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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10월 7일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사리아 축일>

by 파스칼바이런 2011. 9. 29.

축일 10월 7일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

<로사리아 축일>

 

Beata Vergine Maria del Rosario

Our Lady of the Most Holy Rosary

Our Lady of the Rosary

 

레판토 해전의 교황 성 비오 5세(Pius V, St.)

 

이 축일은 성 비오 5세 교황이 레판토 해전(1571년) 승리 기념일에 제정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자 군사들은 그 때 자신들이 거둔 승리가 묵주기도를 바침으로써 받은, 천주의 거룩하신 어머니의 도움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오늘 이 축제는 하느님 아드님의 사람이 되심, 수난, 그리고 부활의 영광에 특별한 방법으로 참여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이끄심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역사상으로 레판토 해전은 너무나 유명한 것이다. 즉 1571년에, 이미 연전연승을 거듭해 온 터키군은 마침내는 로마를 점령하고 가톨릭을 지상에서 말살시키려고 위풍당당하게 대 함대를 몰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교황 비오 5세는 제후들에게 원조를 청했으나, 당시의 정정(政情)으로서는 겨우 하나의 소함대를 편성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적의 절반도 못되는 병력으로 적을 쳐부수기 위해 교황은 온 가톨릭 신자에게 묵주기도를 할 것을 명했다. 한편 교황도 로마에서 성직자 신자들과 뜻을 합하여 열심히 이를 실천했고, 함대에 있는 장병들도 그렇게 했던 것이다.

 

1571년 10월 7일 최초의 해전에서 크리스천 군은 적의 함대에 포위되어 수척의 군함은 이미 격침되었고, 다시는 싸울 희망조차 없이 절망상태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후의 전황이 기적적으로 우세하게 되어 마침내 적의 함대를 전부 격퇴시키고 말았다. 즉 묵주 기도가 이와 같은 대승리를 가져오게 했고 온 유럽의 신앙을 구해준 것이다. 이 승보(勝報)에 접한 전 로마 시민은 기뻐했고, 방방곡곡에서 성모께 대한 감사의 예식이 거행되었다. 그때부터 성모 호칭 기도에 "지극히 거룩한 로사리오의 모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라는 기도문이 삽입되었고 10월 7일을 그 축일로 정하게 되었다.

 

이 신심의 전파는 1830년 이후 성모님이 발현하여 묵주 기도를 열심히 바칠 것을 권고하면서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루르드(l858)·파티마(l9l7)·보랭(l932~l933)의 발현에서 묵주 기도를 특별히 권장하였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 성월은 개인과 가정성화, 인류구원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묵주기도를 바치는 달로, 1883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Supremi Apostslatus』에 의해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설정되었습니다.

 


 

 

바티칸에 있는 전투에 관련된 프레스코화

Fernando Bertelli, Die Seeschlacht von Lepanto, Venedig 1572, Museo Storico Navale

 

레판토 해전

(그리스어: Ναύπακτος, 터키어: İnebahtı, 이탈리아어: Battaglia di Lepanto,

라틴어: Proelium Lepanthinum)

 

레판토 해전은 1571년 10월 7일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 비오 5세 치하의) 교황령, (나폴리와 시칠리아, 사르데냐를 포함한) 스페인 왕국과 제노바 공화국, 사보이 공국, 몰타 기사단 등이 연합한 신성 동맹의 갤리선 함대가 오스만 제국과 벌인 해상 전투로 오스만의 전투용 갤리선 함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10월 7일 일요일 아침, 레판토 해군 기지에서 서쪽으로 출항한 오스만 함대와 메시나에서 출항한 신성 동맹의 함대가 그리스 서부의 바깥쪽에 있는 파트라스 만의 끄트머리에서 만나면서 5시간에 걸친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 이후 신성 동맹은 일시적으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며, 로마를 오스만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유럽을 향한 오스만의 팽창을 저지하였다.

 

신성 동맹은 로사리오 기도를 통해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며 하느님께 승리를 빌었다.

안드레아 도리아는 그의 선실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받은 과달루페의 성모화 복제품을 안치하였다. 교황 비오 5세는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려고 10월 7일을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묵주 기도의 성모를 칭송하는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라는 축일로 제정하였다.

 


 

 

레판토 해전 / Bataille de Lépante, vue par Paul Véronèse

 

레판도 전투와 묵주기도의 힘

 

 

13세기부터 점차 세력을 키우던 오스만투르크족(현재 터키)은 15세기에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여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였다. 16-17세기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 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이슬람 세력도 급성장하여 유럽 그리스도교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국의 세력을 확장시키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무슬림 노예로 삼으려는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그에 따라 유럽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투르크 세력에게 패배란 없었으며, 전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용맹과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무슬림들로부터 사랑과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1570년 이슬람 군대의 수장인 알리 파차는 베네치아령인 키프로스 섬의 최고권자인 니콜로단돌로에게 거짓으로 항복하며 그를 속여 키프로스 섬을 차지했다. 그리곤 니콜로의 목을 잘라 바구니에 담아서 베네치아의 총독인 마르코 안토니오 브라디간에게 보냈다. 이 사건으로 두 수장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6개월 후알리 파차는 니콜라에게 썼던 것과 똑같은 수법으로 브라디간을 속였다. 알리 파차는 부하에게 명령했다. 브라디간의 코와 두귀를 자르라고! 2주 후 브라디간의 피부를 모두 벗겨 죽였다. 그리곤 몸을 4등분하고 짚으로 싼 다음 거리를 행진하여 콘스탄티노플까지 가져갔다.

 

성 교황 비오 5세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유럽을 밝히는 단 하나의 밝은 빛이 있었는데, 바로 교황 비오 5세였다. 묵주기도의 형성과 보급에 혁혁한 공을 세운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도자였던 그는 묵주기도가 얼마나 큰 힘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때 이미 늙고 병든 몸이었지만 명석한 두뇌와 거룩한 삶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아주 소박하게 식사하고, 아주 간편한 옷차림으로 맨발로 걷기를 즐겼으며, 밤이면 무릎을 꿇고서 아주 오랜 시간을 묵상기도에 바쳤다.

 

또한 그는 순결하신 성모님께 대한 신심과 거룩한 삶의 표지로 흰색 옷을 입었는데, 그의 후임자들에 의해 그대로 이어졌다. 성 교황 비오 5세가 직면하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유럽을 분열시키고 있는 프로테스탄트와 무슬림 투르크 세력의 위협이었다. 그 두 세력을 정복하는 것은 사람의 힘을 동원하는 전쟁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과 자비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 전쟁은 눈에 보이는 전투가 아니라 영적인 전투라는 사실도 그는 알았다.

 

성 교황 비오 5세는 이듬해 1571년에 무슬림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리고 그 공격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적군이 유럽으로 진군할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기보다는 투르크 함대와 견줄 정도로 큰 함대를 만들어 투르크 함대를 바다로 유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뒷받침된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1571년 봄이 다가오자 교황 비오 5세가 투르크 세력에 맞서자고 유럽의 왕정과 정부에 탄원한 지 거의 5년이 되고 있었으며, 교황의 그같은 노력은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고 끝나는 것 같았다. 여러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관심에만 주력하면서 그런 것에는 협조할 뜻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교황 비오 5세는 눈앞에 닥친 위기를 직시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기도를 촉구했다.

 

1571년 3월 7일, 레판토 해전이 일어나기 정확히 7개월 전인 그날, 스페인과 베네치아와 교황청은 동맹을 결성하고, 투르크 함대에 맞설 함대에 소형 배와 군인을 제공하기로 했다. 교황 비오 5세는 이에 덧붙여 기도와 단식도 요청하면서, 특히 묵주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571년 한여름이 되자 투르크 함대는 아드리아해에 있는 베네치아 섬을 공격하기 시작할뿐 아니라 이탈리아를 공격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교황 비오 5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로마, 베니스, 나폴리, 제노바, 프로방스, 시칠리 그리고 스페인이 공격당하면 유럽의 그리스도교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교황 비오 5세는 동맹국 함대가 남쪽 파트라스만으로 출항하여 오스만 무슬림 함대를 찾을 것을 명령했으며, 동맹국 함대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에 닻을 내렸다는 보고를 받았다. 한편 그 무렵 투르크 함대는 지중해로 진군하여 로마를 차지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를 잘 익어 과즙이 풍부한 "붉은 사과"라고 불렀다.

 

돈 주앙, 그리스도교 수장

 

교황 비오 5세는 스페인 국왕 필립 2세의 이복 동생인 24세의 청년 돈 주앙을 거룩한 동맹국의 함대 사령관에 추천했다. 돈 주앙은 용맹하고 정직하고 뛰어난 지휘력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교황은 돈 주앙에게, 신앙생활에 불성실한 사람을 부하로 뽑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도움으로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충고해주었다. 또한 거룩한 동맹 함대에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어떤 말이나 행동 또는 의심을 품는 것을 강한 벌로 다스리도록 했다. 이 전투는 단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한마음으로 일치한 상황에서만 이길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성모님께서 가르멜 수녀회의 가타리나 수녀(가경자)에게 발현하셨는데, 그녀는 예전에 돈 주앙의 가정교사였었다. 성모님께서는 가타리나 수녀에게, 그리스도교 동맹국이 승리하기 어려우니 그녀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에 따라 가타리나 수녀는 자신의 몸에 피가 나도록 때리며 그 고통을 그리스도교 동맹국의 승리를 위한 희생으로 바쳤다.

 

1571년 늦여름 그리스도교 함대는 투르크 함대가 있는 지점으로 방향을 잡았다. 유럽 전체가 숨을 죽이고 그 상황을 주시했으며, 신앙인들은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리스도교 함대에 승선한 군인들은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완벽한 훈련을 받지 못했으며 잔인무도한 기세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하느님이 그들의 편이었고, 묵주기도가 그들의 무기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결심이 서 있었다! 바람의 방향을 비롯한 모든 상황조건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었다.

 

1571년 10월 7일, 교황 비오 5세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승전을 간구했으며, 신자들은 로마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 본부에 있는 미네르바 성 마리아 성당에서 쉼 없이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 성당은 정확하게 7개월 전인 3월 7일에 그리스도교 동맹이 결성된 곳이기도 했다. 교황은 동맹국의 모든 군사들에게 감사를 표했으며, 교회가 줄 수 있는 모든 은사를 수여했다.

 

1571년 10월 7일 주일, 드디어 레판토에서 그리스도교 함대와 투르크 함대의 결전의 날이 밝았다. "바다를 물들이고 태양을 흐리게 했던 가장 빛나고 섬뜩한 전쟁 중의 하나"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함대와 부속 보트에는 십자고상이 달려 있었고, 모든 군인은 묵주를 가지고 있었다. 결전의 날 아침 그들은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다. 반면 투르크 함대는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자신만만한 기세로 결전의 날을 맞았다.

 

10월 5일과 6일 양일간에 걸쳐 짙은 안개가 그리스도교 함대를 에워쌌으며, 7일의 날씨도 그들에게 유리하게 시작되지는 않았다. 돈 주앙 지휘관은 자신이 가장 먼저 발사하겠다는 뜻을 부하들에게 전달했다. 그리스도교 함대의 선두선이 먼저 레판토로 들어섰을 때 거기엔 알리 파차의 명령을 받은 갤리선들이 완전히 진을 친 채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초록과 금색으로 장식된, 알리 파차의 깃발도 돛대 위에서 휘날리고 있었다. 그 깃발은 이슬람 경전인 코란의 말씀이 바탕에 새겨져 있고, 금색 자수로 이슬람의 신 알라 이름이 28,900번 새겨져 화려하게 장식된 것이었다. 그것은 투르크 제국 황제의 깃발이었으며, 이슬람의 보물 중 하나였다. 그것은 이슬람의 시조 무함마드가 직접 고안한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 깃발은 절대로 적군의 손에 빼앗겨서는 안 되었다.

 

돈 주앙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면서 교황 비오 5세가 직접 축복하여 수여한 깃발 레알레를 자신이 탄 배의 닻에 꽂아 펄럭이게 하라고 명령했다. 깃발에 새겨진 커다란 십자가가 제대로 드러나도록!

 

(돈 후안의 기함에 걸려이던 문장이 새겨진 레알레 깃발)

 

그런데 투르크 함대의 군사들은 자신의 적군 함대로 가까이 다가올수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징을 비롯한 온갖 기구를 동원하여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적군의 혼을 빼놓겠다는 심산이었다. 반면 돈 주앙이 이끄는 그리스도교 함대의 병사들은 깃발만을 펄럭이며 쥐죽은 듯 조용했다. 동맹국 측에서는 아직 시발탄을 쏘지 않은 상태였다. 돈 주앙은 작은 배를 타고서 손에는 십자가를 쥐고서 부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격려했다. "그대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여기 왔다. 그러므로 이기든 죽든, 오늘 그대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여라. 이기든 죽든, 그대의 이름은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런 다음 돈 주앙은 레알레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러자 큰 함대와 작은 배에 타고 있던 부하 군사들도 모두 그처럼 레알레를 향하여 무릎을 꿇고서 하느님께 마음을 다하여 기도했다.

 

하느님의 도움

 

알리 파차와 그의 부하들은 그리스도교 동맹군들에게서 세 가지 점에 놀라고 있었다. 그 첫째는 그리스도교 연합군의 전방 1마일 앞에 놓인 무장 갤리선 여섯 대였다. 그처럼 높은 갤리선을 전투 현장에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투르크군은 그 갤리선을 보급품을 제공하는 상선으로 착각하여 공격에서 제외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결국 투르크군의 갤리선 70척이 동맹군의 그 갤리선에 의해 가라앉게 됨으로써 그것은 투르크군에게 재앙의 단초가 되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그때까지 투르크군에 유리했던 바람의 방향이 동맹군에게 유리한 쪽으로 갑자기 바뀐 것이다. 그 호기를 이용하여 돈 주앙의 군사들은 재빨리 적군을 공격했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신 게 틀림없었다!

 

투르크군이 동맹군에게서 놀란 두 번째 사항은 갤리선에서 무거운 철제 장대가 없어서 적군에게 아주 가까이 접근하여 공격하기 쉽다는 점이었다. 세 번째 사항은 동맹군 함대에 그물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었는데, 적군을 무찌른 후 승선하기 쉽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전재에서 최고 명령권자는 직접적으로 전투에 나서지 않지만 돈 주앙과 알리 파차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서로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돈 주앙은 거룩한 깃발과 멀지 않은 곳에서 실제 크기의 십자가를 높이 들어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알리 파차와 그의 부하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저기 있다. 저자와 그의 추종자들을 몰살시켜라. 알라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자!"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무기를 십자가를 향해 동시에 날렸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십자가 위 예수님의 다리에 가서 박혔는데, 그 순간 갑자기 예수님의 두 다리가 양쪽으로 움직였다(스페인 바르셀로나 대성전에 가면 그 기적의 십자가를 볼 수 있다).

 

돈 주앙은 알리 파차를 향하여 직접 발사하면서 동맹군의 침묵을 깨뜨렸다. 세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돈 주앙이 탄 배는 알리 파차의 깃발이 펄럭이는 배를 함락시켰다. 동맹군과 투르군 사이에는 깊은 증오심이 흐르고 있어 두군 모두 적군을 포로로 잡기보다는 죽이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다보니 시체가 갑판을 뒤덮을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전세는 동맹군 쪽으로 기울어갔다. 알리 파차의 깃발은 돛대ㅐ에서 뜯겨졌다. 반면 동맹군의 그리스도인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내지르며 교황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승리의 나팔소리는 물살을 가르며 퍼져나갔다.

 

The Battle of Lepanto by Paolo Veronese

레판토 해전: 파올로 베로네스, 캔버스에 유화.

 

오후 4시가 되면서 동맹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전쟁은 끝이 났다. 투르크군 함대는 무너지고, 12,000명이 넘는 동맹군의 노예 군사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 전쟁에서 동맹군 전사자는 7,000명이었지만 투르크군은 300,000명을 잃었다. 동맹군은 배 300척을 파괴하거나 포획했지만, 잃은 것은 단 20척에 불과했다.

 

유럽이 얻은 승리는 엄청나게 컸다. 이 승리를 계기로 유럽은 오스만투르크의 팽창을 막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슬람의 유럽 침투를 저지하게 되었다. 아울러 "세계를 움직이는 추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으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부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교황이 목격한 환시

 

10월 7일 교황 비오 5세는 추기경들과 업무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창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동안 그의 두 눈은 열린 창 너머의 무엇인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 그는 레판토 바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거기서 승전보를 듣게 될 것이라는 환시를 목격했다. 환시가 끝나고 창문을 닫으면서 교황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은 다른 업무로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신 하느님 앞에 나아가서 감사드립시다."

 

10월 7일 묵주기도의 모후 기념일 제정

 

동맹군의 승전보가 로마에 전해진 것은 그날로부터 19일이 지난 26일이었으며, 그날 교황 비오 5세는 공적으로 동맹군의 승리를 선언했다. 이어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신 마리아'라는 칭호를 로레토 호칭 기도에 첨가했다.

 

1572년 교황 비오 5세(1566 -1572)년 재위, 1712년 5월 22일 교황 글래멘스 11세에 의해 시성)는 10월 7일을 "승리의 성모 기념일"로 선포했다. 그리고 이듬해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 -1585년 재위)는 그날을 '묵주기도의 모후 기념일'로 명칭을 바꾸면서 10월 첫주일로 고정시켰다.

 

교황 글레멘스 11세(1700 - 1721년 재위)는 레판토 해전 승리일인 10월 7일을 '묵주기도의 모후 기념일'로 고정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가 이를 지키도록 지시했다. 교황 레오 13세는 "지극히 거룩하신 묵주기도의 모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기도문을 로레토 호칭 기도에 첨가했다.

 

"우리를 승리로 이끈 것은 권력도, 무기도, 지도자도 아니다. 바로 묵주기도의 모후시다!"라는 당시 베네치아의 고위관리의 말대로 묵주기도의 모후께서 이 큰일을 이루어주셨다.

 


 

 

 

묵주의 기도

 

로사리오가 시작되게 하고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구조를 이루는 데에 누구보다 많은 기여를 한 것은 도미니코회의 알라노 데 루페 (1428-1478)였다. 그는 여러 단계의 작업을 했다. 우선 기도들을 개선하여 그가 "묵주 기도의 영혼"이라고 불렀던 묵상적인 요소들을 "묵주 기도의 육체"를 이루었던 소리 내어 하는 기도보다 중시했다. 그는 구원 역사에서의 사건들을 50개씩 세 무리로, 즉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로 나누고 그 각각을 다섯 단으로 나누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15단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시편"이 성 도미니코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확증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는 동료들로 하여금, 묵주 기도를 자신들의 사도직으로 삼게 했다. 실제로 도미니칸들은, 그때부터 언제나 이 기도를 전파했고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알라노는 무엇보다도 사도였고, 특히 네덜란드와 독일 북부에서 대중적 선교에 뛰어난 설교자였다. 이러한 선교를 하는 동안 그는 지칠 줄 모르고 ‘로사리오회’를 조직하고, 이 기도가 신앙에서 성장하는 수단이 되고 교회의 적들에 맞서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고 하였다. 이 마지막 확신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어서, 묵주 기도에 관한 첫 교황 교서에 언급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진다(Ea quae, 식스토 4세, 1479년 5월 12일자).

 

거기에서 묵주 기도는 "경건하고 열심한 기도의 방법으로서, 천사의 인사를 매일 -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기리며, 그리고 세상을 위협하는 위험들에 맞서-다윗의 시편에 있는 시편 수만큼 드리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나온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 기도가 거의 가톨릭 신앙의 상징이 됨으로써 로사리오회가 자주 개신교에 효과 있게 맞서게 되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침내, 이 확신은 레판토 해전의 승리를 통하여 역사적으로 분명히 입증되었다(1571년 10월 7일).  이 때에 도미니칸이었던 성 비오 5세 교황은, 거기에서 싸우고 있던 군인들의 대포와 용기보다도 묵주 기도라는 "무기"에 그 승리를 돌렸다. 그는 이 승리의 날인 10월 7일을 온 교회에서 지낼 지극히 거룩한 로사리오의 축일로 제정하기까지 했다.

 

후에 ‘Consueverunt Romani Pontifices’라는 교서로 규정화된 최종적인 묵주기도의 구조는, 마찬가지로 도미니칸이었던 알베르토 디 카스텔로에 의한 것이다. 그는 각 성모송 사이에 묵상을 위한 간단한 도움을 주도록 자료를 제시함으로써 이 신심 행위를 더욱 가다듬었다.

 

문예 부흥 시기 동안, 여러 수도회들에서 몇 가지 형태의 묵주 기도들의 사용되었다. 그 중에는 '성모의 종 수도회'에서 권고한 "성모 칠고의 묵주 기도"가 있다. 그러나 결국 우세했던 것은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장려했던 형태였고 이는 위에 인용했던 교황 비오 5세의 교서 ‘Consueverunt Romani Pontifices’를 비롯한 많은 교황 문헌들에서 언급되었다.

 

그 교서에서 묵주의 기도는, "다윗의 시편 수를 따라 천사의 인사를 150번 반복하며 복되신 동정녀를 공경하는 것이며, 각 단마다 주님의 기도 한 번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나타내는 특별한 묵상들을 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묵주 기도의 열매에 대하여, 그 교서는 지극히 웅변적으로 말한다.

"자주 마음으로 이 기도를 하는 신자들은, 그 묵상으로 불이 붙어,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이단의 어둠은 물러나고 가톨릭 신앙의 빛이 다시 활보하게 되었다."

 

- 도미니코수도회홈에서 -

 

*로사리오(Rosario:라틴어)란 말은 장미 꽃다발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강론에서

(Sermo de Aquaeductu: Opera omnia., Edit., Cisterc., 5[1968], 282-283)

 

 

우리는 구원의 신비를 묵상해야 합니다.

 

"당신에게서 태어나실 거룩한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 지혜의 원천, 하늘 가장 높은 데에 계신 아버지의 말씀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동정녀시여, 말씀께서는 당신을 통해서 사람이 되시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 또한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그분은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의 말에 의하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즉 이미 샘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아직 자신 안에서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말합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즉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태초로부터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내 생각은 평화의 생각이지 고난을 줄 생각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획은 주님의 심중에 숨겨져 있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생각을 잘 안 사람이 어디 있었으며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또 어디 있었습니까?"

 

그래서 평화의 계획은 평화의 작업에로 내려왔습니다. "말씀은 사람이 되시어 지금 우리 가운데 거처하십니다." 그분은 특히 신앙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거처하시고 우리의 기억 속에 거처하시고 우리 생각 속에 거처하시며 우리의 상상력에까지 내려오십니다. 그분이 이미 우리들 가운데 오지 않으셨다면 사람은 환상이 만들어낸 하나의 우상밖에는 하느님에 대해 무슨 관념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다? 하느님은 파악할 수 없고 다다를 수 없고 보이지 않으시며 결코 인식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사람들이 당신을 이해하기를 원하시고 당신을 보기를 원하시며 당신에 대한 관념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디에서 그리고 언제 당신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까? 말구유에 누워 계실 때, 동정녀의 품에 안겨 게실 때, 산에서 설교하실 때, 기도 중에 밤을 지새우실 때, 또는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죽음이 다가오자 얼굴이 창백해지셨을 때, 죽은 이들 가운데서 해방되시어 명부에서 다스리실 때, 또는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승리의 표지인 못 자국을 사도들에게 보여 주실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보는 데서 하늘의 은밀한 곳에로 승천하실 때 입니다.

 

누가 이 모든 신비들을 참되게 경건하게 또 거룩하게 묵상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 신비들을 생각할 때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이 모든 신비들 안에서 나는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나는 이런 신비들에 대해 묵상하는 것을 지혜라고 일컫습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이들 새싹들에다 그렇게도 풍성히 발생시키고 마리아께서 위에서 가져다가 우리에게 풍부히 부어 주신 그 향기를 되 맡아 보는 일을 나는 슬기라고 생각합니다.

 

클레르보(Clairvaux)의 성 베르나르도(Bernard) 아빠스

 수도원장, 교회학자, 신학자(1090-1153년) 축일 8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