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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익진 시인 / 스커트 속의 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9.
정익진 시인 / 스커트 속의 밤

정익진 시인 / 스커트 속의 밤

 

 

스커트 속은 밤이었다.

 

물방울 스커트, 미니 스커트.

롱 스커트, 노을 스커트 그리고

 

아침에 당신의 스커트를 들어올리고

밤거리를 한동안 서성인다.

 

열대야의 혓바닥에

밤을 집요하게 핥아낸다.

 

바비큐 그릴에서 달콤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동안

어둠 속에선 분홍빛 젤리가 흘러내린다.

 

때를 놓치지 않고,

 

초저녁의 어둠을

너의 스커트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는다. 더욱 더 깊어지는 밤.

 

터널 속으로 사라졌다 빠져 나오기를

반복하는 차량들,

 

들려오는 종소리

 

댕---

댕댕---

댕댕댕---

 

오오, 성스러운 밤

오, 이런!

 

모처럼 별들은 반짝이고

 

 


 

 

정익진 시인 / 구름 공항

 

 

구름들이 모여 붐비고 있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공항 대합실의 공중을 웅성웅성 떠다닌다.

그들은 곧 떠나갈 것이다.

 

구름 신발을 신고

둥둥 캐리어 한두 마리를 몰고, 풍선을 한 손에 들

블라디보스톡의 봄, 혹은

핀란드와 스톡홀름의 겨울을 향하여

 

쿠알라룸푸르나 리스본의 항로를 가로질러

파리의 7월, 베니스의 9월 하늘로

 

둥, 둥

 

문을 열고 담을 넘어

덫과 함정과 올가미에서 빠져나와, 그 모든 원인과 이유를 털어내고

촛불을 끄고 서류더미를 걷어치우고, 익숙했던 이름들 죄다 잊어버리고

새끼 여섯 마리 낳은 펑키를 애완견 호텔에 투숙시키고,

이혼 도장을 찍고, 일급비밀 남겨두고, 지켜야 할 약속도 미뤄두고

 

둥, 둥

 

하늘의 유목민들은 모자가 필요했다.

 

양떼구름, 새털구름... 입 벌린 호랑이나 느릿느릿 나무늘보

사이를 빠져나와 광활하게 펼쳐진 운해 위를 지나가는 비행기들

 

천천히 허물어지는 성벽을 관통하는 델타에어라인,

비엔티안 공항에 내려 라오항공으로 갈아타기도 했다.

 

쪼개진 산, 화련산의 천공에서 태어난

유리 같이 맑았던 구름, 저 구름들을 데려와 베란다 창밖에 걸어두고 싶었다.

 

둥, 둥

 

밤이었다. 공항이다.

비로소 지면에 발을 디딘다.

캐리어를 질질 끌고 서둘러 3번 게이트로 빠져나간다.

 

강간당한 동물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구름들.

 

-《서정과현실》2020. 상반기호

 

 


 

 

정익진 시인 / 아이스크림

 

 

사랑해, 잊지 않을게

귀에 대고 속삭이면

순식간에 너의 귀가 녹아내린다

핥을 때마다 너는

해바라기에서 제비꽃으로 느낌표에서 물음표로…

물고기에서 독수리로

타조의 알에서 기타로 변해간다

이마에 입 맞춘다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

스르르 풀어지며 찬바람이 불어온다

눈동자를 파먹고 코를 삼키고…

여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입꼬리를 살짝 추켜올리며 웃음 짓지만

곧 표정은 흘러내려

윗옷을 적신다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는

너를…

 

 


 

 

정익진 시인 / 농도

 

 

노랑의 반대말이 궁금한 것보다

노란의 농도가 더해지면 나비가 되어

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더 크다

 

노란에 대해 시를 썼지만 실패한 적이 있다.

농도가 약했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을 때

레몬을 갈아 원액으로 마시면 좋다

 

술집 변기에 오줌이 고여 있다.

오줌을 누고 물을 내리지 않는다

노란과 노랑이 뒤섞인다 수치와 모멸이

욕설과 독설이 뒤섞인다

거울처럼 고요해질 때까지 기다릴까 하다

지린내 때문에 밖으로 나와야 했다

뒷사람도 소변을 본 뒤 물을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

 

설치작가 '이불'은 날생선을 전시해서

그동안 썩어가는 냄새를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향수 한 방울을 위해

장미 한 트럭이 필요하다

순수혈통보다 혼혈이,

일반 난초보다 돌연변이가 더욱 농염하다

 

진한 키스는 노랑이라기보다 진홍이다

서로의 혓바닥과 혓바닥이 뒤엉키고 침이 뒤섞인다

팔과 다리가 엉겨 붙어 문어 다리처럼 꿈틀댄다 뜨거운 숨결을 내뿜는다

하늘이 샛노랗다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가 겹쳐도 견뎌내야 한다

안경알이 더러워져도 닦지 않는다 더 더러워질 때까지 끝까지 버틴다

인생이 더러워지면 얼마나 더 더러워질까

광기의 극한까지 타락의 그 극한까지

농도 짙게

 

 


 

 

정익진 시인 / 유도 소녀 미미

​1.

저게 유도인가. 단발머리가 펄럭, 천진발랄, 샤방샤방, 어깨 위의 박쥐,

때로는, 오비이락, 비몽사몽. 저것이 취권인가. 허허실실. 아니면 품바인가.

피오나 바우쉬의 안무 혹은, 통영 오광대인가.

2.

미미*는 검은 띠와 열여덟 겹의 도복을 벗어 던지고 극락조의 깃털로 장식된

의상으로 갈아입는다. 생활의 리듬 때문이다. 그리곤 능수버들 헤어스타일을

손질하며 화장품 광고 영상을 촬영한다.

새장을 열고 새들을 날려 보내는 장면이 포함되었다.

새의 눈물 한 방울이 미미의 붉은 뺨 위에 떨어진다.

3.

투명한 시간이 다가오자 미미는 공중에 떠 있는 바위의 꼭대기에 기어오르거나

하프 소리가 들려오는 신전에 머물기도 한다. 숲 속의 호수에서 헤엄을 치며

물고기를 잡거나, 놀란 얼룩말을 타고 강둑을 달려가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한다.

4.

망루에 올라 초원을 횡단하는 코끼리들의 행렬을 바라본다는 것은

정형외과 병실에서 탈골된 부위에 깁스를 하고

해가 떨어지는 서쪽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는 일이라고 미미는 말했다.

5.

달빛이 밤을 산란하는 동안, 미미는 물결 소리가 나는 침실에서 잠잔다.

방의 벽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바닥에 떨어졌다가를 반복하면서,

깨어난 미미는 젖은 날개를 퍼덕인다. 미미의 종소리가 울린다.

6.

저것이 유도인가. 고양이의 발놀림, 곰의 앞발 공격, 원숭이의 보행법,

누르기 기계, 밀당하고, 입양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기, 말미잘, 문어, 낙지,

감자 씨앗을 뿌리고, 감을 따 먹고, 헌신하고, 후회와 공포를 털어내고,

완전체를 다짐하며, 우리 모두 초인이 되려고, 신이 되려고 얼마나 몸부림치는가.

미미 소녀, 안녕, 안녕히

*유도 국가대표, 허미미 선수 인용

 

 


 

 

정익진 시인 / 시계저울

 

 

그는 정오

나는 밤이었다.

 

그녀의 체중이 자정이 될 때까지

남은 1시간 35분, 마지막 마술공연이 진행 중인 옥상정원에선

아직도 새들이 날아다닌다.

 

저녁 7시, 가벼운 키스를 하기 적당한 때였지.

 

앵무새 횃대 위의 시각을 위해

욕망을 줄여 나갈 수 있겠는가. 거대한 외투를 벗어버려라.

나는 동식물 애호가, 세계적 조류학자다.

푸에블로 족의 추장이 될 것이다.

 

바람을 흔들어 마시고 안개를 내뿜는다.

 

저울 위에 다시 오른다.

아침 7시 25분이다.

그동안 35분이 줄었다.

더 젊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잡념을 줄였을 뿐이다. 사랑이 깊어진다.

 

계체량에 따라 색깔이 결정된다.

 

오전 8시. 3.5킬로. 나는 사생아로 태어났고 초록색이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던 나의 삶은 정각 6시.

비 오는 날 오후 6시마다 용서했다. 유일한 자랑이다.

 

온몸을 소금으로 가득 채워 저울 위에 올라섰는가.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뿐이야.

내가 달콤해질 때까지 십 년 하고 팔 개월 남았어.

 

뒤통수에서 독수리 부리가 튀어나오고

사자 갈기 휘날리고 고래의 지느러미가 자라난 뒤에도

혼란을 멈출 수가 없어.

 

협박하거나 거짓말을 할 때마다 몸피가 불어난다.

사회적 중압감을 느낄 때마다 벽시계를 끌어안는다.

형량은 줄지 않았고 장기 하나씩 증발했다.

 

저울 위에서 떠나야 할 순서를 기다린다.

 

구름 위로 뛰어내린다.

태양이 차가워졌다.

 

벽장 속의 수직과 바다를 합한 무게라든지

그리하여 시간이여

 

새벽 3시 25분 35초, 그 여자가 죽었다.

얼마나 가벼웠던지 하늘을 날기에 충분했다.

 

 


 

 

정익진 시인 / 삼각함수를 위한 서정

 

 

싸인알파, 코사인베타, 플러스, 괄호 열고...

 

삼각형, 그 쓸쓸한 꼭지점에서

45 왼쪽으로 비가 내리면

그곳은 태양

 

오른쪽 45°

우박이 떨어지면

그곳은 동물원

 

그 여자와 나와 그녀가

벤치에 앉아 있다

 

 


 

정익진 시인

1957년 부산에서 출생. 1997년 계간 《시와 사상》 제1회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구멍의 크기』 『윗몸일으키기』 『낙타 코끼리 얼룩말』 『스캣』. 2014년 제14회 부산작가상 수상. 현재 부산작가회의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