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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수도 영성]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by 파스칼바이런 2009. 11. 12.

 

[수도 영성]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소유 없이 살아가는 삶

호명환 신부

 

 

들어가는 말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는 기원부터 특별한 출발점을 지닌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82?-1226년)가 주님의 은총에 이끌려 선택한 복음적 삶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선택한 이 복음적 삶은 전통적인 수도승적 삶과도 다르고, 당시 새롭게 형성되던 삶의 양식인 (활동) 사도적 삶과도 다른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 양식(또는 그리스도교 생활양식)을 형성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유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형제들을 주신 후 내가 해야 할 일을 아무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나에게 거룩한 복음의 양식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은 계시하셨습니다”(프란치스코의 유언 14절).

 

말씀의 육화와 복음적 삶의 출발점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세상으로 들어오심은 그분 온전한 사랑에 따른 것이고 그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이 세상 전체가 하느님의 선에서 나온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함이기에 작은 형제로서 사는 삶은 모든 존재하는 것을 충만한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최고선이신 하느님의 선물로 인식하며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프란치스코의 인준받지 않은 회칙 22장 9절 참조).

 

말씀의 육화야말로 우리 인간에겐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이며, 우리는 이 선물을 통해 존재 전체가 이미 하느님 선의 선물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적 삶의 시작점이다.

우리의 죄성이나 타락한 상태보다도 우리 창조의 모형인 선성이 바로 그 출발점이고, 구원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크나큰 선과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성화가 바로 그 시작점인 것이다.

 

복음적 삶의 핵심 :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과 나눔 - 소유 없이 살아가는 삶

 

이처럼 프란치스코가 삶의 전부로서 만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작은 형제들의 삶에 가장 핵심요소이다. 그래서 작은 형제들한테는 어떤 사도직(소임)이나 육신적 공동 현존(공동 전례나 기도 등)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과 나눔이 복음적 삶의 핵심이 된다. 물론 작은 형제들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일을 하고, 교회의 수도자로서 공동으로나 개인으로 기도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이지만, 그런 일과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과 나눔의 과정과 열매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우리의 일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열매를 하느님의 선으로 돌리는 일 역시 복음적 삶의 중요한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소유 없이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말씀과 행위를 모두 아버지께 돌리셨던 겸허함을 따르는 것이다. 작은 형제들의 가난은 물질적 가난을 포함하는 것이 분명하나, 이 가난은 의지적 가난, 또는 내적 가난이 더욱 강조되는 말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가난이라는 말보다는 ‘소유 없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것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으로 돌리고 자신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겸허한 종의 자세를 매우 강조하는 개념이다.

 

말씀의 계속적인 육화인 더욱 작게 살아가는 삶 - 형제애 - 관계성의 영성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회의 라틴어 이름은 ‘Ordo Fratrum Minorum’이다. 이 이름을 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더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라고 하는 것이 맞다.

 

이 이름에 나오는 ‘minorum’이라는 단어는 비교급 형용사로 ‘무엇 무엇과 비교하여 더 작은’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기에, 작은 형제는 다른 어떤 존재, 특히 어떤 사람보다도 더 작은 자로 자처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육화, 곧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작음을 취하신 모범을 따르는 일인데, 이는 그분의 이런 작아지시는 신비를 통해 우리의 구원이 가능해졌음을 깊이 인식한 프란치스코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체험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권능으로가 아니라 ‘가난’, 곧 ‘작아지심’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셨다. 이런 프란치스칸 체험은 바로 형제적 관계로 연결된다. 진정한 형제애란 ‘사람은 힘없고 약하고 가난하기에’ 한 형제가 기꺼이 모든 이 밑에 들어가 다른 사람의 손으로 한 올 한 올 이어지며, 그럼으로써 하느님께서 선이라는 것을 모범으로 빛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형제적 사랑의 모델이 바로 삼위를 이루나, 각 위가 서로를 향해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삼위일체이다.

 

육화의 다른 모습인 성체성사에 초점을 맞추는 삶 - 그리스도와 동일화

 

성체성사는 새로운 육화이자 복음의 새로운 형태이다. 육화를 통해 세상의 존재 모두가 선물임을 인식하게 해주는 것이기에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그분과 하나되어 그분의 눈으로 모든 것을 선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므로 성체성사의 삶은 바로 복음을 살아가는 삶인 셈이고 성체성사는 작은 형제들의 삶 한가운데 늘 자리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작은 형제들의 진정한 형제애를 가능케 해주고 힘을 주는 것이 바로 이 성체성사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을 늘 인식하고 인정해야 할 작은 형제들은 연약함과 가난의 상징인 성체성사에 눈길을 두고 사는 이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프란치스코에게 성체성사는 힘의 표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기력함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표상인 성체성사는 가난에 의해 이루어진 구원을 나누는 성사인 것이다.

 

이 성체성사의 삶은 결국 육화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상의 제사를 통한 파스카로 이어지게 하는 삶이다. 그래서 성체성사에 시선을 두는 삶은 성체성사 안에 포함되어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프란치스코는 성체성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늘 ‘주님의’ 또는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구체적인 단어, 육화의 단어를 쓰고 있다. 말하자면 말씀의 육화와 성체성사 그리고 십자가상의 제사는 함께 연결되어 있는 사건인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거룩하신 몸과 피를 통해 육신의 눈으로 그분을 보았고 그분을 받아 모셨으며 이를 통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과 동일화하였다(1224년에 있었던 프란치스코의 오상사건을 말함).

 

이렇듯이 작은 형제회의 영성이 추구하는 바의 끄트머리에는 그리스도와 동일화가 있는 것이다.

 

나가는 말

 

작은 형제회의 영성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갈구한 복음의 이상을 삶 속에 육화하려는 그의 열망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말하자면 프란치스코가 애초부터 일정한 목적을 지닌 어떤 수도회를 창설하고자 이러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참삶으로 이끌어가도록 성령께 자신을 개방하는 가운데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고, 이것이 자신과 후에 이 삶에 합류하는 모든 프란치스칸들의 프로젝트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이 복음적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세상 사람에게 열려있으며, 아직도 완성을 향해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이 복음적 삶에 모든 사람을 초대하였고 지금도 초대하고 있다.

 

호명환 가롤로 - 작은 형제회 수사신부.

 


 

  축일 10월 4일 성 프란치스코(Franc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