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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St. GREGORY Nazianzen San Gregorio Nazianzeno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St. Gregory of Nazianzus, Bishop and Theologian <축일 1월 2일>
Saints Basil the Great and Gregory Nazianzen
그레고리오는 같은 해인 330년 나지안즈 근처에서 태어났다. 학문을 습득하고자 여러 곳을 여행했다. 자기 동료인 바실리오를 따라 은둔 생활을 하다가 사제와 주교로 서품되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풀리스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교구에서 발생한 분열 때문에 고향인 나지안즈로 돌아가 그곳에서 389년 또는 390년 1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웅변에 탁월하여 신학자(theologus)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30세 때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즉시 바실리오와 함께 이리스 강변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 2년 후부터 부친을 도우던 중, 362년에 사제로 서품되고, 372년경에는 사시미의 주교로 임명받았다. 이 교구는 아리안 지역이었으므로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므로 주교로 축성은 되었으나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발렌스 황제가 죽고 정통교회에 대한 박해가 수그러들게 될 때, 일단의 주교들이 그를 콘스탄티노블로 초정하여 아리안계 지역에서 정통교회의 활성화를 도모케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아나스따시아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하여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이때 그는 아리안계인 막시모와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고, 388년경에는 새로 입교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의 가르침을 정통교리에 인정하고 아리안계 지도자를 축출하는 칙서를 발표케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콘스탄티노블의 총주교가 되었다. 그의 임명은 굉장한 파문을 일으켜 381년에 콘스탄티노블 공의회까지 열려 문제가 심상치 않게 발전하므로 그는 교회 내의 평화를 위하여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다가 고향 땅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정통교회의 수호에 큰 공적을 남겼고, 또 니체아 공의회의 선언문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박사"로 불린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Porte Saint, Saint Jean Chrysostomo, Saint Basile le Grand(Icons De Tver에서)
옛날 소아시아의 동북부에 있는 카파도치아에서는 대단히 많은 순교자와 성인을 배출했다. 그 중에도 4세기에 나온 세 명의 교회 학자, 즉 성 대 바실리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축일:3월9일) 및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카파도치아의 세 광채라고 불리며 세상에서 유명하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329년 나지안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논나이며 그녀 역시 성인품에 오른 경건한 부인이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신자가 아니었으나 다년간 시장의 중직에 있었던 근엄한 덕망가로서 후에 아내의 인도로 입교해 노후에는 세상의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 나지안조의 주교가 되었다.
그레고리오는 이러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이미 수덕의 생활을 배웠다. 그에게는 누님 한 분과 남동생 하나가 있엇는데, 동생 가이사리오는 후에 정부의 요직에서 일했고 누님 고르고니아는 역시 성인품에 오른 분이다.
그레고리오는 소년 시절부터 카파도치아의 가이자리아, 팔레스티나의 가이자리아,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아테네 등 그 당시 학문의 중심지로 유명하던 각 도시에 유학하고 고향 찬구 바실리오와 절친한 사이를 이루어 함께 기거하고 서로 면려(勉勵)하여 도회지(都會地)의 많은 위험한 향락에는 조금도 물들지 않고 열렬한 마음으로 공부와 수덕 생활에 골몰했다.
30세에 학문을 마친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와 이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수도원을 꾸미고 그곳에서 공부와 수덕 생활에 골몰하려고 했으나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바실리오가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따라 함께 은둔 생활을 했다.
한편 주교직에 있기는 하지만 깊은 신학 연구도 없었던 그의 아버지는 갑자기 아리우스파의 이단에 미혹되어 나지안조의 신자들에게 악표양이 될 만할 일까지 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그들 사이에 큰 소란이 일어나 그레고리오는 급히 달려가서 이들을 진정시켜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를 떠나 보내려고 하지 않고 신자들도 또한 머물러 있기를 간청해 그레고리오는 할 수 없이 성품 성사를 받고 사제가 되었으나 그 직책의 중대함과 사진의 부당함을 느낀 나머지 마음이 불안하여 남몰래 친구인 바실리오에게로 떠났다. 그러나 그 이후에 바실리오의 권고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성무에 임했다.
바실리오는 가이자리아의 대주교가 된 후 그레고리오를 주교로 삼아 사시마 신 교구를 위탁하려는 생각이 있었으나 그레고리오는 나지안조시에 머무르며 아버지의 보좌역을 했고 37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주교대리로서 나지안조 교구를 다스렸다.
379년 아리우스파를 보호하고 있던 바렌스 황제가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오른 사람은 열심한 가톨릭 신자 테오도시오였다 그래서 이전에 아리우스파의 압박에 시달리던 콘스탄티노플 교회 신자들은 지금이야말로 교회 부흥 시기라 생각하고 교회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그레고리오를 초빙했고, 그는 그곳에 가서 박학과 웅변으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무수히 개종시켰다. 테오도시오 황제는 아리우스파에게 빼앗겼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그에게 반환하도록 했으며, 그는 시에서 열린 주교회의의 결과로 그곳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듣고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했지만 그중에는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기에 그레고리오는 교회의 평화를 위해 은퇴할 결심을 하고 요나가 말한 ‘이 재난이 나 때문에 일어났으면 나를 버려라’ 하는 말을 인용해 고별사로 하고 고향 나지안조로 돌아왔다. 부친의 후계자로 아우렐리오를 주교로 추천하고 자신은 본집에 돌아와서 다년간 갈망하던 수도 생활에 골몰하기를 약 10년, 드디어 그곳에서 389년에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때는 그의 나이 61세였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생존 시에 수많은 서적을 저술했으며,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강론, 시, 서간 등을 한데 모은 것이다. 아리우스의 이단자들은 알아듣기 쉬운 시로써 교리의 보급을 도모했다. 그리하여 그레고리오도 호교의 작시(作詩)에 전력을 기울여 그로써 시문을 좋아하는 청년들을 이단과 타락에서 구한 일도 적지 않았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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