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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by 파스칼바이런 2009. 3. 29.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가난한 동정녀로서 복음적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클라라에게 당시의 교황, 추기경과 왕, 귀족들까지도 그녀의 기도를 부탁하고 자문을 구하러 찾아왔다.

 

평생 단순 겸손 가난의 삶 살아

모범적인 삶에 기도 부탁 줄이어

엄격한 회칙 만들어 승인 받기도

 

"성 프란치스코께서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회개하기 시작할 때부터 가르쳐 주신 것과 같이 자매들은 거룩한 단순성과 겸손과 가난의 길을 따르며 또한 값지고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항상 노력하십시오. 이렇게 살아감으로써 자매들은 우리 공로로써가 아니라 온전히 자비의 아버지 자체이시고 선물을 베풀어주시는 그분의 자비와 은총으로써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언제나 좋은 명성의 향기를 풍기게 될 것입니다."(성녀 클라라의 유언 중에서)

 

'거룩한 단순성과 겸손과 가난', 그것들은 성녀 클라라(Clara, Assisiensis, 1194~1253)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단 한시도 다름없이 실천했던 덕목들이었다.

클라라 수도회의 창설자로 사후 불과 2년 만에 교황 알렉산델 4세에 의해 시성된 클라라는 오직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 기도로써 얻을 수 있는 참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성인이었다.

 

성 프란치스코 성인으로 이미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귀족 가문에서 장녀로 태어난 성녀는 어머니가 기도 중에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고 난 후 태어났기에, '빛'이라는 의미를 지닌 '클라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열정적이고 기쁨에 찬 설교를 직접 듣고 난 후 그 형제들의 생활을 보면서, 그러한 복음적 생활에 대한 강한 끌림을 느끼게 됐다.

이에 그녀는 1212년, 18살 때의 성지주일 밤, 가족들이 곤하게 잠든 사이에 집을 나서 프란치스코를 찾아가 그의 첫 여성 동료가 된다.

 

스승이며 영적 아버지인 성 프란치스코를 따라 클라라는 세속을 완전히 떠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과 사랑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형제회에 여자 수도회가 없어서 인근의 베네딕토 수녀원에 머물던 클라라는, 부모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삭발한 자신의 머리를 보여주며 이를 뿌리치고, 자신을 따라 복음적 생활을 함께 시작한 동생 아녜스와 함께 성 프란치스코의 도움을 얻어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클라라 수도회)를 시작했다.

 

수도회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비천한 종, 겸손한 하느님의 여종으로서 클라라는 공동체 생활을 해나갔다.

특히 가난한 동정녀로서 복음적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클라라에게 당시의 교황, 추기경과 왕, 귀족들까지도 그녀의 기도를 부탁하고 자문을 구하러 찾아왔다.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가 마련해준 아시시 인근의 성 다미아노 수도원에서 이처럼 복음적 삶을 살았고, 그리하여 이 수도원은 수도회 가족들뿐만 아니라 수도회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가까운 이웃이 되어 그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자리가 됐다.

 

그녀는 한편, 프란치스코의 정신과 관계가 없는 회칙들을 지키는 생활이 프란치스코에게서 배운 복음적 가난의 생활과 형제회와의 유대를 보존할 수 없음을 염려해 스스로 회칙을 작성해 교황에게 인준을 요청했다.

하지만 교황과 다른 고위 성직자들이 그 엄격함이 과하다고 생각해 반대,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거절당했다.

 

그러다가 1240년 클라라는 한 차례의 기적과도 같은 일을 행하게 된다.

아시시에 사라센의 대군이 쳐들어왔고, 아시시의 시민들과 수도회의 가족들은 커다란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에 클라라는 깊은 병으로 자신의 몸조차 가눌 수 없었지만 성체께 의탁해 기도하여 수도회의 봉쇄구역까지 쇄도했던 사라센인들을 물리친다.

기도를 마치고 몸을 일으킨 클라라는 성광(聖光)의 빛으로 적군들을 물리친 것이다.

 

그밖에도 라라는 오로지 복음에 대한 믿음과 확신으로 작은 빵 하나로 50여명의 수녀들이 먹기에 충분할 만큼 불어나게 했고, 많은 환자들의 병을 치유했다.

더욱이 1252년에는 병석을 떠나지 않고도 2㎞나 떨어진 성당에서 거행된 성탄 미사에 참례하는 기적을 보여준다.

이를 계기로 교황 비오 12세는 1958년 글라라 성녀를 TV의 주보로 선포했다.

 

클라라가 쓴 회칙은 1243년 또다시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거절됐으나, 오랜 뒤인 1252년 그녀는 프란치스코의 회칙을 근본적으로 받아들여 관상과 봉쇄 생활에 적용하는 고유한 회칙을 작성한다.

교회 역사 안에서 여성 수도자로서는 최초로 쓴 이 회칙은 결국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인 1253년 8월 9일 마침내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승인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뒤인 8월 11일 클라라는 세상을 떠났고, 알렉산델 4세는 2년 뒤인 1255년 그녀를 시성했다. 성녀가 평생을 머물며 기도와 단순한 삶으로 복음적 가르침을 살았던 성 다미아노 수도원 성당과 그 유해가 모셔져 있는 아시시의 성 클라라 대성당에는 오늘도 전 세계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단순한 삶, 가난하고 헌신적인 봉헌의 삶을 살았던 클라라 성녀의 삶은 신비였다.

비록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오직 수도원의 봉쇄 구역 안에서 평생을 살았던 성녀는 그러나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세상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삶의 신비는 바로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사랑에서 비롯되는 기도 안에 있었다.

 

물질과 쾌락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은 클라라 성녀의 삶에서 참된 기쁨은 어떤 것일 수 있는지 발견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된다.

 


 

축일 8월 11일 성녀 클라라(Cl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