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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향숙 시인 / 귀가
저기 노인이 걸어간다
시간을 흘리며 걸어간다 생을 흘리며 걸어간다 무상을, 죽음을 흘리며 걸어간다
산숙의 목침 같았던 시간들 한 번도 주인이 될 수 없었던 시간을 비우며 절룩, 태아의 잠 속으로 들어간다
허향숙 시인 / 문장을 먹는다
꼭두새벽부터 식탁에 앉아 문장을 먹는다
어떤 문장은 국수처럼 후루룩 단숨에 들이켜고
어떤 문장은 오징어처럼 질겅질겅 곱씹고
또 어떤 문장은 질긴 갈빗살 뜯듯 물어뜯는다
어떤 문장은 비위에 거슬려 게워 내고
어떤 문장은 너무 맵거나 짜 눈살을 찌푸리고
또 어떤 문장은 더 깊이 발효시키기 위해 저장한다
음식처럼 양념을 많이 친 문장은
소화가 안 되고 머릿속도 더부룩해진다
삼색나물 같은 슴슴한 문장을 먹고 난 날은
내 영혼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시집 <그리움의 총량>(천년의 시작,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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