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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성 예로니모 사제는 어떤 분인가?

by 파스칼바이런 2009. 10. 21.

 

성 예로니모 사제는 어떤 분인가?

 

 

예로니모(347-419년) 성인은 뛰어난 성서학자이며 수덕가로서 서방교회의 4대 공교부 가운데 한 분이다.

예로니모는 347년경에 지금의 북부 이탈리아 스트리도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로마에 가서 엘리오 도나토라는 유명한 학자에게서 수사학과 고전문학, 특히 치체로와 비질리오의 라틴어 고전문학에 대해 공부하였다.

이때 그는 세속 학문에 전념하였지만, 주일에는 사도들과 여러 순교자들의 성지 특히 카타콤바를 방문하며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살 때 리베리오 교황에게서 세례성사를 받고 프랑스 지방을 여행하다가 트리어에 정착한 다음 정부 관리로 일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아타나시오는 아리우스 이단자들의 반대 때문에 3년간(335-337년) 트리어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동방교회의 수도생활을 소개하였다.

그래서 예로니모는 트리어에 머무는 동안 수도생활에 관심을 갖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는 370년에 고향인 아퀼리아에 돌아와 발레리아노 주교의 지도 아래 같은 뜻을 갖고 있던 친구 루피노, 보노소 크로마치오, 엘리오도로 등과 함께 복음적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테르툴리아노, 치프리아노, 힐라리오 등 위대한 라틴 교부들의 저서를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역교회와 융합하지 못하고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예로니모는 373년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다음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라오디게이아의 아폴리나리스 주교에게서 성서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배웠다.

 

그후 그는 안티오키아 동편에 있는 칼치스 사막에서 2년간(375-377년) 은수자들과 살면서 그리스어를 익히고 히브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은수생활을 계속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망설이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너는 치체로 추종자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꾸중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은수자들 사이에 아리우스 이단 문제로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379년에 안티오키아에 가서 일정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바올리노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듬해에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이던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의 성서 주석 방법에 매료되었으며,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와도 교류를 가졌다.

이때부터 그는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저서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예로니모는 382년에 로마로 오게 되는데, 다마소 교황은 그를 비서로 삼고 신.구약 성서를 라틴어로 새로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서방교회 안에는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서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황은 예로니모에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서본을 만들도록 위촉하였던 것이다.

한편 예로니모는 말첼라와 바올라 등을 주축으로 한 상류층의 여인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수도생활의 이상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켰다.

그러자 그의 재능을 시기한 적대자들이 여자들 집에 들락거리는 예로니모를 의심하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예로니모는 80세 가까이 된 다마소 교황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물망에 올라있었다.

그러나 384년에 그를 지원하던 다마소 교황이 사망하고 예상과는 달리 시리치오 교황이 선출되자 상황이 돌변하였다.

적대자들이 그에 대한 비난을 강화하였기 때문에 그는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예로니모는 이집트의 니트리아 사막의 은수자들을 방문한 다음 386년 여름부터 베들레헴에서 본격적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올라가 따라와서 자기 돈으로 세 개의 남자 수도원과 한 개의 여자 수도원을 세웠다. 예로니모는 남자 수도 공동체를 지도하고, 바올라는 여자 공동체를 지도하였다. 또 그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짓고 수도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하였다.

 

그 후 그는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34년간 저술과 번역 활동에 몰입하였다.

그 사이에 그는 전교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오리게네스주의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오리게네스주의 논쟁이란 오리게네스의 많은 신학 학설들 가운데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신학자들이 심각하게 대립한 것을 말한다.

예로니모는 오리게네스 신학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나, 반대 입장에 서게 되었다.

또 394년부터 그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와 서신 연락을 하면서 당시 교회의 큰 골칫거리였던 펠라지우스 이단을 몰아내는 데 공동 보조를 맞추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예로니모의 라틴어 번역 사업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칭송하였다.

예로니모는 419년 9월 30일에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교회는 9월 30일에 그의 축일을 지내고, 그를 '신학교의 주보' 또는 '수덕생활의 주보'로 모신다.

그는 아마 라틴 교부들 가운데 가장 박학한 분이었고, 동시대 사람들 가운데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다.

 

예로니모는 엄청난 양의 저서를 남겼으며, 밍네의 라틴 교부 총서(PL) 제22-30권에 그의 저서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총서 한 권은 요즘의 400쪽으로 된 책 40-50권 분량이나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방대한 저서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저서들은 성서 주석서, 성서 번역서, 교의신학서, 이단 논쟁서, 수덕신학서, 역사서, 강론, 서간 등 다양하며, 저서 목록만 열거하더라도 엄청나게 많다.

그가 이처럼 많은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오래 살기도 했지만, 수도원 안에서 학문 연구에 열정적으로 몰입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성화들이 많은데, 상체를 벗은 은수자의 모습으로 펜을 들고 저술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는 무엇보다 성서학자였다.

신.구약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Vulgata) 중, 구약성서의 경우에 처음에는 그리스어로 된 70인역에서 번역하였다가 후에 히브리 원문에서 직접 번역하였다.

예로니모가 번역한 라틴어 성서에 '불가타'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예로니모 당시가 아니라 훨씬 뒤인 13세기부터였다.

그 이유는 예로니모의 라틴어 성서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있었으므로 로마 교회가 이를 공식적인 성서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유명한 그리스 교부들의 성서 주석서들, 특히 오리게네스의 주석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방교회에 소개하였다.

게다가 예로니모는 자신이 직접 구약성서의 창세기, 시편, 전도서, 모든 예언서, 그리고 신약성서의 마태오 복음서, 사도 바오로의 필립비서, 갈라디아서, 에페소서, 디도서 등에 대한 주석서들을 저술하였다.

예로니모는 처음에는 은유적 주석방법을 선호하였지만 점차 성서의 본문과 역사를 중시하는 문자적 주석방법으로 바뀌어갔다.

그는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성서의 무류성을 역설하였다.

그가 성서 본문 연구와 주석에 이처럼 주력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독서의 계절을 맞으며 위대한 성서학자인 성 예로니모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우리도 성인을 본받아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되새기는 열성과 습관을 지니게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다.

 

[이형우 시몬 베드로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축일 9월30일 성 예로니모(Jer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