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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인 / 두 가지만 주소서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인내를 바꿀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나보다 약한 자 앞에서는 겸손할 수 있는 여유를 나보다 강한 자 앞에서는 당당할 수 있는 깊이를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가난하고 작아질수록 나눌 수 있는 능력을 성취하고 커 나갈수록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관계를
나에게 오직 한 가지만 주소서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삶에 뿌리 박은 깨끗한 이 마음 하나만을
박노해 시인 / 나는 그냥
나는 그냥 인정받고 살고 싶다 유명하지 않아도 남들만큼 빛나기를 원한다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다 남부럽지 않게 남들 사는 만큼 살고 싶다
네가 부자가 되면 나는 너만큼은 부자가 되고 네가 잘나가면 나는 너 정도는 잘나가고 내가 못 따라잡으면 나는 내 아이를 기어코 네 아이만큼은 밀어 올리고
나는 그냥 남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걱정 없이 어려움 없을 정도의 적은 재산으로 죽을 때까지 풍족하게 살고 싶다
나는 그냥 지금 뭔 말하는지 나도 모르지만 다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들 하니까 뭔 소린지 몰라도 지금 나는 그냥
박노해 시인 / 천 년의 시작은 이렇게
나무가 잘려나가고 좋은 땅을 빼앗겨도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황무지를 일구며 다시 어린 올리브나무를 심어나간다. 척박한 땅에서 올리브나무 하나 키우기란 아이를 기르듯 공력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모래바람과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한 그루 한 그루 낡은 드럼통으로 감싸고 그 위에 팔레스타인 국기를 상징하는 초록, 하양, 빨강색을 기원하듯 칠해두었다. 이 작고 여린 나무들 중에 끝내 살아남아 다시 천 년을 이어갈 올리브나무가 있으리니 그토록 길고 큰 '사랑의 나무'의 시작은 얼마나 미약하고 눈물겨운지
박노해 시인 / 도토리 두 알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 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박노해 시인 / 바람이 바뀌었다
천둥번개가 한 번 치고 시원한 빗줄기가 내리더니 하루아침에 바람이 바뀌었다
풀벌레 소리가 가늘어지고 새의 노래가 한 옥타브 높아지고 짙푸르던 나뭇잎도 엷어지고 바위 틈의 돌단풍이 붉어지고
다랑논의 벼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검붉게 익어오고 산국화가 꽃망울을 올리고 하늘 구름이 투명해지고
입추가 오는 아침 길에서 가늘어진 눈빛으로 먼 그대를 바라본다 조용히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무더운 열기와 무거운 공기와 얼굴을 가리고 말들을 삼키고 마스크 씌워져 무감하고 무디어진 내 생의 날들이여
이제 바람이 바뀌어 불고 맑아지고 섬세해진 나의 감각으로 거짓과 진실을 강제와 자율을 예리하게 식별해 가야겠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바뀌었다 하늘이 높아졌다
박노해 시인 / 한계선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더는 나아갈 수 없다 돌아서고 싶을 때 고개 들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라
여기서 돌아서면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너는 도망치게 되리라
여기까지가 한계라고 스스로 그어버린 그 한계선이 평생 너의 한계가 되고 말리라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그만 금을 긋고 돌아서고 싶을 때 묵묵히 황무지를 갈아가는 일소처럼 꾸역꾸역 너의 지경을 넓혀가라
박노해 시인 /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 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 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나는 왜 이렇게 삶을 서둘러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 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한 그루 심지도 못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 왔다 나는 삶을 지나쳐 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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