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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찬규 시인 / 금은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14.
고찬규 시인 / 금은방

고찬규 시인 / 금은방

 

 

더 많은 주름을 거느린 담에 기댄 채

할머니는 꾸벅구벅 끄덕이며

청춘을 푸른 하늘처럼 펼쳐 놓는 중

햇빛은 이내 뒤따라온 햇빛에 말리면서

과거를 비쳐주지 못하고 바삐 사라진다.

가지런히 돌고 돌았다. 골목 골목은

거대한 팽이가 되어

스스로 상처를 드러내는

계절은 채찍이었다. 변해야만 했다.

담쟁이는 담의 일부

잎이 또 한번 피고 졌다.

듬성듬성 낡은 시간이 덧칠해져 있다.

저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목숨이 절단되고

아기들은 울었던가.

시장이 있고 두 대의 약국과 하나의 병원

많은 소리들이 숨쉬기 시작하면

할머니가 기댄 담벼락 맞은 편 금은방 앞에는

어떤 시계로도 돌려 놓을 수 없는 화려한 추억

주섬주섬 할머니가 볕에 말리고 있는 것은

꿈으로 갈고 닦은 보석인가.

서로 다른 빛으로 반짝이는 각자의 둥지

금은방? 그렇지 금이 바로 방이지

시계가 시간을 따라 떨어져 나가고

금은 방이 된 시계방

시침에 찔려 언제나 봄인 뻐꾸기와

목과 목을 옭아매는 목걸이

주렁주렁 장신구며 보석이

저마다 제 몫을 반짝인다.

햇빛은 할머니를 찔러 보지만 더 이상

청춘은 푸른 하늘처럼 펼쳐지지 않는다.

할머니는 오늘도 금 간 담벼락에 기댄 채

낙타의 등허리 같은 길을 꾸불꾸불 가는 중

 

 


 

 

고찬규 시인 / 길 안의 둥지

 

 

저마다 사연 있는 놈들이 모여

꽃과 향기와 거시기를 굴뚝도 없이

노을 혹은 거짓말처럼 피워올리는

겨울 천변 공사판

드럼통에 갇혀 몸부림치는

그을음과 언뜻언뜻 하늘로 차오르는

초저녁 불꽃을 보다보면

이곳까지 와 닿은 발길과

짝 맞지 않는 목장갑, 간혹

구색에 맞춰 뒤로 돌아선 엉덩짝이

다 내 것이요 네 것이다

이럴 때면 흔해빠진 골목길

그 따뜻한 불빛을 생각한다

타오르며 사그라지는 것들의 고단함

가까이 다가가면 꺾어져 이어지는

골목과 동그란 아랫목

이를테면 애호박 하나 달고 저물어가는

노오란 호박꽃의 한 생을

떠올리는 것이다 모처럼

겨울 앞에 서 있는 겁 없음이

하루를 살아 온 자의

귀갓길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고찬규 시인

1969년 전북 부안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및 同 대학원 석사 과정 수료. 1998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 『숲을 떠메고 간 새들의 푸른 어깨』 『핑퐁핑퐁』이 있음. 제22회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수상. ‘천몽’ 동인. 도서출판 해토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