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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데레사의 어린 시절 그녀는 하늘에서 나지 않았다 <로버트 세루>
마케도니아 지방 스코프예에서 태어난 공사(Gonxha Agnes Bojaxhill, 1910년 8월 27일 출생), 그가 마더 데레사다. 공사의 집안은 알바니아 출신으로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아니어서 늘 생활이 불안정했지만, 아버지 니콜라는 건축업자로서 기반을 잡아갔다. 마케도니아 지방은 일찍이 수많은 민족들의 각축장이 돼왔고, 민족적인 저항운동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공사가 세 살 때 발칸 전쟁이 발발하여, 그 지방은 투르크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로 나누어졌다. 나찌 치하에서 불가리아에 합병되고, 2차대전 후엔 유고슬라비아가 되었다. 이 지역은 인종과 종교의 전시장이었다.
인구의 37%인 가톨릭 신자들은 주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지방에 모여 사는데, 아주 오랜 전통 신앙에 집착해 있다. 공사도 그러한 분위기 안에서 자라났다. 그곳 신학교에서는 아직도 외출이 금지돼있을 정도다. 공사는 다섯 살 위인 언니 아가와 많이 닮았는데, 두 자매는 특히 음악을 좋아하여 성가대의 주축이 되었었다. 언니는 공사보다 매우 지성적이고 책을 좋아했는데, 나중에 어머니와 함께 알바니아로 가 살았다. 2차대전 후에는 신문기자와 방송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1968년에 돌아가신 후 3년 만에 언니도 세상을 떠났다. 다른 형제들도 다 어려서 죽고, 지금 일흔세 살인 오빠 라자르가 이탈리아에 살고 있어, 가끔 동생인 마더 데레사를 만난다. 오빠의 추억을 통해, 마더 데레사의 어린 시절을 알아보기로 하자.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우리 집은 언제나 손님들로 꽉 차있었다. 알바니아의 민족주의자들과 정치 동료들이 늘 찾아왔다. 항상, 외세의 지배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얘기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한 정치집회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속이 아프다면서 쓰러져 곧 피를 흘리셨다. 급히 병원으로 모시고 갔지만 응급실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불과 몇 시간의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독살되었다고 확신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밤새에 모든 것을 뒤바꾸어 버렸다.
그때 공사는 아홉살이었다. 어머니께서 안 계셨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편안히 살아오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우리들을 먹여 살리고 학교에 보내기 위해, 어머니는 바느질을 시작하셨다. 조용한 어머니는 어떠한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만큼이나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단 한 가지 중요한 일은 ‘교회’였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매우 진지했고 또 엄격하면서도 적극적이었다. 우리는 기도 모임을 만들고, 성모의 날 행사 등 특별한 예식을 지냈다. 우리는 성당 근처에서 살았는데, 그곳엔 알바니아인 사제가 있었다. 어머니와 나의 누이들은 흔히 성당에서 살았던 것 같다. 우리들은 모두 성가대 일이나 전례 나아가서는 전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살았다.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그 즈음에는, 영성체를 하기 전에,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시지 못하는 공심재를 지켜야 했다. 언젠가 토요일 밤 어린 나는 목이 말라 잠이 깨어 물을 한 잔 마셨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 공심재 생각이 났다. 곧바로 어머니께 달려가 내가 저지른 잘못을 눈물로 고백했다. 어머니는 매우 심각하게 타이르시고 나서는 다음날 나를 신부님께 데리고 가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나는 영성체를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느꼈던 ‘거룩한 공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요즘 영성체하려 나가는 사람들과 비교해보라.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우리 집은 정치논쟁의 온상이었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는 하나의 수도원 같았다. 이것이 바로 공사가 오늘의 데레사 수녀가 된 이유이다. 우리 어머니는 비범하리만큼 신심이 두터웠고, 그 딸들은 언제나 성당에서 활동하며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우리들은 늘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힘썼다. 어머니는 그곳 불쌍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먹여 살리며, 그들을 도와주면서 늘 전교에도 열성을 보였다. 어느 날 어머니는 온 몸이 종창으로 뒤덮인 어떤 부인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 가족들마저 마다하는 그녀를 우리 집으로 데려와 어머니는 그녀가 다 나을 때까지 정성을 다해 돌보아주었다. 오늘의 데레사 수녀는 거저 하늘에서 난 것이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집안의 배경과 분위기를 생각해보며 그녀의 결단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는 열두어 살 때부터 벌써 선교사업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외지에서 선교사로 일하다 돌아온 신부님들을 만나, 공사는 그 체험담을 즐겨 들었다. 그녀는 자세한 얘기들까지도 다 기억해 두는 것 같았다. 공사가 열두어 살 때쯤, 예수회원이었던 본당신부가 선교지역이 표시된 세계지도를 꺼내놓자, 공사가 지도 앞으로 걸어나가 선교사들의 정확한 위치와 그 활동 등을 낱낱이 설명하여 거기 모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본당신부는 그녀의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주었고 공사는 결국 본당신부와 교분이 있던 로레토 수녀회에 들어갔다.
우리들이 집에서 그렇게 살아온 신앙규율은 데레사 수녀가 세운 ‘사랑의 선교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사랑의 선교회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매우 엄격한 수도회다. 나는 마더 데레사에게 이렇게 얘기한 일이 있다. “너는 분명히 군사훈련을 받은 장교 같애. 꼭 어떤 군사기지나 함대의 사령관 같다.”
어머니에게서처럼 그녀에게도 엄청난 강인함이 보인다. 어린 딸을 그토록 멀리 떠나보내 수녀가 되게 한다는 것은 어머니에게도 커다란 희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다시 공사를 보지 못했다. 공사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두 모녀의 결단은 옳았다.
(Catholic Digest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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