 2006

 

 


 

강기원(康起原) 시인

1957년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97년〈요셉보이스의 모자〉외 4편으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 당선. 2014년〈쌍봉낙타〉외 1편 《동시마중》에 발표하며 동시 작품활동 시작. 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 『바다로 가득 찬 책』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 『지중해의 피』 『다만 보라를 듣다』. 시화집 『내안의 붉은 사막』. 동시집 『토마토개구리』 『눈치보는 넙치』 『지느러미 달린 책』. 2006년 제25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2024년 제4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