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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수도회 창설자편 / 성 이냐시오

by 파스칼바이런 2009. 3. 29.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수도회 창설자편 / 성 이냐시오

 

 

 

기사의 검 성모마리아께 봉헌

부농집안서 기사의 꿈 키워

신심서적 읽고 회개의 길로

 

 

『영혼의 영원한 복락을 위한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이 주는 중요성은 지난 3세기 동안 증명되었으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증거, 다시 말해서 짧은 시간에 고행의 길과 경건함의 실행을 스스로 구분할 수 있게 되는 증거에서 증명되었습니다』(교황 레오 13세).

 

「예수회」 창설자이면서 그리스도교 영성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영신수련」 저술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의 깊이를 심화시켜 주고 있는 영신수련의 수호성인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

그는 예수회원들과 함께 깊은 종교적 영성적 영역에 대한 갈등과 교회 지도자 구성원들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던 당시 교회 상황에서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부흥에 위대한 공헌을 남겼다.

 

무엇보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예수회 영성의 유산인 동시에 기도의 지침서 역할을 해왔으며 회원들은 이를 통해 구세사의 신비를 보다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는 식견을 지니면서 세상의 사도로 살아가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예수회의 사도직은 이러한 「영신수련」의 정신과 함께 「활동하는 가운데 관상하는」(Contemplativus in actione) 성소에 힘입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활동중 관상」이라는 그의 영성은 교회안에서 평신도들의 역할이 점차 커지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신앙과 생활을 통합시켜 줄 수 있는 평신도 영성의 중요한 포인트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이냐시오는 1491년 스페인 키푸스코아 지방의 아스페이티아읍 위쪽 로욜라 성에서 벨드란 이바네즈와 마리나 사에즈의 막내로 태어났다.

로욜라 가문은 바스크 지역의 귀푸즈콰 지방의 부농들 중 하나로서14세기 이래로 귀족의 계급에 올라 있었다. 당시 귀족들이 카스틸리엔 왕가에서 공을 쌓아 부와 명예를 넓혀가려 힘썼던 상황에서 바스크 지역 출신이고 카스틸리엔 궁중 기사 출신이라는 그의 성장 배경은 훗날 수도회 총장으로 사는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즉 예수회의 이념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고 설정한 그의 이상은 「좀 더 높고 위대한 큰일들」을 추구했던 기사도 정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13세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당시 궁정 재무를 담당했던 친척 돈 후안 벨라즈퀘즈 드 궤라의 집으로 가게 됐던 이냐시오는 그의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궁정 기사로서의 소양을 익혔고 또 왕가 문서국에서 일하기 위한 자질을 익혔다.

 

이 시기에 이냐시오는 세속적인 것과 영성적인 것의 극단의 다른 두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 하나는 프란치스코수도회 정신에 따른 전통과 직접적 관계를 맺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르네상스의 정신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이냐시오는 후에 이때부터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했는데 그런 고백만큼 그는 최신 유행 헤어스타일과 새로운 의상을 즐겼으며 격투기 같은 것에도 큰 관심을 보였고 궁중 내 수많은 여성들과도 염문을 뿌렸다.

 

이냐시오가 이러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벨라즈퀘즈 데 궤라 가문이 몰락하고 1517년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다.

날아든 포탄 파편으로 한쪽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던 그는 수술후 회복기를 갖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고르다 신심 깊은 형수가 지니고 있었던 루돌프 폰 삭센의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전」을 접하게 됐다.

 

기사들의 영웅담이나 연애 소설에 길들여져 있던 이냐시오에게 이러한 신심 서적은 아주 낯 설은 것이었으나 내용을 접할수록 그 깊이에 빠져 들었고 마침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다.

기사로서의 공상들은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 뿐이며 아무런 대가도 만족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만이 기쁨과 평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 앞의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이었고 후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느끼게 됐다.

 

이런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했으며 지난 날의 생활에 대한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에 커다란 위안을 얻은 이냐시오는 마침내 성인들이 살아간 것처럼 채소만 먹고 엄격한 고행을 하면서 맨발로 예루살렘을 순례하기로 결정했다. 회심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이후부터 이냐시오의 내면세계는 점차 변해갔다. 예루살렘 순례를 위해 조금씩 준비를 해나갔고 기도 독서와 함께 예수의 생애와 성인들의 삶을 따라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것들을 세심하게 기록해 나갔다.

 

1522년 로욜라 성을 떠난 이냐시오는 당시 중요 성지 순례지중 하나였던 「몽세라」에서 총 고해성사를 했으며 자신이 입고 있던 기사의 갑옷과 무장을 거지에게 주고 대신 포대로 짠 두루마기를 걸쳤다. 그리고 기사의 상징인 장검과 단검을 성모마리아께 봉헌했다.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라고 불렀으며, 「예수회 기본법」을 작성해 1539년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잠정 인가를 받았다.

 

 

영혼 돕기 위한 영적활동 펼쳐

뜻맞는 이들과 예수회 설립

‘영신수련’ 저술해 영성심화

 

1522년 3월 25일 몽세라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Mannresa) 마을 근처의 동굴로 거처를 옮긴 이냐시오는 이때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신한다.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거친 음식으로 연명하며 미사와 성무일도를 드리는 것 외에는 하루에 7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생활을 했던 그는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했고 그러한 경험들은 「영신수련」을 저술하는 기본적 토대가 되었다.

 

이듬해 2월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떠났다. 여러 차례의 폭풍을 만나야 했고 전쟁과 페스트가 난무한 지역들을 통과해야 하는 등 1년여 이상의 노력을 들이는 어려운 과정이었다.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로 여겨졌던 당시 상황에서 이를 감행한 내적 동기에 대해 이냐시오는 『나를 위해 인간이 되신 예수를 알아 그를 사랑하고 따르고자 한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예루살렘에 계속 남아 사람들의 영혼을 돕고자 했으나 전쟁으로 인한 위험한 상황 때문에 성지 관리를 담당하고 있던 교회 장상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고 말을 듣지 않으면 파문에 처하겠다는 위협을 가해오자 이냐시오는 팔레스티나에 영원히 머물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돕고자 했던 뜻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예루살렘을 떠나며 이냐시오가 결심한 것은 「영혼들을 돕기 위해 일정 기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으로 연학(硏學)에 돌입한 이냐시오는 이후 알칼라 대학, 살라망카 대학을 거쳐 파리에서 학교를 다니는 등 11년 동안의 공부 기간을 가졌다.

공부에 대한 열망과 함께 가난한 사도로서 사는 삶을 동경했던 이냐시오는 만레사에서 영적 상담을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자신이 체험한 것으로써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시도였다.

 

이냐시오의 그러한 활동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고 종교 재판관들의 오해를 불러일으켜 살라망카 파리 베네치아 로마 등에서 수차례 구속 심문 재판을 받는 과정이 이어졌다.

알칼라에서는 두달 간 감옥 생활을 했고 또 동료와 함께 사슬로 발이 묶인채 감옥에 갖히는 일도 있었다.

파리에서는 성 바르나바 대학의 학장에게 공개적으로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오히려 이냐시오를 더욱 굳건히 단련시켜 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편 이냐시오는 공부를 하는 동안 여러 동료들과 함께 단체를 설립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뜻이 맞는 동료들끼리 서로 도우며 활동하게 되면 영혼들을 돕는데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확신을 지니게 됐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동료가 된 사람은 사보옌 출신의 페테르 파베르와 나바라 출신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 그리고 포르투칼 출신의 시몬 로드리게즈와 스페인 출신의 디에고 라이네츠 등이 합류했다.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베네치아에서 사제품을 받은 이냐시오는 그해 겨울 동료들과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갔는데 이때 로마 근교 라 스토르타(La Storta)라는 마을 경당에서 환시를 체험했다. 성부께서 이냐시오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자리에 있게 해주시고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내용이었다.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자신들을 「예수회」(Compania de Jesus, 예수의 동반자)로 부르는 가운데 「예수회 기본법」을 작성한 이냐시오는 1539년 9월 3일 교황으로부터 잠정 허가를 받는 한편 1540년 9월 27일에는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 교서가 발표됐다.

 

그 이듬해 4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된 이냐시오는 4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로마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 서원을 했다.

1541년부터 이냐시오가 선종하던 해인 1566년까지 예수회는 사도적 활동에서 많은 열매를 맺었고, 회원수는 이미 1000명에 육박하는 왕성한 성장세를 보였다.

 

이냐시오는 총장 선출 후 많은 편지를 썼던 것으로 알려진다.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6000여통의 편지들은 수도회내의 내 외적 성장과 관련된 사항들을 비롯 교회 쇄신에 관한 것들이 많았다. 수신자들은 당시 시대를 이끌어 가던 사람들, 추기경들 그리고 주교들이었으며 무엇보다 각지에 흩어져 사도적 활동과 영적 생활에 전념하고 있던 동료들이 주 대상이었다.

 

1556년 7월 31일 로마에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냐시오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됐고 1622년 3월 12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됐다.

그가 설립한 예수회는 현재 최대 규모의 수도회로서 2만여명 회원들이 127개국에서 활동 중이다. 회원들 중 복자 성인품에 오른 이들도 많아 2005년 현재 복자가 146명, 성인이 48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