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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성 이냐시오 로욜라 사제 / 배문한 도미니꼬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09. 3. 29.

성 이냐시오 로욜라 사제

배문한 도미니꼬(수원 가톨릭 대학장 · 신부)

 

 

 

예수회의 창설자요 초대 총장인 이냐시오는 1491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로욜라 성에서 영주의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의 꿈인, 용감한 기사로서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전쟁에 자주 참가하였다. 스페인과 프랑스가 싸우던 때 30세의 몸으로 출전한 그는 다리에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때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자 가까이 한 것이 “예수의 생애”와 “성인들의 꽃”이란 책이었다. 처음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읽으면서 점점 그 책에 매혹되어 성인들의 단식, 밤샘, 희생과 극기 생활에 감동하게 되었다. ‘성 프란치스꼬와 성 도미니꼬가 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것을 다짐하였다.

 

1522년 그는 완쾌하자 몬세라뜨의 성모 성지를 순례하고 철야 기도를 한 다음 애지중지하던 칼과 갑옷을 성모상 앞에 봉헌하고 기사복을 걸인에게 주고는 일생을 가난하고 정결하게 살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만레사의 꼬르도네 강변 동굴에서 10개월간 기도와 고신극기의 생활을 통해 소명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 그의 걸작이며 시대를 초월하여 읽히는 “영신수련”의 골자를 완성하였다. 그가 이 만레사에서 깨닫게 된 소명은 국가를 위한 군인보다 교회를 지키는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첫 단계로 순례를 계획했으나 예루살렘에서 이슬람 교도들의 횡포가 심해 단념해야만 했다. 사제가 될 것을 결심한 그는 3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린 꼬마들 틈에 끼어 라틴어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론보다는 실천가였던 그는 자신의 생활에서 얻은 영성 체험을 자주 이야기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이단자로 몰려 감옥에 갇힌 일도 있었다. 당시 교회는 마르틴 루터 등의 이단설로 혼란하던 때였지만, 교회에 대한 항구한 충성과 참 믿음이 그 오해를 풀도록 해주었다.

 

바르셀로나, 알칼라, 살라만카 등 여러 대학에서 11년 동안 공부한 그는 1534년 파리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성모 승천 축일 파리 몽마르뜨르 성당에서 여섯 명의 동지들과 함께 정결 및 청빈 서원을 하였다. 이들 중에는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와 성 베드로 파브르도 끼어 있었다. 이들 7인의 형제들은 성지에 가서 터키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터키와 베니스 사이의 전쟁으로 성지 순례가 불가능해지자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대신 교황께 수도회의 앞날을 맡기기로 했다.

 

1537년 형제들은 걸어서 로마에 가기로 결정했다. 로마 근교 라 스또르따 성당에 도착했을 때 이냐시오는 현시를 체험하게 된다. 예수께서 “로마에서 너에게 은혜를 주겠노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냐시오는 이 현시 순간부터 그들의 모임 이름을 “예수회”로 정했다고 한다. 성직권이 없었던 형제들은 1537년에 모두 사제로 서품되었었다. 로마에 도착한 뒤로 이냐시오는 사람들에게 영신수련 등을 지도하면서 교황을 알현하기를 기다렸다. 그 동안에 루터파로 몰려 박해를 받기도 하였으나 곧 그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마침내 교황 바오로 3세를 알현한 후 구두로 수도회 승인을 받고 1540년 9월 27일에 교황 칙서를 통해 예수회는 탄생되었다. 1541년 극구 사양했지만 형제들의 부탁으로 총장직을 수락하고, 15년간 로마에 머물면서 회원들을 지도하고 예수회를 확장시켜 나갔다. 예수회가 종래의 다른 수도회와 비교되는 점은 교황에게 특별 순명을 서원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용감한 병사로서 정통 신앙을 보호하고,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영적 왕궁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의 이단자들에 의해 파괴되려는 교회를 복구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이냐시오는 진정한 신비가였고, 그가 저술한 “영신수련”은 지금까지도 모든 수도자 및 사제들에게 읽히는 등 영성의 대가였다. 그의 이상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었다. 그에 의해 창설된 예수회 역시 이를 모토로 정하여 어떤 활동을 하든지 교회에 대한 사랑을 우선하고 교황께 순명한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예수회는 당시 어지럽던 교회와 사회 속에서 교회를 내부로부터 개혁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들을 반박, 가톨릭을 옹호하는 한편, 새로 발견된 낯선 땅에 복음을 전하고 특히 교육을 중시하여 많은 대학을 설립하였다. 1551년에 로마 대학, 1552년에 독일 대학이 이냐시오와 예수회에 의해 세워졌다. 이냐시오가 선종할 당시 1천여 명의 회원, 12개 관구, 1백여 개의 분원이 생길 정도로 확장되었고, 이는 예수회의 교회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냐시오는 1556년 7월 31일 로마에서 65세로 선종하고, 1609년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622년 그레고리오 15세 때 시성되었다. 축일은 7월 31일이며 1922년 비오 11세에 의해 영신수련의 주보로 선포되었다. “지기추상 대인춘풍”(指己秋霜 待人春風) 이란 말이 있다. 자신에겐 엄하고 남에겐 부드럽게 대한다는 말로서, 이냐시오는 참으로 그렇게 살았다. 우리 역시 그를 본받고, 그의 좌우명처럼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