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by 파스칼바이런 2010. 5. 29.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 축일 12월 7일 >

 

 

암브로시오의 전기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은 그의 최후 심판 때에, 사람들은 암브로시오를 칭찬하는 쪽과 그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쪽으로 나누어졌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에 깊은 흔적을 남긴 행동가로 부각된다.

왕족들까지도 암브로시오의 가르침에 맞서다가 하느님의 무서운 벌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에 속한다.

 

유스티나 황후가 암브로시오가 관리하던 가톨릭교회 내에 있는 두 개의 대성당을 아리우스 이단에게 주기 위해 강제로 빼앗으려고 했을 때 암브로시오는 그것을 집행하러 온 군인들과 대항하여 맞섰다.

그때 그의 신자들은 그와 함께 황제의 군대에 맞서려고 정렬해 있었다.

이러한 반란의 와중에서도 그는 자극적인 동방의 가락에 맞춘 새로운 찬미가를 지어 신자들을 매혹시켰으며 그들을 자극하기도 하고 진정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황제와의 논쟁에서 "황제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지 교회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그를 반박했다.

그는 7천명의 무죄한 사람들을 학살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공적으로 비난했으며, 황제는 자기 죄를 깨닫고 공적 참회를 했다.

암브로시오가 로마 총독으로 밀라노에 파견되었을 때 아직 예비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그를 주교로 선출하였다.

 

암브로시오는 넓은 이마에 커다란 눈과 길고 우울한 듯한 얼굴을 가진 키가 자그마하고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우리는 성서를 안고 있는 허약한 모습으로 그려진 그를 볼 수 있다.

그는 귀족적인 바탕과 학자의 모습을 지닌 사람이었다.

암브로시오에게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면이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의 설교가 그 당시에 행하던 다른 사람들의 설교보다 더 훌륭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았지만 그가 다른 사람보다 휠씬 박식하다는 것을 알았다.

 

암브로시오의 설교는 대개 키케로를 모델로 한 것이지만 그의 사상은 당시의 사상가나 철학자들의 영향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는 이방인의 이야기를 인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인의 철학자들에게서 인용한 ’이집트인들의 황금’이라는 이야기를 자신의 강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의 설교와 저술 그리고 그의 개인 생활을 보면 마치 그가 그 당시의 크나큰 문제에 파묻혀 있는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생각된다.

암브로시오에게는 인간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영(靈)이었다.

하느님과 인간 영혼을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가장 가까운 것, 물질적 요소가 전혀 없는 선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축성된 동정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한 투사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암브로시오의 영향력은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고백록’은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티누스 사이에 있었던 몇 가지 대담하고 갑작스러운 대립을 보여 주지만 박학한 주교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깊은 존경은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모니카가 자기의 아들을 과거의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 대한 확신으로 인도한 암브로시오를 하느님의 천사처럼 사랑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를 입기 위하여 세례반으로 내려갈 때에 아우구티누스의 벗은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것은 바로 암브로시오였다는 말이 있다.

암브로시오는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그리스도교적 특성의 모범이다.

그는 고대와 그 시대의 학문과 법률, 문화에 깊이 젖어 있던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암브로시오는 이 세상의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가운데 성서의 숨은 의미가 우리의 정신을 다른 세계로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자신의 생활과 설교를 통해서 드러나게 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물질 이상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자신은 자연의 한 조각이거나 인간 사회의 한 무명 요소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도 속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 내적 품위로써 일체의 물질세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예지를 힘입어 유형한 세계를 통하여 무형한 세계로 옮아가는 것이다.(’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 14-15항).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골 지방의 로마 근위대장 암브로시오의 아들로서 독일의 트리엘에서 태어난 성 암브로시오(340-397년)는 부친의 사망에 따라 로마로 돌아가서 학덕을 겸비한 법률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부친의 친구인 이탈리아의 근위대장 안치오 프로보의 도움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그의 보좌관으로, 나중에는 리구리아와 에밀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지역의 수도가 밀라노였다.

그 당시(374년)에 새 주교의 선출 문제로 밀라노 교회 분위기가 혼미를 거듭하자, 주민들이 그를 주교로 선출하는데, 그는 예비자로서 세례조차 받지 않은 입장이었다.

그로부터 8일 후에 그는 세례를 받고 사제로 임명되는 순서를 밟는 동시에, 아리우스 이단 척결과 교회의 세속화에 반대하여 투쟁해 나갔다.

밀라노의 주교직은 막중한 책임과 권한이 따르는 지위였다.

 

그리고 그곳은 로마제국 서부 지역의 중심지였기에 정치적 영향 또한 막강하였다.

정력적이며 인내심이 강하고 합리적이며 체계적 사고력을 지녔던 암브로시오는 교회의 성직자로서 뿐만 아니라 행정가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아마도 그의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황제의 권력과 간섭으로부터 교회를 독립시키려던 그의 노력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서, 신학, 신비신학 연구에 몰두했고, 뛰어난 설교가로서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그가 아우구스티노를 교회로 이끌어 들인 것은 그 당시 사회에서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그는 교회의 라틴 박사 네 분 가운데 한 분으로 꼽히며, 시편을 대중적인 찬미 기도로 활용하게 함으로써 암브로시오 전례 및 성가 집대성자로 기억된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골의 근위대장 암브로시오의 아들로서, 독일 트리엘이서 태어난 그는 그의 부친이 사망하자 어린 나이로 로마로 돌아갔다.

그는 연설과 학덕을 겸비한 법률가가 되었다.

그의 성공은 이탈리아의 근위대장인 안치오 쁘로보의 도움이 컸는데, 그는 암브로시오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임명하였으며, 후일 황제 발렌티아노는 그를 리구리아와 에밀리아의 총독으로 봉하였다. 이 지역 수도가 밀라노였다.

 

그때(374년) 밀라노의 주교좌가 공석이 되자,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암브로시오가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할 수 없어서 수락하였는데, 그 당시 그는 예비자로서 아직 세례조차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주교직은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지위이다.

그리고 밀라노는 로마 제국 서부 지역의 행정적인 중심지였고, 그 주교는 불가피하게 정치에도 개입되어 있었다.

따라서 개종자들도 홍수처럼 밀어 닥쳤지만, 이교인들도 수없이 많았으며, 또 크리스챤들 가운데에는 아리우스 이단에 동조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을 주교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는 374년 12월 7일에 영세 하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였고, 신학, 성서 등을 연구하였으며, 그의 전 가정교사이던 심플리치아노 밑에서 크리스챤 학자들의 책을 공부하고, 엄격한 생활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당대의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고,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서방 교회의 가장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가 황제 그라씨아노의 고문관이 되자 그를 설득하여 서방에서 아리우스파를 축출하는 법안을 만들게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황제가 전투에서 막시무스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암브로시오는 또 다시 막시무스를 설득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의 원로원에 승리의 여신상을 재건하려는 귄뚜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 일파의 기도를 분쇄하는데 성공하였으며, 385년에는 발렌티아노의 어머니, 황녀 유스띠나에 의하여 착수된 일단의 무리들에게 밀라노의 성당들을 전복시키도록 명한 발렌티노 황제의 명을 성공적으로 저항하였다.

 

390년, 살로니카에서 폭동이 일어나 로마 총독을 살해하자, 그에 대한 징벌로써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는 가공스러운 대학살을 명하자, 암브로시오가 황제에게 글을 썼다.

이 같은 범죄는 공적으로 보속해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황제는 이에 순순히 응하였다.

 

암브로시오는 항상 다음과 같은 원칙 밑에서 행동하였다:

"황제는 교회 안에있다. 그는 교회 위에 있을 수 없다."

393년, 반렌티아노 2세가 골에서 아르보가스트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는데, 그들의 대표자 에우제니우스는 우상 숭배르르 재건하려고 시도하는 무리들이었다.

암브로시오는 그들의 살인과 공격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므로써,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마침내 제국 내에서 우상 숭배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수개월 후에 죽게 되자, 암브로시오가 그의 장례 때 기도하고 설교하였다.

암브로시오도 그 후 2년 뒤에 밀라노에서 운명하였다.

 

암브로시오는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분이며, 로마 제국이 쇠퇴해가던 서방 세계에서 그리스도교회의 부흥을 새로운 단계에 돌입시킨 분이시다.

또한 세속의 권위에 대항하여 교회의 독립과 자주성을 옹호했던 행정가이면서도, 그는 성서, 신학, 신비 신학 등, 설교를 중심으로 설파한 그의 지식 또한 괄목할 만하다.

 

그가 아우구스띠노를 이끌러 가톨릭 신앙을 고백토록 했고, 387년에 세례를 주었다.

이 사건은 그 당시의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놀라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암브로시오는 교회의 라틴 박사 4분 가운데 한 분으로 추앙받는다.

 

(성 아우구스띠노, 성 예로니모, 대 그레고리오).

 

또한 그의 저서 중에는 "신비에 대해서"란 책이 있는데, 여기서는 주로 세례, 견진 그리고 성체에 개한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시편을 대중적인 찬미의 기도로 활용하도록 가르친 첫 번째 인물이다.

그의 주요 저서는 De officiis ministrorum, De virginibus, De fide가 있다.

 

(부산교구홈에서)

 


 

 

교회 초대에 있어 위대한 교부들 중에 단연 두각을 나타낸 성 암브로시오는 340년에 독일의 트리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지방 총독이었으나 그가 소년기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어머니가 세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로마로가 정성껏 세심한 주의를 해서 그들을 교육시켰다.

그 중 두 명은 장성하자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따라 관청에 취직했고, 암브로시오는 열심한 가톨릭 신자인 프로부스 재판소장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372년, 그가 32세 때 리그리아 및 에밀리아 두 주의 총독에 임명되어 그 수도 밀라노를 향해 떠날 때, 상사이며 좋은 벗이었던 프로부스에게 인사를 하러 갔던 바, 그는 암브로시오에게 타이르기를 "당신은 이제부터 법관이라기보다 오히려 주교라는 기분으로 정치를 하는게 좋을 것이오.’ 했다.

 

암브로시오는 밀라노에서 곧 인기를 얻고 존경을 받게 되었다.

실상 그의 통치 방식은 엄한 재판관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자애에 충만하고 정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374년, 밀라노의 주교 아우첸시오가 서거하자 그 후임 선출은 매우 혼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유로는 그 당시 아리우스 이단이 성왕했고, 그 교직자들이 가톨릭 주교의 선거를 방해해 드디어는 시내에서 폭동까지 일어날 기세였기 때문이다.

 

총독 암브로시오는 풍운이 급박하다는 소식에 몸소 그 장소에 달려가 격분한 군중을 무마했다.

그러자 어떤 아이가 "암브로시오님이 주교가 되어야 한다! 암브로시오님이 주교가 되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이 소리를 들은 군중들은 마치 초자연적 계시나 받은듯이 이구동성으로 "암브로시오 주교님! 암브로시오 주교님!"하고 외쳤다.

이에 당황한 암브로시오는 그런 무리한 요구는 그만두라고 군중을 진정시키려 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세례도 안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가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가져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중들은 도무지 멈출 줄 몰랐다. 거듭 주교 취임을 요구하며 점점 더 소란해졌으므로, 그도 당할 방책이 없어 하는 수 없이 한 친구 집에 숨어서 문제의 결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허사로 돌아가 곧 군중에게 발견되어 신자는 물론 부근의 주교, 사제들까지도 그의 출마를 권유하며, 황제도 국민들의 선출을 유효다 하고 인정하게 되었으므로, 암브로시오는 할 수 없이 이를 수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교리 정도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단시일 내에 세례와 신품을 받아 사제가 되었고, 374년 12월 7일에 밀라노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 날 부터 암브로시오는 기도, 교리 연구, 자선사업에 전념했다.

그는 바른 신앙에 대한 열의를 보이고자 그리스교를 위해 추방당했던 전임 주교의 유해를 밀라노로 이송, 예의를 갖추어 정성스럽게 장례식을 지냈다.

 

그는 주 예수를 깊이 사랑하고 그를 따르기 위해 침묵을 지키며 끊임없는 단식재와 기도로 날을 보냈다.

특히 성스러운 순교자들을 공경하며 열심히 공부해 얼마 후 대 신학자가 되었다.

그의 저서는 매우 많으며 무두가 영원불멸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지금도 그의 학설은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암브로시오는 신자들에게 교리에 대한 이해를 북돋우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고, 주일에는 반드시 강론을 했다.

많은 이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매일 같이 교훈과 도움을 청하러 그에게 찾아왔다.

그는 모은 이에게, 특히 죄인에게는 깊은 애정과 친절로 대했다.

 

성녀 모니카도 그에게 와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눈물로 청했다.

그래서 암브로시오는 그녀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그런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 예언은 적중되었으나, 얼마 후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의 설교를 듣고 그와 대화하는 사이에 회개해 뒷날 위대한 성인이 된 것이다.

 

그는 타인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에게도 적이 없을 수 없었다.

하느님의 성자 예수께도 적이 있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암브로시오는 부정 불의한 일을 하는 이는 어떠한 권세, 지위의 인물이라도 주저 없이 책망하고 회심을 촉구했다.

그러니 때로는 그들의 반감을 산 것도 피치 못할 일이었다.

이리하여 그런 종류의 적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책동해 그와 교회에 압력을 가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한결 같이 인내하고 신앙을 옹호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은 것이다.

 

성 암브로시오가 테오도시오에게 처한 처사는 세상에 너무나도 유명하다.

황제는 매우 독실한 신자요 평소에 암브로시오에게 경의를 품었으며, 암브로시오 역시 황제를 존경하는 터였다.

그런데 390년, 테살로니마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 및 황후의 초상을 흙탕물 속에 집어넣고 갖은 모욕을 가한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는, 심히 격분해 곧 엄명을 내려 그 지방 사람을 유죄, 무죄 분별없이 전부 처치해 전멸케 했다.

이 소식에 접한 암브로시오는 대단히 놀라 즉시 서한을 황제께 보내어 통회와 보속과 고행을 권유하며 아울러 당분간 성당에 나오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아첨하는 신하의 진언을 들은 황제는 주교의 명령을 엄중히 지킬 필요가 없다 생각하고 예수 부활 대축일에 성당으로 행차했다.

주교는 성당입구에 가로막고 서서 "폐하께서는 아직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중함을 충분히 못 깨닫고 계시는 것 같사오니, 청컨대 이 길로 궁으로 돌아가셔서 그런 대죄에 또다시 죄악을 거듭치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하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으니, 황제도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머금고 그냥 돌아갔다.

그러나 황제의 내심에는 아직도 반항심이 숨어 있었다.

 

성탄 축일이 되자 황제는 또 성당으로 행차했다.

암브로시오는 이번에도 입구에서 황제를 만류하며 "황제께서는 어찌해 하느님의 뜻을 배반하시려 하나이까?"했다.

이제는 황제도 그의 잘못을 마음으로 뉘우치고 "나는 죄의 용서를 얻으려 합니다. 주교여! 주 예수의 무한한 자비를 생각해 나를 성당에 들여보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하고 겸손한 태도로 간청했다.

이 말을 듣자 주교는 "그러시다면 보속으로 무엇을 하시렵니까?"하고 물었다.

"무엇이든지 주교께서 명하시는 대로!"

이 말에 암브로시오도 그의 통회의 정이 진실됨을 알고 가벼운 보속을 명하고 성당에 들어감과 성사 받기를 허락했다.

이런 일로 말미암아 암브로시오의 권위가 더욱 빛났고, 또 황제의 겸손지덕은 한층 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황제는 얼마 후인 394년에 승하했다. 그 후의 로마 제국은 쇠퇴 일로를 걸었다.

이를 보는 암브로시오의 마음은 매우 아팠다. 그러던 중 자신의 최후도 다가왔음을 예지했다.

"내 이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는지! 아!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치 마시고 저를 거절치 마옵소서."

이것이 그가 기록으로 남긴 말씀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축일 12월 7일 성 암브로시오(Ambr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