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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인식 시인 / 사내와 시계탑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9.
전인식 시인 / 사내와 시계탑

전인식 시인 / 사내와 시계탑

 

 

저물 무렵 역 광장

한 사내가 시계탑을 등에 메고 앉아 있다

 

어디에서나 삶은 고행이란 걸 미리 알아버린 듯

턱 괴고 앉은 등 뒤로 노을이

후광(後光)으로 퍼져 흐르고 있다

 

몇 개의 사막을 건너온 다 닳아빠진 운동화

바람이 기거하기 좋은 낡은 작업복

북서쪽에서 온 바람이 그를 알아보고 일으켜 세운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은 흔들리는 덤불숲

조금도 꼼짝 않는 몸

쓰러질 것 같은 가벼움이 세상 위에 떠 있다

 

말라빠진 몸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올 한 올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마다

한 눈금씩 돌아가는 시곗바늘

시계탑을 등에 멘 한 사내 턱을 괴고 앉아 있다

 

갈 길 바쁜 사람들 대신

역 광장 비둘기들만 우르르 모여들어

법문 듣듯 보리수나무 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시집 <모란꽃 무늬 이불 속>에서

 

 


 

 

전인식 시인 / 슬픈 직선

 

 

아프리카 지도를 펼치면 피 냄새가 난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남의 나라가 되었다

너의 집과 나의 집이 남의 나라가 되었다

 

어느 날 하룻밤 새

가족들이 다른 나라 사람이 되었다

형은 영어를, 동생은 프랑스어를 배워야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천둥 번개처럼 면도칼이 지나갔다

마을 앞 흐르던 강물이 잘려 나갔고

염소 몰던 초원이 잘려 나갔다

바오바브나무와 코끼리도 잘려 나갔다

 

우리는?

 

-시집 『모란꽃 무늬 이불 속』 (한국문연, 2021)

 

 


 

 

전인식 시인 / 조르바 선생님 춤 좀 가르쳐 주실래요

 

 

조르바 선생님 춤 좀 가르쳐 주실래요

울고 있는 것보다 춤추는 게 더 낫잖아요

슬픔을 기쁨으로 뒤집을 수 있는

당신의 자주 써 먹는 주특기 엎어치기 기술 좀 가르쳐 주세요

술 한 잔 사드릴게요

 

같이 살던 남자가 돌아오지 않을 때

기다리지 않고 슬프지 않고 웃을 수 있도록

노래하고 춤추는 방법 좀 알려 주세요

지르박도 좋고 차차차도 좋아요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을 때

머리 쥐어뜯고 싶은 죄책감과

어디서 고양이 울음소리 환청이 들려올 때

부디 춤추고 노래하는 법 좀 가르쳐 주세요

디스코도 좋고 부르스도 좋아요

 

나 당신이 좋아하는 혼자 사는 여자예요

꽉 좀 안아주세요 젖은 수건 짜듯이 쫘~악

내 몸에 많은 물기들 좀 짜 주세요

 

당신의 커다란 입구멍으로 내 몸속의 수분들을

확 빨아 당겨 줄 수는 없나요

 

가끔은 드라이플라워만큼 건조해지고 싶어요

사막에 피는 꽃처럼 작아지고 작아져서

더 단단해지고 싶어요 피도 눈물도 없이

 

조르바 선생님 춤 좀 가르쳐 주세요

더 이상 슬픔들이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니코스 카잔차키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시민정신」 2017년 봄호

 

 


 

 

전인식 시인 / 청암사(靑岩寺)*

 

 

청암사는 혼자 가야한다

 

굴참나무 숲이 감추어 놓은 길도 길이련만

일주문 들어서기 전 부터

묵언!

이라는 팻말들 앞에 입을 다물어야 하는

가쁜 숨소리조차 삼켜야하는 고통을

어느 정도는 참아야 찾아갈 수 있다

 

산꼭대기 별들이나 주고받던 말

도란도란 골짝타고 내려오는 맑은 물소리쯤은

그냥 그대로 흘러도 괜찮을 텐데

절 앞에서는 기어코 발꿈치를 들고 지난다

 

비구니강원을 알기라도 하는지

산새들마저 절 지붕 비껴날며

저편 산으로 옮겨 앉은 다음에서야

지지배배 지지배

참았던 수다 떨고 있다

탑만 있고 사람 없는 절

고무신 벗어두고 스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푸른 하늘 강물 속으로 멱 감으러 갔을까

가부좌 튼 수선화가 눈짓으로 푸른 하늘 쪽을 가르키네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한 사내

움찔 움찔 절 마당 들어서질 못하고

숲 그늘에 쪼그리고 앉아있네

간지러운 혀끝 깨무는 연습이라도 하는지

썩은 나뭇가지 붓으로 땅그림을 그리네

 

*경북 김천 수도산에 있는 절

 

 


 

 

전인식 시인 / 여림*이라는 시인

 

 

본 적이 있나요?

혼자 북한강에서 돌 던지며 놀고 있는 사람

서울로 이어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 싫어

눈 찡그리던 사람

남양주 어디에서 자주 들리던 거제 앞바다 파도 소리

달래다가 잠재우다 소주를 좋아하게 된

그 사내

 

한번 보자, 소주 한잔하자

남발했던 약속들

시 접고 시골 내려온 어느 날

지나가던 북서풍이 전해 준 20년 지난 부음에는

하모니카 소리 가늘게 새어 나왔다.

형님 소리 참 듣고 싶기도 했다마는……

 

마당 끝이 바다였던 집 막내

가슴팍에 파도 소리가 절반인 그에게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가 세상 어디에 있었던가

이 길 어디쯤 해종일 네가 서 있었으면 좋겠다

 

송장헤엄 치는 허허바다

사람과 사람 사이 멀미하면서도

돌아서면 그리운 게 사람이었을까

시인이 되고 싶었을 뿐

시인으로 굳이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다던

그대

 

소주 대신 졸시 한 편으로 퉁쳐도 될까요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산, 2002년 타계. 친구들이 컴퓨터 속 시들을 꺼내어 묶어준 유고시집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가 있음.

 

 


 

 

전인식 시인 / 황소개구리

 

 

마음 먹으면 어디던지 상륙이 가능하다

물과 땅의 경계, 국경의 구분이 따로 없지

막강 미 해병대 얼룩무늬 위장복만 입으면

눈에 보이는 게 없지

모든 게 밥이지 밥!

 

우람한 체격, 단단한 근육질 몸에

기관총을 두르고 내다 갈기는 무자비한 폭력도

세계평화가 되고 국제질서가 되는 너를

일찍이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박수를 쳐대며 본 적이 있지

 

오늘도 세계평화를 위해

평택이나 동두천, 이 땅의 숲과 강 어디에서나

큰 덩치에 큰 입 벌리고 있는 너는

도시 한복판에 많다

MD.CC, MS.......

무수한 황소개구리들

 

우리들 마음속에도 많다

 

 


 

 

전인식 시인 / 내 몸엔 이가 산다

 

 

가슴속 숨어 사는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두개골속 기어올라 생각 흩트려 놓기도 하고

사타구니 사이 파고들며

신경질적으로 짜증내는 나를 은근히 즐기기도 하는

정체불명의 그가 나를 다스린다

간혹 내가, 내 뜻과 상관없이

엉뚱한 행동이나 예측불허의 말로

남을 당황케 하기도 한다

내 입과 몸을 빌려 그가 대신했음을 알지만

내 몸이 지배받고 있다는 이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다

슬픈 주권상실을 감히 말할 수가 없다

나를 지배하는 그는

약간의 독을 가지고 나를 다스린다

약간의 고통도 참지 못하는 나는

쉽게 그의 지시를 받들며 산다

한번도 본적 없는 그를

군주님이나 주인님이라 하지 않고

통상적으로 나는 이라고 말한다

내 몸엔 이가 산다

흔들바위만한 이가 산다

 

 


 

전인식(全仁植) 시인

1964년 경북 경주 출생. 1995년 선사문학상 시 당선. 1995년 신라문학 시부문 대상. 1996년 선사문학상 시 당선. 1996년 통일문학상공모 시부문 대상. 1997년 《대구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1998년 불교문예 신인상 수상. 현재 불교문인협회 회원. 시집 <검은 해를 보았네> <모란꽃 무늬 이불 속>. 전자시집 <고약한 추억의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