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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성백선 시인 / 죽쑤는 아침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6.
성백선 시인 / 죽쑤는 아침

성백선 시인 / 죽쑤는 아침

 

 

햇살이 주방창을 노크할 때

신문이 들어왔다

바람 빠진 곰 같은 그의 구두를 밟고

문틈, 모로 누워 있는 등이 뒤척일 때마다

아버지의 오래된 등골이 가물거리고는

시계 초침 속으로 무심히 흘러들어간다

암초에 긁힌 패각처럼 건조한 벽과 벽 사이에서

나는 새로 산 식탁보를 꺼내 깐다

한물간 해초가 떠다니는 바위 주변을 맴도는 저쪽

칼로 물을 베는 이쪽

결국,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며

썰물은 뒤에서 거품만 부글거리다가 꺼졌다

오늘은 활전복 내장까지 넣어 죽을 쑨다

중불에서 뭉근히 죽이 끓는 동안

주걱은 득득 가슴 밑바닥 응어리 풀어내고

대접은 둥글게 비어 있다

한 그릇의 초록빛 아침을 담는다

 

 


 

 

성백선 시인 / 꼭두*​

 

 

당신은 가고, 나는 오는 사이 첫눈이 내립니다

 

하얀 교차점에서 나무의 심연을 꺼내

당신 품에 안깁니다 온기를 통과한

저 울림은 당신 만나 얇아진 나의 몸판에서 나는 것입니다

살아온 만큼의 우여곡절,

그 눈물과 웃음을 솎고 다듬어

한 조각 목우木遇를 가슴에 장식합니다

 

참 어여쁘지요

 

또 하나의 나를 맞이하고

잠시 설레다가 평온해지는 당신

뚝뚝 분절된 몸짓을 화사한 춤사위로 바꿔

이쪽과 저쪽을 이으면 좀 더 다정한 내세가 올까요

너른 세계로 가기 위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자르고 깎아

스스로 작아지는 방법뿐입니다

응고된 공기와 미명이 트는 경계

뜻 없이 피운 소란, 한 발자국 뒤서부터

당신 영혼과 호흡하렵니다

삼베 곁에 스민 숨결이 캄캄한 여정 밝히고

오욕칠정의 오방색 빛이 무덤 속에 잠들면

비로소 지워지는 당신과 나의 거리

 

이렇게 한 평생이 고요한 것을,

 

*죽은 이의 무덤에 넣어주는 부장품

​​-『다시올문학』(2015 봄호)

 

 


 

 

성백선 시인 / 북으로 난 창

 

 

내가 이사 가는 곳마다 추위가 따라왔네

아예 툰드라로 거주지를 옮기려 하자

이젠 강물이 나를 가로막네

강어귀 돌아 늪지대 넘어 침엽의 시간

가문비나무 사이에서 북극성 놓쳐버렸네  

 

지도 위쪽 찢어져 달아나고

꿈속 창밖을 보면

보름달 아래 우두커니 서 있는

순록 한 마리

커다란 뿔그림자에 눈꽃 어리며

얼마나 달빛을 헤쳤을까  

 

기억의 뿔 박제된 방

황소바람이 벽 가를 때마다

내 몸 끝방에서 방울을 꺼내 말 걸었네

찰랑찰랑, 넌 혼자가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려면

마지막 얼음바늘을 견뎌야 해

따뜻한 피의 정령들이 다가오고 있어  

 

수천 년 전 신석기 설원 날아온

한 샤먼의 주술이 지팡이에서 댕그랑거리는 듯

내 생의 북쪽 어디에선가 홀로

철탑을 돌던 종소리 옥탑방 창문 두드리네

 

 


 

 

​​성백선 시인 / 노둣돌

타인 곁에 큼지막한 돌 하나

박혀 있습니다

 

한없이 작아지는 내가 올 때

슬그머니 내밀어 준 등

돌계단인 양 무심코 밟고 올라타

돌아본 강 건너 불빛은 안갯속에서 눈 시리고

나무 잎사귀들 사이 붉은 열매

향기로웠습니다

 

희고 결연한 이타적 의지가

내 발 상처에 신선한 바람으로

불어온 것을 운명이라 이름 지으면서

 

완벽한 타인 속 나는

또 다른 타인이어서

당신 등 함부로 오르내렸습니다

문 밖 기억 환할수록

돌이 닳아 수척해지는 것도 모르고

상실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감지된 결핍이라니

 

아슬아슬 당돌함의 가장자리

우리 이쯤에서 매듭지을까요

발 디딜 때마다 아픈 당신,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1월호 발표

​​

 


 

 

성백선 시인 / 다알리아

 

 

꽃잎은 도저히 불가능한 눈빛이어서

여행이라는 가식으로 나를 자멸시키고 있어

 

참담한 농담이 휩쓸고 간 오후를

간신히 붙들고

버릴 수 없는 욕망의 껍질 냄새를 맡았지

 

당신이란 슬픔 속엔

빛바랜 거짓말 같은 싹이 자주 움트고

흔들리는 중심부를 돌아나와

덜컹거리면

 

웃음이 설탕을 핥으며 커피잔 뒤로 사라지곤 해

 

태양의 각질이 붉지

위층 여자 허벅지가 점점 가늘어져

우아한 여름은 진미용실 앞에 쌓여

 

화장을 지울래

새가 새장에 돌아올 시간이야

 

 


 

 

성백선 시인 / 별달거리*

 

 

깨어나 정강이를 만져 보니 알이 배겨

시큰거린다

축축한 손 뿌리치고 쓰러진 게 기억났다

각자 다른 별에서 온 종족이란 말도

서로 헛다리짚는 채 시절을 소모하느니

불안정한 자유를 선택했다

 

방죽골 벼들이 비바람에 이리저리

뒤척이며 신음소리 냈다

어둠이 불끈,표정을 바꾸는 밤이면

별과 달이 내려와 벼 발뒤꿈치를 다독이고

고라니도 찾아와 핥아주었다

 

스크럼 짜고 들썩이는 들판

마음 한 짝 논두렁 뒹군다 아파할

시간을 정해 놓고 충분히 아프기로 했다

논배미가 낄낄거린다

 

낟알마다 노오란 별거리 달거리 걸었다

메뚜기 한 철 제 몫의 질량을 부풀린다

 

쿨한 척,

휩쓸리다 보면 통증도 건너질까

별이 쏟아지고 나는 솟구쳐 그 접점에서 피는 꽃

환한 알곡에 구부정한 아버지 가을을 더하면

스무 가마다

 

갈망의 껍질 찧으니 하루가 밀밀하다

밤하늘 별과 달 먹고

자르르 익어가는 파란의 계절,

 

*별달거리:  풍년을 기원하는 사물놀이 영남가락 중 한 대목.

 

 


 

 

성백선 시인 / 추나推拿

 

 

내 몸속 엉겨 붙은 꿈조각일까

가려면 붙잡고 누우려면 일으켜 세우는

봉침이 그리는 뻐근한 원 따라

살갗 찢고 뼛속 지나면 '성녀 테레사의 황홀경'*

통증이 응어리져서 반짝인다

지금은 악몽으로 악몽을 넘어

자유 가까이 한 팔 더 뻗어야 할 때

어깨를 둥글게 말수록 그는 갈기 세워

봉두난발 몸부림 끝으로 동결을 밀어부친다

그만 떨어져 줘, 뼈가 살을 놓아주는 동안

한 무리 별똥별이 오르골 소리로 쏟아지고

비명이 흉터를 긁고 붉은 가려움 속으로 사라진다

반라半裸로 포박당한 채 더듬더듬

그의 손가락 사이 치열한 요법을 온몸 받아들이면

밀고 당기는 오랜 성원 끝

살점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찾았으니 이제 안녕

이별은 간결하게,

베드 위 남은 신음이 한의원을 빠져나가자

내 관절낭 깊은 곳 그의 엄지손가락이 굳는다

 

* 불화살로 심장이 찔리자 고통과 함께 극도의 희열이 찾아왔다는 베르니니의 조각상.

 

《문학청춘》 2012년 가을호

 

 


 

 

성백선 시인 / 서쪽으로 난 창

 

 

벽돌 벽지로 바꾼 후부터

창가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오후 햇살에 기대면

비명횡사가 꿈이라던 친구 눈빛이 생각난다

그때 석양의 문장은 오묘하게

역행을 일삼더니

결국 일몰이 자멸로 읽혀졌다

서산 땅거미 따라간 유년은 아득하고

편차 심한 우울에

날씨라도 받쳐주는 날이면 일그러지는 일들

불화의 불씨마다 울리던 사이렌 소리

왜 갈등은 발등 찍히고서야 진압되는지

어느 노부부 이야기가 노래 될 줄 모르는

젊은 사랑은 헤어짐이 잦다

늘 사람보다 사랑이 먼저라 탈이다

창밖 풀벌레 울음 거세지면

종아리에 맺히는 슬픈 곡조마저 좋아진다

얽매이지 않을 거란 다짐에 스스로 엮이면서

또 하나의 선을 넘고 만다

이대로 멈춰도 좋을,

 

 


 

성백선 시인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8년 《사이버 문학상》과 계간 《시작》에 〈애어리염낭거미〉외 4편을 발표하며 詩作활동 시작. 시집 『분합문』 『그라데이션』.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