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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by 파스칼바이런 2011. 4. 26.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시대 고민하며 주님 길로 인도하려는 교회 노력


 ▲ 보편 공의회라고도 부르는 세계 공의회는 2000년 교회 역사에서 모두 21번 열렸다.

사진은 1962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21번째 세계 공의회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회기의 한 장면.

 


◇공의회란

 공의회(영어 Council, 라틴어 Concilium)는 신앙과 윤리 규범 및 교회 생활과 관련한 주교들의 회합을 말합니다. 지난 1983년에 반포된 보편교회법인 「교회법전」에 따르면, 주교들의 회합과 관련해 가톨릭교회는 세 가지 기구를 두고 있습니다. 주교회의와 주교대의원회의, 그리고 공의회입니다.
 주교회의는 한 국가 또는 특정 지역 하느님 백성의 선익을 위한 그 국가 또는 지역 주교들의 상설 협의체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CBCK)가 있지요.
 
 주교시노드라고도 하는 주교대의원회의는 특정 국가나 특정 지역 또는 세계 교회 전체를 위한 주교들의 회합입니다. 그러나 그 지역 또는 국가의 모든 주교가 회원으로 참가하는 주교회의와 달리 주교대의원회의는 모든 주교가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주교회의에서 선출한 대의원 주교들과 교황이 임명한 대의원 주교들이 참석합니다. 또 주교대의원회를 소집하고 회의 주제를 정하는 것은 교황의 고유한 권한입니다. 주교대의원회의에서 참가 주교들에게 투표권이 있지만 그 투표권은 해당 사안에 대한 확정 또는 실행 여부를 가리는 의결 투표권이 아니라 해당 사안을 교황에게 건의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가리는 건의 투표권입니다. 말하자면 주교대의원회의는 그 자체로 의결기구가 아니라 교황의 자문기구라는 것이지요. 가장 최근에 열린 주교대의원회의로는 지난해 10월 로마에서 열린 중동 아시아를 위한 주교대의원회의 특별회의가 있지요.

 공의회는 협의체인 주교회의나 자문기구인 주교시노드와 달리 회의에 참가하는 주교들이 투표를 통해 의결권을 행사하는 회의입니다. 공의회는 크게 지역(개별) 공의회와 세계(보편) 공의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역 공의회는 다시 전국 공의회와 관구 공의회로 나눌 수 있는데 전국 공의회는 전국 차원에서 여는 공의회를, 관구 공의회는 관구 차원에서 여는 공의회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서울 관구 공의회를 연다고 하면 서울 관구에 속한 모든 교구(서울 춘천 대전 인천 수원 원주 의정부)의 주교들이 참가합니다.

공의회, 신앙 윤리 규범과 교회 생활과 관련한 주교단 회합
교황이 소집하며 주교들 투표로 결정된 사항은 문서로 공표
니케아공의회 시작으로 세계 공의회 지금까지 21차례 열려



 보편 공의회라고도 하는 세계 공의회(영어 Ecumenical Council, 라틴어 Concilium Oecumenicum)는 말 그대로 전 세계 모든 주교들이 참가하는 회의입니다. 물론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고 회의를 주재하고 공의회에서 결의한 내용을 승인하는 것은 교황의 고유한 권한입니다만, 주교단에 속하는 모든 주교들은 세계 공의회에 의결 투표권을 가지고 참석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 공의회는 전 세계 주교들이 로마 주교인 교황을 단장으로 주교단을 이뤄 세계(보편)교회에 대해 장엄한 양식으로 주교단의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입니다. 세계 공의회에서 주교들이 투표로 결정하고 교황이 승인한 내용은 헌장, 선언, 교령 등 다양한 형태의 문서로 공표되고 발효됩니다. 이렇게 세계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은 세계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존중하고 따라야 하는 구속력을 지니게 됩니다.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예수님의 12제자들이 활동하던 사도 시대 때부터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칩니다. 그 중 하나는 유다인으로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 간의 마찰을 어떻게 중재하고 해소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5장에는 이와 관련한 대표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다인들이 하듯이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함으로써 생긴 분쟁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원로들이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에서 내린 결론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할례 및 모세 율법 준수를 놓고 생겨난 분쟁은 일단락됩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라고도 부르는 이 회의는 갓 태어난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의 분쟁과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 소집된 첫 회의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교회가 커지면서 교회 안에서는 신앙 교리를 정립하는 문제, 교회 제도와 규율을 확립하는 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때로는 지역 교회 차원에서, 때로는 전체 교회 차원에서 주교들을 소집해 회의를 열었는데, 이 회의들을 시노드 또는 공의회라고 불렀습니다. 시노드라고도 부른 이유는 처음에는 시노드와 공의회의 명확한 개념 구별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초창기 회의들에 대해서는 그냥 '교회 회의'라고 번역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2000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교회 안에서는 수많은 교회 회의가 열렸는데, 가톨릭교회는 그 가운데 스물 한 번을 세계 공의회로 여기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열린 세계 공의회는 325년 오늘날 터키 수도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동쪽으로 80km정도 떨어진 니케아에서 열린 니케아공의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계 공의회는 1962~1965년 바티칸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이지요.
<세계 공의회 일람표 참조>


 

▲ ※ 이 알림표는 「한국가톨릭대사전」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그런데 이 스물 한 번의 세계 공의회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한 번도 공식으로 '세계 공의회'라고 선언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교회 안에서 교황이나 학자들이 세계 공의회'로 인정한 것을 통상적으로 수용해서 인정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물론 세계 공의회로 인정받는 일반적 기준은 몇 가지 언급할 수 있습니다. 교황이 회의를 소집했는지, 교황이 직접 회의를 주재했는지 또는 적어도 교황 사절을 회의에 파견했는지, 모든 주교들이 회의에 소집됐는지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준도 현재 '세계 공의회'로 불리는 21번의 공의회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컨대 첫 번째 세계 공의회로 인정되는 니케아 공의회는 교황이 아니라 로마 황제가 소집한 공의회였습니다. 이런 형식적 기준 외에도 공의회에서 결정한 내용이 후대 공의회에서도 전거로 계속 원용될 정도로 전체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회의였다면 세계 공의회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여러 상황을 참작해서 신학자들과 교회사학자들은 세계 공의회 목록을 작성했고, 이것이 가톨릭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는 니케아 공의회에서부터 가장 최근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스물 한 번의 세계 공의회를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이를 통해 가톨릭교회의 소중한 유산이 어떻게 형성돼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런 배움과 성찰이 우리 자신과 교회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작은 밑거름이 되기를 소망하며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2) 니케아 공의회(상)

삼위일체 교리 바로 세운 첫 번째 공의회


 ▲ 325년에 개최된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모습. 

◇배경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시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이 어떻게 셋으로 구별될 수 있는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교리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초기부터 이를 둘러싼 숱한 논쟁이 제기됐고, 많은 이설이 생겨났다 사라지곤 했습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박해를 받아온 그리스도교가 신앙 자유를 얻은 직후인 4세기 초반에도 이와 관련한 논쟁이 다시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논쟁 발화지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였고 불씨를 당긴 사람은 사제 아리우스였습니다.

 아리우스는 진짜 신은 하나여야 한다는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단일성을 철저하게 고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의 아들 곧 성자 그리스도는 참된 하느님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리우스에게 성자는 참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성자는 피조물의 으뜸이지 하느님과 똑같은 본질을 지닌 완전하고 절대적 신일 수 없습니다. 성부만이 완전하고 절대적인 참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아리우스의 주장이었습니다.

 아리우스의 이런 주장은 그의 독창적 사상이라기보다는 이미 3세기에 동방 교회에서 널리 확산된 '그리스도 종속설' 또는 '성자 종속설'의 연장선 상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곧 성자는 성부와 똑같지 않고 성부에게 종속돼 있다는 것이지요. 이를 더 극단화한 것이 아리우스의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에 상당수 성직자와 평신도가 호응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에 어긋난다는 반대 또한 만만찮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함께 일찍부터 총대주교좌가 있던 그리스도교 5대 중심 교회 가운데 하나이자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만큼 지지자들과 반대자들간 대립과 다툼도 심각했습니다.

 대립이 심각해지면서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데르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318년 교회회의를 열어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추방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밖에서도 지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알렉산데르 주교에게 아리우스를 다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알렉산데르는 이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다시 교회회의를 열어 아리우스를 파문합니다. 323년이었습니다.

 아리우스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파문 제재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아리우스는 이집트에서뿐 아니라 다른 동방 교회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자들과 지지자들 사이에 분열과 대립이 극심해졌습니다.

 교회 내의 이런 분열이 당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에게는 골치 아픈 문제로 대두됐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관용령'이라는 칙서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자신들의 신앙을 자유로이 고백하고 실천할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박해로 지하에 숨어 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 준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이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또한 로마 제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그리스도교를 활용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불거져 나온 교회 내 분열이 제국의 평화에도 결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여겨 이 분열을 해결하고자 나섰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스페인 코르도바 주교 호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 사절로 파견합니다. 하지만 호시우스 주교는 중재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사안의 중요성과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마침내 제국의 모든 주교들을 자신의 여름 왕궁이 있는 니케아로 소집하지요. 325년이었습니다. 황제는 회의 장소로 자신의 왕궁을 내주었을 뿐 아니라 회의에 참석하러 오는 주교들에게 제국의 역참을 이용하도록 하는 등 편의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하느님 단일성 제기한 사제 아리우스가 삼위일체 반박하자
알렌산드리아 주교가 아리우스 파문하며 교회 내 분열 시작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교들을 니케아에 소집해 회의열어
대부분 동방 주교 참석, 삼위일체 인정한 니케아 신경 채택


 
◇과정
 니케아 공의회는 회의 내용이나 과정에 관한 공식 기록이나 문서가 없어서 회의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공의회 참석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보낸 편지 등을 통해 전해지는 기록들을 토대로 하면 공의회는 5월 20일에 시작됐습니다.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 수와 관련해서는 200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설과 250명이 넘는다는 설 등 의견이 분분합니다. 공의회에 참석한 성 아타나시우스는 나중에 공의회 참석자가 318명이라고 밝힙니다. 318이라는 숫자는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종들을 가리키는 숫자(창세 14,14)로 다분히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지요.

 참석 주교들은 동방(로마를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교회들)에서 온 주교들이 대다수였고, 서방(로마와 그 서쪽에 있는 교회들) 주교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자문 역할을 한 코르도바 주교 호시우스를 포함해 열 손가락에도 꼽히지 않을 정도로 소수였습니다. 로마 주교인 교황 실베스테르 1세(재위 314~335)는 연로해서 참석하지 않았고, 대신 사제 비투스와 빈첸시우스를 특사로 파견했습니다. 참석한 주교들 가운데는 박해 때 고문을 받아 양손 근육이 마비된 주교도 있었고 한쪽 눈을 잃은 주교도 있었다고 합니다.

 회의가 열렸고 황제는 명예의장으로서 개회 인사를 했습니다. 주교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며 화해와 평화를 막는 장애물을 없애고 모두가 일치해서 신앙 안에서 화해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회의는 의장인 교황을 대리해서 호시우스 주교와 다른 이들이 주재했습니다.

 참석 주교들은 아리우스 논쟁의 불씨가 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문제와 부활대축일 날짜를 정하는 문제를 논제로 삼아 논의에 들어갔습니다. 격론이 벌어지고 분위기가 심상찮게 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황제 자리에서 내려와 화해를 요청하는 등 적극 개입했다고 합니다. 약 한 달 간의 열띤 논쟁 끝에 마침내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데르가 이끄는 정통파 주교들이 이겼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하느님으로서 하나의 본체 또는 본질(동일 본질)을 지닌다는 내용의 니케아 신경이 채택됐습니다. 325년 6월 19일이었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