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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성 이냐시오와 십자가 성요한의 영적 과정에 대한 가르침에....

by 파스칼바이런 2009. 3. 29.

성 이냐시오와 십자가 성요한의 영적 과정에 대한 가르침에

나타난 '영혼의 정화'에 대한 관점 비교

(LA “VITA PURGATIVA” DEGLI “ESERCIZI SPIRITUALI”

DI S. IGNAZIO DI LOYOLA E LA “SALITA-NOTTE”

DI S. GIOVANNI DELLA CROCE)

 

 

 

 

 

1. 본 논문의 동기

 

이 논문을 집필하게 된 첫 번째 동기는 복음적 삶의 최종 목적으로써 선포하신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인 “마음이 깨끗한 자는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Mt 5,8)라는 구절이 필자의 마음에 반향을 일으켰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을 뵙게 된다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을 뵙기 위해서 마음의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하고, 자기 자신과 자기 이기심, 자기 관심사로부터 벗어나 마음이 순결하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깨끗한 마음에로 초대하는 주님의 말씀은, 한편으로는 영혼의 정화를 통해 하느님을 뵈올 수 있다는 희망으로 다가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과의 합일을 방해하는 장해물들을 극복하고 마음의 순수함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 길을 찾도록 이끌었다.

본 논문을 쓰게 된 또 다른 동기는 현재 한국 교회 안에 비그리스도적인 기도방법들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그리스도교와 비그리스도교의 영성 생활의 차이를 혼동하면서 혼합주의의 오류와 위험으로 나아가고 있다. 특히 종교체험을 갈망하는 일부 평신도, 성직자 수도자들 사이에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의 참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신흥영성운동 , 동양종교나 정신분석학에서 제시하는 수련들을 받아들임으로써 혼합주의의 위험을 간과한 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참된 진리의 길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리의 빛과 교회의 참된 전통 위에 기초한 영성 생활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동기로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에 대한 올바른 영적 가르침을 제시한 두 스승인 성 이냐시오와 십자가의 성요한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 두 스승은 특별히 영성 생활에서 정화의 필요성, 영혼의 순결과 그것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성 이냐시오와 십자가의 성요한의 사상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보편성을 획득하여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의 여정을 기술하는데 지대한 공헌과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두 성인의 영성 생활의 여정에 대한 가르침을 탐구하고 이러한 가르침 안에 나타난 영혼의 정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응답을 탐구하는데 그 핵심을 두고 있다.

 

정화란 무엇을 말하는가?

왜 영성생활의 기초로서 정화가 필요한가?

무엇이 정화되어야 하는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영혼은 정화되는가?

정화의 완성, 도달점이란 어떤 것인가?

 

 

2.  연구 방법과 논문의 구조

 

이러한 탐구를 위해서는 두 성인의 가르침 안에서 영혼의 정화에 대한 통합적인 윤곽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이냐시오 성인은 그의 핵심저서 “영신수련 ”에서 “정화의 생활” 혹은 “정화의 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십자가의 성요한은 그의 책 “깔멜의 산길”과 “어둔 밤”에서 영혼의 정화에 대한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두 성인은 “정화의 길”에 대해 전통적이고 상징적인 용어 “Vida purgativa” “Subida-Noche” 사용하여 표현하였는데 이 두 용어가 두 성인의 영혼의 정화에 대한 통합적인 윤곽을 찾게 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성인에 의하면 영혼의 정화는 영혼 발전의 초보단계에서만 정화가 한정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보단계 더 나아가 완덕 단계까지 지속되는 것임을 명시적-암시적으로 주장하였다. 따라서 우선 분석적이고 종합적인 방법으로 두 성인이 어떻게 영혼의 정화가 영적 과정의 초보단계 뿐만 아니라, 진보, 완덕 단계까지 계속해서 이루어지게 되는지를 규명하였다. 또한 두 성인의 가르침에서 나타난 정화의 필요성과 목적, 정화의 내용과 과정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고 이어서 비교하는 방법을 통해서 두 성인의 정화의 가르침이 어떻게 유사하고 다른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비교를 통해 드러난 결과에 기초하여 두 성인의 가르침이 오늘날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에 어떻게 실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를 결론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래서 본 논문의 1장에서는 두 성인의 가르침이 정초하고 있는 영적 생활의 전개 과정을 다루었다. 전통적으로 영혼의 진보과정은 세가지 길, 예컨대 “정화의 길”(Via purgativa), “조명의 길”(Via illuminativa), “일치의 길”(Via unitiva)로 알려졌다. 두 성인은 모두 이 이론을 근거로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영혼의 발전과정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전통적으로 주장되는 영혼의 진보과정을 제1장에서 다루었다.

논문의 제2장에서는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정화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예컨대 정화의 생활은 비단 영신수련 1주간에서 뿐만 아니라 2,3,4주간, 그리고 영신수련의 마지막 묵상인 “사랑을 얻기 위한 명상”에서 까지 어떻게 지속되는가를 분석하였고 특별히 정화의 필요성과 목적, 내용과 과정에 초점을 두면서 동시에 성인이 사용한 중요한 개념들의 분석도 시도하였다.

제 3장에서는 제2장에서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십자가의 성요한의 정화에 대한 가르침을 분석하였다. 특별히 그의 핵심 저서, “깔멜의 산길”, “어둔 밤”, “영적 찬가”, “사랑의 산 불꽃”을 분석하여 영혼의 능동적 수동적, 그리고 감각과 영의 정화의 과정을 기술하였다. 제2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요 개념들을 분석하면서 정화의 필요성과 목적, 내용과 과정에 초점을 두었다.

제 4장에서는 2, 3장에서 분석한 두 성인의 영혼의 정화에 대한 가르침을 비교하였다. 예컨대 정화에 대한 개념과 목적, 내용, 방법, 과정들을 비교하면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의 보편적인 면과 두 성인의 영성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특수한 면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비교는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의 명료성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준다.

결론에서는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하나의 도움과 빛을 제공하기 위해 두 성인의 정화에 대한 가르침이 어떻게 영성 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3.  두 성인의 정화에 대한 가르침의 전개

 

두 성인의 가르침은 영혼의 정화과정은 모든 영성생활의 여정에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두 성인의 가르침은 그들의 영성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특별한 관점 때문에 똑 같은 방식을 취하여 전개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비교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특별히 세가지 중요관점을 통해 두 성인의 가르침의 흐름을 요약해볼 수 있다: 정화의 출발점, 정화의 과정, 정화의 도달점

 

3.1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정화의 출발점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 생활의 전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에 있다. 예컨대 인간은 하느님의 크심과 인간을 향한 그분의 자비와 선성을 깨닫고 그 사랑에 응답하도록 초대되었고 권능과 능력이 부여되었다 . 이러한 사고는 그의 저서 ‘영신수련’의 ‘원리와 기초’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사람이 창조된 것은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고 섬기며 또 이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다” . 예컨대 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하고 봉사함으로써, 하느님으로 받은 모든 것을 그분께 되돌려드리고, 이러한 응답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고 동시에 영혼은 구원된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봉사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의 삶을 정리되고 오르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응답할 수 있도록 영혼이 정화되는 것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죄를 유발시키는 ‘무질서한 애착’이다. 이러한 무질서한 애착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부여된 능력이 무질서에 빠지게 되고 의도적, 반의도적으로 하느님께 상처를 입힌다. 예컨대 인간의 모든 활동들, “지향과 행위가 오르지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찬미를 지향하도록” 정화되어야 한다 .

성인께서는 이러한 정화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영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모든 사물의 우상화의 위험을 극복해주는 중용의 법칙(Tantum-quantum)을 따라 선택을 취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사람은 사물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면 그 만큼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또 방해가 되면 그만큼 배척해야 할 것이다” . 이러한 영혼의 내적 자유로써 정화된 상태가 우리 자신을 최고 목적에로 보다 더 인도하는 것을 선택하는데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강조된다.

 

정화의 과정

 

다른 영혼들을 돕기 위해서 이냐시오 성인께서 자신의 체험을 기초로 하여 집필한 ‘영신수련’의 과정은 영혼의 무질서한 애착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온전한 봉사와 찬미를 드리는 인간의 창조목적이 구현되고 현실화되도록 구성되었다. 예컨대 죄에 물든 인간 영혼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되도록 잘 짜여진 영신수련의 과정은 영혼의 정화과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4주간 수련으로 구성된 영신수련은 네 단계의 잘 조화되고 밀접히 연결된 영적과정으로써 다음과 같은 구성을 보이고 있다. 영신수련의 1주간은 죄와 무질서한 애착으로 추락된 영혼이 죄와 무질서로부터 쇄신되는 단계(deformata reformare)이며, 2주간은 쇄신된 영혼이 빛이신 그리스도의 생활과 일치를 추구하는 단계(reformata conformare)이며, 3주간은 그리스도의 생활과 일치된 영혼이 그 일치가 보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관상안에서 확고하게 되는 단계(conformata confirmare)이며 4주간은 확고히 된 영혼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변모되는 단계(confirmata trasformare)이다 . 예컨대 제1주간에서는 영혼은 죄와 죄로 직접적으로 인도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정화되어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하도록 준비되며, 제 2주간에서는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관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빛이 인간 영혼안에 침투되면서, 내면 깊이 뿌리 박힌 이기적인 동기들로부터 정화되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영혼은 보다 더 준비된다. 그리고 3,4주간에서는 연약한 인간본성들, 특히 인간의 감수성이 강화되고, 인간의 영적 능력들이 온전히 견고하게 되어,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확고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할 수 있도록 영혼이 정화된다.

이러한 정화의 과정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전개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비와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예컨대 첫주간은 구속자 그리스도의 신비, 두번째 주간은 생명의 그리스도의 신비, 세번째 내번째 주간은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정화의 도달점

 

성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인간의 모든 활동들, 예컨대 지향과 행위가 자기 자신, 자신의 관심과 욕구에서 탈피하여 순전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봉사하도록 준비될 때, 이 상태가 정화과정의 도달점이다. 예컨대, 여기서 인간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되도록 준비된 상태가 되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사랑과 봉사의 응답을 드리게 된다. 그리하여 영혼은 받은 모든 은혜를 깨닫게 되고, 이러한 받은 은총에 대한 깊은 인식은 모든 것 안에서 엄위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봉사할 수 있게 한다 .

이러한 상태는 바로 상호적인 사랑의 충만성과 온전성이 완성되는 상태이다. 예컨대 하느님 사랑의 온전성은 모든 것 안에서 현존과 능력, 그리고 본질을 통해 드러나고, 이러한 온전한 사랑의 깨달음은 자기 자신의 온전한 봉헌으로 하느님께 응답하게 된다. 이제 더 나아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봉사를 드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목적에 도달될 수 있도록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히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이 이제 우리 안에서도 충만히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은 온전히 구원과 자기 자신의 존엄성에 도달하게 된다.

 

3.2 십자가의 성요한

 

정화의 출발점

 

십자가의 성요한에 있어서 영성생활의 전제는 인간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 은총의 현존이다. 당신의 현존을 인간에게 선물하시는 이유는 인간을 당신과의 합일로 이끌기 위해서이다. 예컨대 인간은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해 창조되었다. 따라서 “하느님과의 합일”되기 위한 준비로서 영혼은 정화되어야 한다. 예컨대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해방되고 하느님 은총에 개방되어 하느님과 일치에로 나아가기 위해 준비로서의 영혼의 정화가 필요하다. 결국 영혼이 잘 정화되고 준비될수록 영혼은 하느님과 더 가까이 합일에 이를 수 있다.

십자가의 성요한의 경우 정화의 필요성에 대한 철학적-신학적 근거가 강조된다. 예컨대 죄와 거룩함이라는 두가지 상반된 것들이 한 주체에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혼이 어둠에 휩싸여 있는 한 절대로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일 수도 빛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성요한이 “어둠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5)고 말씀하듯이 빛과 어둠은 서로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

더 나아가 성인께서는 그의 저서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면서 정화의 필요성에 대한 복음적 근거를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르 8,34) . 예컨대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하나되고 영성생활의 모델인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영혼의 정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바로 영혼의 정배이신 성자 하느님과의 일치이며 성자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 성부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정화의 과정

 

십자가의 성요한은 그의 저서 “깔멜의 산길”과 “어둔밤”에서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기 위해 영혼은 자연적인 빛을 벗어버리고 초자연적인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둔밤”을 지나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어둔밤”이란 정화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개념이다. 성인에 따르면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되는 과정을 어둔밤이라 부르는 이유는 다음의 세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보았다.

“첫째는 영혼이 나서는 출발점에서 그런 것이니, 이제까지 품고 있던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욕정을 부정하여 끊어버려야 하는 만큼, 이 부정과 끊음이 인간의 온갖 감성에게는 밤과 같은 것이다. 그 둘째는 영혼이 하느님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길, 즉 방법으로 보아 그런 것이니, 이는 곧 믿음, 이성에게 어두운 것인 만큼, 밤과 같은 것이다. 그 셋째는 종착점인 하느님으로 보아 그런 것이니, 하느님께서는 더도 덜도, 이승에 있는 영혼에게는 어둔 밤일 따름인 것이다”

성인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정화의 과정이 어두운 이유는 정화의 과정이 다름아닌 초자연적인 신적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연적인 영혼의 빛을 상실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자가의 성요한이 말하는 어둔 밤은 죄가 가져다 주는 어둠과는 근원적으로 차이가 있다. 죄가 가져다주는 어둠은 창조물에 대한 과도한 애착의 결과로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을 비참하게 하고 눈멀게 하는 어둠인데 반해, 십자가의 성요한이 말하는 정화의 어둠은 영혼의 비움을 통해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창조적인 어둠이다. 그리하여 어둔 밤의 과정을 통해 영혼은 죄와 잘못된 습관으로부터 새로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변화되고 이행된다.

성인을 정화의 과정을 한편으로는 수평적이며 동시에 수직적인 지평에서 생각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정화의 과정이 점차적인 내면화의 여정이며 동시에 상승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정화가 영혼의 내면화로 진행되는 관점은 정화의 대상(객체)이 영혼의 외부적인 기능으로부터 내부적인 기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선 영혼의 외부적인 기능인 감각들이 정화되고 이어서 내부기능인 영의 정화로 나아간다. 정화가 수직적인 상승으로 진행되는 관점은 정화를 시키는 주체가 처음에는 인간의 활동이 지배적이다가 점점 하느님의 활동을 통해 정화가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정화의 주체와 객체에 따라 정화의 과정은 4부분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능동적-수동적 감각의 정화, 능동적-수동적 영의 정화 .

 

정화의 도달점

 

정화의 마지막 도달점은 영혼이 능동적-수동적 감각의 정화와 영의 정화를 통해 영혼이 온전히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되도록 준비되는 상태를 말한다. 하느님과 영혼과의 합일의 상태와 과정에 대하여 성인은 그의 저서 “영혼의 찬가”에서 잘 기술하고 있다. 예컨대 이 저서는 하느님과의 합일을 영혼과 영혼의 신랑인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교환의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성인은 영혼과 하느님 사이의 최상의 사랑의 결합상태인 “영적 결혼”을 언급하고 있다. 이 상태에서 영혼은 변형일치를 통해서 하느님과 완전한 합일에 들어간다. 비록 하느님과 인간은 본성상 다르지만 하느님의 타오르는 불길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녹여, 하느님과의 사랑의 유사함에 도달하게 한다. 그리하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영혼을 소유하고 영혼 안에 거주한다. 이 상태에서 영혼은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는 지복직관이 아닌 여명의 어두움이 존재하는 형태로 하느님의 인격과 하느님과의 친교를 향유한다 . 예컨대 영혼은 성령의 사랑의 불꽃을 통해 신앙 안에서 믿는 바, 즉 영원한 생명을 보고 만지고 맛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영혼이 끊임없이 받은 은총을 통해 준비되고 또 다른 은총에 끊임없이 개방될 때 하느님과의 합일이 보다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과의 끊임없는 협력을 통해 영혼은 정화되고, 정화된 만큼 하느님과의 일치가 실현된다.

 

4.  두 성인의 정화에 대한 가르침의 특징

 

그리스도 중심적인 가르침

 

영적 생활의 여정은 聖性 에로의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로 불리웠다. 이러한 부르심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친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컨대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셨다 . 세례의 순간에 예수께서는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을 우리 영혼에 씨앗으로 심으시고, 그 영이 마치 육체적인 생명이 자라듯이 우리 영혼 안에서 점점 자라고 성장한다. 이러한 아들의 영이 성장해감에 따라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통교할 수 있고 이러한 통교는 바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삼위일체의 생명의 충만함을 함께 누리게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통적인 그리스도 중심성은 두 성인의 정화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그대로 전개되고 있다. 예컨대 성 이냐시오에게 영혼의 정화는 그의 영신수련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심화되고 그리스도안에서 정화가 완성된다 . 영신수련을 통해 그리스도가 피정자 안에서 육화되고, 그 육화된 그리스도가 하느님께 점점 개방적으로 응답하게 함으로써 하느님께 이끌어간다. 또한 십자가의 성요한도 영혼의 정화의 모델이요 핵심은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며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다름아닌 정화의 길로 강조된다 .

 

“세가지 길”에 기초한 영적 여정

 

영성 생활은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점점 성장하고 발전해간다. 여러 영성 작가들은 전통적으로 영성 생활의 여정과 그것의 역동성을 설명하기 위해 “세가지 길”(Tre vie)를 통해 영성 생활의 발전을 구분 지었다. 이것은 영적 체험의 3가지 특징적인 단계로서 “정화의 길”, “조명의 길”, “일치의 길” 혹은 “초보의 단계”, “진보의 단계”, “완덕의 단계”로 구분된다.

두 성인의 가르침도 당신들의 가르침을 용이하게 알아듣게 하기 위해 이러한 전통적인 구분법인 “세가지 길”이라는 틀에 기초하여 영적 여정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틀이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적 체험이나 고유한 자신의 영성에 기초하여 얼마간의 변형을 시도하면서 영성생활의 발전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예컨대 성 이냐시오의 경우 영성생활의 발전과정의 틀로서 “세가지 길”은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하기 위해 영혼의 정화를 기술하고 있으며, 십자가의 성요한에서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위해 영혼의 점진적인 정화에 초점이 맞춰진다. 예컨대 두 성인에게서 모두 영적 여정에서 정화의 길이 강조되지만 정화가 강조되는 이유는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성 이냐시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토대로서 정화의 단계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성요한은 하느님과의 온전한 합일을 위한 토대로서 정화를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르다.

 

모든 영적 여정 안에서 지속되는 정화

 

두 성인은 영혼의 정화가 영적 여정의 어느 한시기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여정의 모든 시기에 지속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예컨대 정화는 점점 심화되어 나타나는 영혼의 지속적인 하나의 과정이다.

초보자 단계에서 영혼은 주로 은총의 도움으로 죄와 죄와 죄와 긴밀히 결탁된 세력으로부터 정화된다. 이로써 영혼은 죄로부터의 회심을 통해 영성 생활 안으로 진입하게 된다. 진보자가 주로 걷게 되는 조명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닮고 따르는 향주삼덕의 실천을 통해 영혼이 그 자체로 죄는 아니지만 순수 자연적으로만 작용하려는 영혼의 이기적인 경향성으로부터 정화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빛이 보다 깊숙이 조명됨에 따라 보다 내밀한 순수 자연적이고 이기적인 경향성들로부터 영혼이 정화됨을 의미한다. 일치 단계에서 영혼의 수동성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 영혼은 온전하고 완전하게 정화된다. 이러한 완전한 정화의 상태에서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응답할 수 있고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두 성인에게 있어서 영혼의 정화는 단순히 정화단계에서만 한정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명단계, 일치 단계에서도 계속되는 영적 여정의 전 과정에 걸쳐 계속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정화가 계속됨에 따라 영혼은 한층 더 하느님의 활동에 개방적이 되어 보다 완전하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의지와 보다 완벽한 일치에로 나아가게 된다.

 

두 성인의 영성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차이점

 

영혼의 정화에 대한 두 성인의 주장이나 생각들은 기본적으로는 일치한다. 예컨대 영혼의 정화는 선사 받은 은총에 협력해가는 지속적인 과정이라는 점에서 두 성인의 주장은 일치하고 있다. 특히 두 성인은 선사받은 은총을 통해 능동적, 수동적으로 영혼을 정화시키는 수단들을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예컨대 영혼의 장애물에 대항하는 “능동적인 영적투쟁”, 그리고 “향주삼덕의 실천”, 영혼이 점점 수동적으로 되어갈 때 “하느님의 개입”에 대하여 두 성인은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두 성인에 있어서 향주삼덕의 실천은 어떤 일정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향주삼덕의 실천이 영혼을 정화시키는 보다 중심적인 방법이요, 영성 생활의 핵심이라는 사실에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두 성인은 자신들의 고유한 관점에서 기인되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가고 있다. 성 이냐시오의 경우 “정화의 생활”, 예컨대 영성생활의 실천적인 면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데 반해 십자가의 성요한은 정화가 지속되어 나감에 따라 영혼이 어떻게 변화에 가는지 이론적인 설명에 강조점이 놓여 있다. 따라서 향주삼덕의 실천을 다룸에 있어서도 성 이냐시오는 영신수련 안에서 하느님 말씀의 묵상과 관상, 수덕과 보속을 통해 향주삼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되는지 그 과정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십자가의 성요한은 향주삼덕의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 신학적인 결과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성인의 영성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성 이냐시오는 구체적인 삶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여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는데 반해 십자가의 성요한은 하느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의 완전한 일치에 초점을 두고 있다. 때문에 두 성인 모두 인간의 의지에서 하느님과의 합일을 지향하고 있지만, 십자가 성요한이 의지의 정감적인 부분에서의 완전한 합일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반면 성 이냐시오는 의지의 실천적인 부분에서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에 보다 강조점을 두고 있다.

 

5. 영성 생활 안에서 “정화의 길”의 적용

 

두 위대한 스승의 영적 가르침 안에서 영혼의 정화는 항상 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영성 생활의 과정 안에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다. 두 성인은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근거하여 영성 생활에 대한 그들의 체험과 사고들을 기록하였고,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영성 생활 안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제시하였다. 두 성인의 가르침 통해, 우리 영성 생활의 올바른 방향을 깨닫고 잘못된 영성 생활을 식별할 수 있는 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4.1 정화는 영성 생활의 기초이다

 

때때로 인간성의 긍정적인 측면을 지나지게 강조하는 경향성 속에서 영혼의 정화에 대한 중요성은 무시되곤 한다. 또한 고통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시각은 자기 죽음 없이,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부활에 도달하려고 하고 마음의 정화를 통하지 않고 신적 조명에 도달하려는 거짓 영성 주의를 불러 일으켜왔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두 성인에게 정화의 중요성이 그들의 가르침 속에서 크게 강조되고 있다. 영혼의 정화가 없게 되면, 영혼은 여러 가지 유혹과 나쁜 경향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어둠에 종속되고 만다.정화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전달된 새 생명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기 자신 죽어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예컨대 정화는 빠스카 신비을 우리 삶 안에 적용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기쁨만을 강조하는 영성은 그리스챤 영성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4.2 정화의 대상: 정감적이고 의지적인 측면에서의 무질서한 애착의 초탈이다.

 

때때로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과 근원적인 정화라는 이름으로 가능한 한 감각적인 차원, 개념적인 차원을 도외시하려는 경향이 많다. 왜냐하면 신적인 차원은 무제한적인 차원이기 때문에 제한적인 차원을 통해서는 하느님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에 있어서도 하느님께서 성취한 구원업적에 대한 묵상뿐 아니라 신성의 무한한 심연 안에 잠겨 드는 데에 필수적인 상념 곧 사랑 자체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상념까지 포기할 것을 제안하곤 한다 .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을 위하여 근원적인 “부정”이나 “초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영성 작가들이 영혼의 정화에 대하여 말할 때,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들로부터 “초탈”한다는 의미에 대해 올바른 해석을 해야 한다. 여기서의 초탈한다는 의미는 존재론적 차원의 부정이 아니라 정감적 차원의 부정, 예컨대 사물을 향하는 애착의 부정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그 자체로 선하며,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매개하는 성사성을 가지고 있다. 단지 이러한 피조물들을 하느님보다 사랑하고 여기에 애착을 느낄 때, 그러한 무질서한 애착이 철저히 부정되어야 한다. 예컨대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초탈은 개인적 이기심을 포기하는 자기 극복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 주신 창조 세계의 사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 이점에서 두 성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부정할 대상이 무엇인지 빛을 주고 있다. 예컨대 정화되어야 할 대상은 “무질서한 애착들”(afecciones desordenadas)이다 . 예컨대 정화란 실재 사물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정감적이고 의지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의 의지와 양립할 수 없는 애착을 부정하는 것이다.

 

4.3 정화의 목적: 하느님께 개방하기 위한 영혼의 비움이다

 

정화의 목적은 잘못된 영성 주의에서 종종 오해되곤 한다. 두 성인은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하지 않는 모든 애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영혼의 정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움의 목적이 무한하신 하느님을 향한 지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거나 혹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성화로 이끄시는 하느님께 자유로운 개방을 하지 못하고 영적 개인주의 안에 틀어박혀 짜릿하고 황홀한 느낌이나 만족을 추구하는데 있지 않다 . 이 점에서 두 위대한 영적 스승인 성 이냐시오와 십자가의 성요한은 영혼을 비우는 올바른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잘 가르치고 있다. 비움의 목적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영혼을 변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을 향해 개방하는데 있다. 예컨대 영혼의 비움인 정화는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는 여백을 준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신적인 것을 향유하기 위한 비움이라기 보다 하느님께서 영혼안에서 온전히 활동하도록 하는 비움이다.

 

4.4 정화는 조명의 단계에서 더욱 심화된다

 

영적 생활에서 적잖게 많은 사람들은 최고 선이신 하느님을 찾기 보다는 영지적인 깨달음, 은혜로운 감정, 고양된 감정이나 평온과 긴장 완화의 느낌, 여러 신비 현상 등의 영적 은혜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분명히 이러한 영적 은혜들, 영적 위안이나 조명체험들은 영성 생활을 심화시키기 위해 도움을 주는 요소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성 생활의 수단과 목적, 예컨대 하느님 자체와 하느님의 선물을 구분하는 영적 식별의 지혜가 필요하다. 하느님의 선물이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그것은 하느님 자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이러한 점에서 두 성인께서는 조명의 단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여러가지 신비 현상에 대응하는 신중한 가르침들을 남겼다. 또한 두 성인은 조명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참된 의미를 제시하였다. 예컨대 그리스도교적 조명은 최상의 영지적 인식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한 부당함과 하느님의 선함과 자비에 대한 인식에 있다고 보았다. 아울러 조명은 위안의 형태로 뿐만 아니라 십자가상의 그리스도께서 버림받으신 것과 같은 영혼의 메마름이나 고뇌의 체험으로도 나타난다.

 

4.5 정화는 향주삼덕의 실천에서 실현된다

 

최근 많은 사람들은 동양 종교나 정신분석학의 심리적 기법이나 신체의 자세와 태도을중시하면서 그것들의 과장됨과 일방성의 위험들을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하다 . 물론 일종의 수덕적인 기법으로서 몸의 태도나 자세를 통해 효과적으로 영혼이 집중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기도를 돕는 유익한 기법으로써 마땅히 이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모든 유용한 수덕적이고 심리적 기법들은 향주삼덕을 실천하도록 도와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법들은 직접적으로 하느님과의 합일로 영혼을 이끌지 못한다. 두 성인은 향주삼덕을 우리에게 영성 생활의 핵심으로 제시한다. 예컨대 향주삼덕의 실천만이 영혼을 하느님과 일치시키는 수단이며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가도록 제시된 길이다. 향주삼덕의 실천으로 영혼의 기능들이 순전히 자연적인 작용에서 정화되어 초자연적으로 작용하게 되고, 영혼의 기능이 초자연적으로 작용할 때, 그리도도 안에서 하느님의 양자적인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 안에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된다.

 

4.6 정화는 지속적인 심화 과정이다

 

요사이 우리 교회 내에서 심리적 기법이나 방법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죄나 악에 대한 생각마저도 놓아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죄의식이 집중을 방해하며, 정화의 핵심은 무의식적 동기와 싸우는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무의식에 비중을 두는 이론은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도피하여 무의식의 세계로 칩거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더 나아가 무의식은 의지적으로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는 한 죄가 아니며, 의지적으로 범한 죄가 아니라면 도덕적인 책임이 없다. 물론 하느님의 의지와 양립할 수 없는 영혼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잘못된 습관이나 죄의 경향성들로부터 정화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내면 깊은 정화는 점차 정화의 과정이 심화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점에서 두 성인은 정화의 점차적인 내면화로 깊어지는 과정들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정화는 능동적인 정화가 앞선다. 예컨대 죄와 죄의 세력들, 그리고 의식 안으로 떠오른 무의식적인 동기들, 즉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죄의 세력들과 투쟁을 통해 영혼이 이들 세력들로부터 정화된다. 이러한 능동적인 정화 후에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 영혼은 내면 깊숙이 뿌리내린 비 의지적인 경향성들로부터 까지 정화된다.

 

6. 결어

 

성 이냐시오와 십자가 성요한은 영혼의 정화를 중심으로 하여 영성 생활에 대한 이론과 실천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논문도 영생 생활의 여정 안에서 정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영혼의 정화의 측면은 오늘날 영성 생활의 다른 측면, 예컨대 조명이나 일치의 측면에 비해 도외시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본 논문은 두 성인의 정화에 대한 가르침의 몇 가지 주제들을 비교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부각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오늘날까지 대단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두 영적 스승의 가르침에 대해 보편적인 측면과 특수한 측면들을 명료하게 하였다. 또한 두 성인의 가르침이 마치 대립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왜 그런지 그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리스도교 교의와 전통에 부합하는 두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겨 봄으로써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의 식별 기준을 제공하면서 영성 생활에 토대로서 정화의 필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