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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영성으로 읽는 성인 성녀전]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by 파스칼바이런 2009. 3. 29.

[영성으로 읽는 성인 성녀전]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정영식 신부 ·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 엘리사벳 · 선교사

 

 

 

① 진리 위해 갑옷 버리고 나타난 용감한 영적 기사

 

2000년이 넘는 시간, 가톨릭교회는 예수 시대로부터 이어오는 참으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가 길다보니 그동안 풍파와 고난이 왜 없었겠는가.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수많은 이단이 등장했고, 심지어는 교회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하느님은 가톨릭교회를 사랑하시고 섭리하셨다. 세파에 흔들릴 때마다 위대한 성인을 보내 주시어 교회를 보호하셨다. 마르틴 루터가 교회 내에서의 개혁을 외면하고 교회 밖으로 뛰쳐나갔고 이로 인해 종교 분열이 극에 달했을 때, 교회엔 하느님이 보내신 희망의 등불이 있었다.

 

바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ST. Ignatius de Loyola, 축일 7.31)가 그분이다. 이냐시오는 1491년 바스크 지방에서 유명한 로욜라라는 고성(古城)에서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부모님은 모두 신심이 두터운 분이었다. 그러나 이냐시오를 수도자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냐시오 본인 역시 어려서부터의 꿈이 용감한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청년기의 그는 신앙보다 명예와 쾌락을 더 원했다. 그러나 오묘한 하느님의 섭리는 이 세속의 아들을 위대한 성인으로 만드셨고, 또한 진리를 수호하는 수도원의 창립자가 되게 했다.

 

스페인과 프랑스간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였다. 혈기 왕성한 기사 이냐시오는 전쟁에 참여했고, 큰 부상을 입는다.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회심이 일어나게 된다. 치료 중 그는 심심풀이로 여러 책을 뒤적거리다가 성인전과 샤르트르(카르투시오) 수도자 루돌프가 저술한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을 읽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종교 서적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수술 후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할 수 없이 조금씩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읽을수록 책에 푹 빠져 정신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의미와 영생에 대해 묵상했다. 현세의 허무함을 깨닫게 됐다.

 

이냐시오는 이후 몸이 회복된 후, 유명한 몬세랏 산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을 순례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성모 마리아 상본 앞에 무릎을 꿇고 하루 밤을 기도로 지샜다. 여기서 큰 초월적 변화 형성적 삶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그는 자신의 갑옷을 성당에 바쳤다. 화려한 기사 복장은 걸인에게 자선했다. 그 대신 자신은 고행의 복장을 하고 가까운 어떤 동굴 안에서 살았다.

 

그후 10개월 동안 고독한 가운데 오로지 기도와 극기의 생활을 이어갔다. 이와 같은 명상 생활을 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영신수련」이다.

 

전에는 현세의 명예와 환락만을 추구하던 그가 10개월간의 수양을 하는 동안 성령의 은혜로 완전히 회개의 삶으로 돌아선 것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특별한 사명을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국가를 보호하는 기사로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진리를 위한 영적인 싸움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냐시오는 그 첫 단계로 주님께서 수난하신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려고 했지만 당시 이슬람 제국의 확장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냐시오의 당시 나이는 33세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 이냐시오는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사제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조소를 받아가며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대학에까지 진학해 사제 수업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단자로 취급되기도 하는 등 많은 고난을 겪는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나는 예수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결박되기를 원합니다. 이만한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하고 말했다.

 

그러한 그의 희생과 인내는 뜻밖의 결실로 이어진다. 성 베드로 파브로와 훗날 동양의 대 사도가 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1529년의 일이다. 이냐시오는 이 두 명을 포함해 다른 제자 7명과 함께 묵상의 생활을 했으며 1534년 성모 승천축일을 기해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 성당에서 서원을 했다.

 

“자선과 청빈의 생활을 하겠습니다. 예루살렘 성지로 반드시 순례하겠습니다. 만약 순례가 불가능하다면 교황의 사도직에 봉사하고 헌신할 것을 맹세합니다.”

 

 

② 꺼져가던 불씨, 진리와 열정으로 불 태우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스라엘 성지순례가 꿈이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애타는 사랑의 열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당시는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자신의 소망을 잠시 뒤로 미룬다. 대신 자신의 서원에 대한 인가를 얻기 위해 로마로 갔다.

 

이 로마로 이르는 길에 이냐시오는 또다시 신비한 체험을 한다. ‘구원의 성도’ 로마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라스토르타’라는 소 성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바치고 있을 때였다. 이냐시오는 갑자기 황홀한 탈혼 상태에 빠졌다.

 

성부께서 나타나셨고, 그 옆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보였다. 예수께서는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시며 “로마에서 너에게 은혜를 주겠노라”고 하셨다. 이냐시오의 마음에는 환희가 가득 찼다.

 

이 계시는 사실이었다. 로마에 도착한 후, 모든 일이 이냐시오가 원하는 대로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이냐시오와 그 제자들 일행은 당시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알현을 청했는데 쾌히 승낙을 얻었다. 게다가 교황은 그들을 크게 환영해 주었다. 이쯤 되면 일은 다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다.

 

1540년 9월 27일, 그들의 수도회 예수회에 대한 인가가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내려졌다. ‘교회의 등불’ 예수회가 공식적으로 교회 안에서 인가를 받고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후 예수회는 가톨릭교회의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늘 앞장서서 활동하게 된다. 교회의 앞을 비춰주는 등불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회는 종래의 다른 수도회와 달랐다. 우선 교황에게 특별 순명을 서원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용감한 병사로서 그 영적 왕국을 위해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분투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당시는 극단적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마르틴 루터 등으로 인해 가톨릭교회가 심한 위기를 겪던 시기였다. 이때 이냐시오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교황에 대한 순명을 약속하고 진리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이처럼 예수회가 교회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었던 그 기저에는 이냐시오의 ‘겸손’이 있다. 이냐시오는 수도회 인가 직후, 겸손한 마음으로 총장직을 사퇴하려 했다. 하지만 교황이 직접 명령해 이냐시오는 이후 15년간이나 총장직에 있으면서 회원들을 지도했다.

 

실제로 이냐시오는 참으로 겸손했으며, 특히 검소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그가 얼마나 가난하고 철저하게 살았는지는 그의 보잘것없는 책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책상 위에는 성경과 준주성범 등 몇 권의 책뿐이었다.

 

또 매일 3~4시간밖에 잠을 자지 않았으며, 그렇게 모은 시간에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극기의 삶을 살았다. 매일 소박한 음식에 만족했고, 때로는 몇 개의 구운 밤으로 식사를 때울 때도 많았다.

 

그런데, 대체로 이토록 엄격하게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한 삶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냐시오는 달랐다.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했으나 타인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다. 온순하고 사랑에 가득 찬 웃는 얼굴로 대했다. 제자들에게도 고행은 완덕에 있어 중요한 것이지만 건강을 해칠 정도로 가혹히 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했다.

 

이러한 그의 삶이 있었기에, 그가 말하고 그가 행동하는 것은 큰 힘이 있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여러 개신교의 도전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했으며, 묵상 운동을 일으켰다. 또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헤매는 많은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고 냉담한 마음속에 정열을 북돋워 주었다.

 

그렇게 일생을 보낸 이냐시오는 1556년 7월 31일 로마에서 무수한 덕행과 공덕으로 장식된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치게 되었다. 그 공덕과 무수한 기적으로 인해 이냐시오는 1622년에 시성되었고 피정과 영신 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이냐시오라는 이름은 ‘타는 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그는 타오르는 불이었다. 교회의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교회는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참으로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도구였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루카 12,49)

 

 

③ 고통 중에 함께 계신 하느님을 만나십시오

 

 

대체로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힘들게 살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노인 세대가 시대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낸 듯 하고, 50대 장년층도 자신들이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말한다.

 

요즘 청년들도 취업난 등으로 스스로 가장 힘든 시기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살아온 과정이 역사적으로 가장 격동기였으며, 가장 험난한 시기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회 창설자인 성 이냐시오가 살았던 시기만큼, 험난했을 때가 또 있을까 싶다. 1491년에 탄생해 1556년까지 살았으니, 65년간 살았다. 이 시기는 소위 종교 분열이 일어났던 시기다. 1500년 가까이 한 신앙 안에서 이어오던 로마 가톨릭교회가 수십 수백 교회로 갈라지는 단초가 생겨나던 시기였다. 말 그대로 분열과 혼돈의 시대였다.

 

루터가 태어났을 때, 이냐시오는 8세의 소년이었다. 종교 분열의 또 다른 한 축이었던 쯔빙글리가 태어났을 때 이냐시오는 7세였다. 이냐시오는 또 장로교의 시조로 여겨지는 칼뱅과 영국 성공회의 창시자인 헨리 8세보다는 18세 동생이다. 영국 성공회에 저항하다 순교한 성 토마스 모어 보다는 13세 동생이다.

 

여기서 잠깐 종교 분열의 결정적 역할을 했던 루터에 대해 알아보자. 루터는 가톨릭에서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22세 때는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24세때 사제품도 받았다. 그러던 그가 고민에 빠진다. 수도생활도 많이 하고 사제도 됐지만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는 것이 참으로 어렵게 느껴졌다. 완덕을 수양하는 것도 어려웠다. 육신적으로 다가오는 정욕에 대한 유혹도 받았다. 정욕에 대한 유혹을 받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이는 루터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경험하는 일이다. 유혹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본능적인 성적 에너지, 정신적 에너지, 영신적 에너지를 다 느끼도록 되어 있다. 모두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영적인 에너지는 못 느껴서 문제라면 성적인 에너지는 너무 강하게 느껴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루터는 이러한 문제와 함께 더 큰 고민도 안고 있었다. 바로 인간의 의화(義化)에 대한 문제였다.

 

우리가 성화되고 완덕에 도달하고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과연 인간 노력이 중요한가, 아니면 하느님의 은총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였다. 물론 우리는 이 두가지 모두가 함께 중요하다는 것을 지금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 루터는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주시하면서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더 중요하다는 신학적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런 시점에 당시 교황 레오10세는 (앞선 교황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문제이긴 했지만) 성베드로 대성전 재건을 위해서 전대사를 반포했다. 이는 자칫 전대사 남발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는 문제였다. 이에 루터는 나름대로 이 문제는 잘못됐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 문제의 잘못을 지적하는 공개서한을 보내는 등 본격적으로 교회가 갈등 관계에 서게 된다. 이후 봇물이 터지듯 반 가톨릭적 움직임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혼돈 시대의 중심에 수용과 겸손, 치열한 완덕을 갈망하는 삶을 살았던 이냐시오가 있었다. 따라서 이냐시오의 삶과 영성을 살펴보는 것은, 이념과 가치의 혼돈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크게 도움이 된다.

 

영주의 아들로 태어난 이냐시오는 젊은 시절까지 노는 것을 좋아했던 평범한 부잣집 아드님이었다.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속 쾌락 등을 추구하며 살았다. 그런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쾌락에 흥미를 잃게 되면, 그 다음에는 명예에 눈을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이냐시오도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에 기사 직분으로 참여하게 된다. 영주의 아들인 그는 전쟁에서 명예롭게 싸웠다. 그런데 이때 이냐시오의 인생에 결정적 전환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폭탄이 그의 옆에서 터졌는데 다행히 다리 부상만 입고 목숨을 건진 것이다. 이냐시오는 병원으로 후송됐다. 혈기왕성한 그였지만 꼼짝없이 침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의 은총은 대체로 인간이 고통중일 때, 또 인간이 조용히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을 가질 때 찾아오신다. 그리고 그 은총 속에서 섭리하신다.

 

 

④ 명예 · 권력 버리고 한평생 하느님 위해 살아

 

 

돈 많고, 잘생기고, 명예심 가득했던 자신만만하던 청년 이냐시오가 지금 전쟁 도중 입은 부상 때문에 병원에 누워 있다.

 

이때 이냐시오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읽게 되는데 그 책들은 신앙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냐시오는 이 책들을 통해 세속적으로 추구했던 쾌락과 명예가 모두 껍데기임을 알게 된다.

 

이냐시오는 또 이 시기에 성인전도 많이 읽었는데 특히 베네딕토 성인에 대한 전기를 읽었지 않았나 짐작된다. 왜냐하면 나중에 퇴원한 후에 곧바로 베네딕토 수도원을 순례하였기 때문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이냐시오보다 1000년 전 사람이다. 그 10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하느님의 섭리가 베네딕토를 통해 이냐시오에 닿고 있는 것이다. 신비롭지 않을 수 없다. 이냐시오 성인은 또 성모님 상본을 가지고 밤샘 기도하는 도중에 특별한 영적 깨달음도 얻게 된다.

 

영(마음)이 바뀌면, 행동도 달라지는 법이다. 이냐시오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화려한 갑옷과 옷들을 모두 내놓는다. 그리고 자신은 초라한 옷 한 벌만 걸친 채 동굴로 향했다. 시설이 잘 갖춰진 성체 조배실에서 1~2시간 기도하는 것도 힘들어 엉덩이를 들썩들썩 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동굴에는 벌레도 많고 추위와 굶주림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짐승들의 위협도 큰 걱정거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냐시오는 과거 쾌락과 명예만 추구했던 세속적 삶을 참회하며 10개월간 고난을 이겨내며 명상에만 잠긴다. 이때 처음으로 구상되고 집필되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유명한 ‘영신수련’이다.

 

이제 이냐시오는 “아~ 하느님의 뜻이 이렇게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구나!”,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하면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웃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어떻게 하면 알릴 수 있을까” 등에 대해 묵상과 관상을 하게 됐다.

 

그리고 동굴에서 나와 30살의 늦은 나이로 신학교에 입학, 46세에 사제가 된다. 혹자는 46세 사제서품을 두고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니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김대건 신부님은 1년밖에 사제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도 영원한 사제의 표상으로 공경받고 있다. 사제는 언제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내면이 영적 모습으로 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50년을 살면 뭐하고, 60년을 살면 뭐하겠는가. 사제 각자가 내적으로 어떤 모습인가가 중요하다. 이냐시오는 동굴에서 자신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확실하게 알았고, 그 깨달음으로 사제가 됐다. 46세 나이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제 이냐시오는 이후 20여 년간 빈민들을 구제하는 등 본격적으로 하느님 일을 해 나가게 된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일은 바로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창설한 것이다. 이냐시오는 이 예수회를 통해 교회를 다시 초월적으로 변화시키고, 사회도 변화시키게 된다. 더 나아가 예수회는 베드로 사도로부터 이어 내려오고 있는 교황님의 역할과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부각시키는 중요한 역할도 하게 된다. 특히 교회를 국가 권력에 예속시키고자하는 잘못된 세속적인 생각들에 대해 과감하게 대처해 나갔다.

 

이러한 예수회의 업적은 모두 이냐시오의 영적인 영향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냐시오는 예수회 창설 이후에도 스스로의 내면형성을 위해 검소하고 엄격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하루 3~4시간밖에 잠을 자지 않으며 묵상과 수련에 힘썼다. 또 이웃에 대해선 늘 상호 형성적 삶이 되도록 관용적이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대했다. 또 총 6500여 통의 편지를 통해 세계 형성적 차원에서 모든 이들을 사랑하고 끌어안는 모습을 보였다.

 

하느님은 명예심과 권력욕 넘치던 이냐시오를 특별한 방법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끊임없이 인도하셨다. 이냐시오는 이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했고, 모든 생애를 바쳐 하느님을 위해 살았다.

 

우리에게도 이제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종교관,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다. 신적신비를 더욱더 새롭게 체험해나가는 이런 우리들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청해야겠다. 그리고 매일 매일의 삶이 영신수련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길 청해야겠다.

 

단순히 이냐시오 성인을 공경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분이 제시한 영신수련에 진정한 맛을 깨닫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