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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서봉 시인 / 액자 소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20.
천서봉 시인 / 액자 소설

천서봉 시인 / 액자 소설

 

 

 액자 속에서 노을 진다. 잠 못 드는 밤마다 우리는 물처럼 흘렀지만, 우리는 사랑의 정물, 液은 은밀히 밥을 짓고 분주한 슬픔을 나누어 먹다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의 깜박거리는 눈은 새로운 구름 몇 장을 인화하고 나는 아직 하늘이 채 지워지지 않은 유리창을 꺼내며 말한다. 조심하렴.

 

 아이는 언젠가 완성된 액자 속에 우리를 가둘 것이다. 우리는 한때를 누린 마름다운 정물, 사과처럼 화병처럼 붉은 테이블보 위엔 조용히 액厄이 쌓이다 저녁은 자주 화분 속 구근처럼 무거워진다. 들어가세요 아버지, 아버지가 평생 사셔야 할 방이에요. 의식의 흐름에 따른 순서대로,

 

 액자 속 노을 진다. 유리창, 금 간 거미줄에 노을 걸린다. 놀 속의 붉은 놀, 액자 속의 액자, 아이 속의 아이, 추억이 중얼거린다. 네모 안의 네모의 네모안의 네모의네모안의네모의네모는 구름이 묻어 있는 유리창을 또 갈아 끼우고 이야기는 끝없이 이야기를 낳는다.

 

 나는 수인의 몸이었다.

 

-작가세계 2007년 겨울호

 

 


 

 

천서봉 시인 / 봄밤을 위한 에스키스

-역사에서

 

 

 가로등이 제 아랫도리를 비추었다. 땅 위에 번져가던 어둠이 흠칫 놀라며 멈추어 섰으나 이내 성큼성큼 그 무거운 빛깔을 옮겨갈 때 나는 불씨 하나 손에 쥔 사내가 쓰레기통에 불을 놓고 가는 것을 보았다. 가끔씩 터져서 튀어 오르는 무엇이 몇 개의 별을 공중에 박아놓기도 했지만 누구도 이 어둠을 흔들어놓지 못했으므로, 사소한 나무의 떨림을 다스하게 덧칠하는 연기자락, 生은 흐렸다. 사람 들의 입 막으며 저녁이 선로의 빛나는 침묵 위를 종단한다. 덜컹거리며 다가올 열차는 무엇으로 스스로의 이정표를 찾아가는지, 주머니 속 차표를 만지작거렸다. 희망은 닳거나 구겨져 있었다.

 

 


 

천서봉(千瑞鳳) 시인

1971년 서울에서 출생. 2005년 《작가세계》를 통해 〈바람의 목회〉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서봉氏의 가방』. 포토에세이 『있는 힘껏, 당신』. 2008년 문예진흥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