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의 성사성을 지향하는 그레고리오 성가
글: 신호철
그레고리오 성가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전례 중에 불러온 성가다. 이 성가가 지니는 본모습과 중요성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우리가 전례 안에서 부르는 성가의 의미에 대해 언급해야 하고, 전례 성가의 본질과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하려면 먼저 전례의 본질에 대해서부터 실마리를 풀어 나가야 한다.
1. 전례의 성사성 - 인간 감각의 성화를 통한 구원 은총의 인식1)
전례는 그리스도교의 ‘경신례’(cultus)로서, 파스카 신비의 모습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구원되고 그 받은 은총에 감사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교회 공동체의 공적인 기도요 예식이다.2) 전례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께 탄원하고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기도를 들으시고 은총을 베푸시며 그 은총으로 구원받은 인간은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를 올린다. 간단히 말해,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인간의 구원이다.
전례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초월적인 은총을 인간에게 베푸시는데 반해, 인간은 먼저 자신의 인간적인 감각을 통해 이 초월적인 실재에 접근한다. 인간 감각의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초월적인 은총을 먼저 인간적인 방식으로 건네주신다. 인간적 방식으로 건네지는 이상 그 방식으로 인한 제약이 여전히 존재하나 이것이 초월적인 은총이 어떻게든 인간에게 인식될 수 있는 유일한 출발점이다. 하지만 인간적 방식을 통해 초월적인 은총을 인간적으로 인식한 후에 그 인간적 방식의 한계를 넘어서 초월적인 것을 초월적으로 인식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3) 이것은 어떻게 극복되는가?
하느님께서는 초월적인 은총을 인간적으로 받아들인 인간의 감각에 다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그 감각을 ‘성화’(聖化, divinizatio)하신다. 성화된 인간의 감각은 비로소 초월의 지평으로 열려서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고 들을 수 없었던 것을 듣게 된다.4) 인간이 초월적인 구원 은총을 인식하면 그 은총이 사람 안에서 힘을 내고 참된 생명으로 그를 가득 채운다.
이렇게 전례 안에서 구원이 실현되는 과정에 있어 인간이 해야 할 일이란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신앙으로 응답하여 성령의 이끄심에 최대한 수동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수동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데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이것을 ‘수동적을 위한 적극성’(activitas per passivitatem)이라고 하며, 전례에서 구현해야 할 ‘적극적인 참여’(participatio autuosa)에서 말하는 적극성이란 바로 이것이고, 이를 위해 전례에 대한 교육과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5) 그렇지 않고, 신자들로 하여금 전례 중에 무작정 무언가를 자꾸 행하게 하려는 것은 맹목적이며, 결국은 신자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내면 깊은 곳에서 성령께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할 신자들을 방해하는 것이다. 전례 안에서 초월적인 구원 은총은 먼저 인간의 감각을 통해 인식되고 그 감각이 신앙 안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성화됨으로써 인간적인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서 비로소 초월적인 전망으로 열리는 것이므로, 무엇보다도 신자들이 듣고,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는 그 인간적인 감각들을 소중하게 다루어 주어야 한다. 그 감각들은 그저 인간적인 것에 머무르고 말 것이 아니라, 신앙과 은총을 통해 초월에로 열릴 소중하고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가는 인간의 청각을 통한 구원 은총의 인식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2. 전례의 성사성을 지향하는 성가
성가의 본질은 기도문이며, 성가를 부르는 것은 곧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문을 노래하면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같은 기도문이라도 공동체가 함께 노래하면 기도 소리가 기도문에 더욱 일치되고,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이 내는 소리가 공동체 전체가 내는 하나의 단일한 목소리로 더욱 일치된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시편 72,1을 주해하면서 “노래하는 사람은 두 번 기도하는 셈이다.”(Qui cantat, bis orat.)라고 했다.6) 기도문과 유리된 노래는 성가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으며, 어떤 아름다운 선율이 있다고 하여 거기에 적당한 기도문을 붙여 놓은 것 또한 참된 성가라고 할 수 없다.
성가는 마음에서 우러나 입을 열어 기도하는 것과 기도 소리를 귀로 들으면서 거기에 마음이 감동하는 것의 두 측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 사제, 부제, 독서자, 시편가 및 성가대가 전례문과 성가를 노래할 때, 그 거룩한 울림은 신자들의 청각을 통해 그 기도문의 내용을 감동적으로 전달함으로써 신자들의 감각이 초월로 열릴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중요한 역할 담당하며, 또한 신자들은 공동체가 부르는 성가에 참여하여 그 기도문을 노래함으로써 신앙에 충만하여 초월로 이끌어 주실 성령께 자신의 마음을 내러 맡길 준비를 하게 된다. 따라서 성가는, 전례를 보다 아름답게 꾸며주는 부차적인 장식물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이 성화되어 구원 은총을 인식하게 되는 전례의 본질적인 성사성 그 자체에 관여하고 있는 필수적인 것이요 불가결한 것이다.7)
3. 그레고리오 성가
‘그레고리오 성가’(cantus gregorianus)는 교회가 기도하는 전통 안에서 불러온 본연의 고유한 성가로서, 가히 성가 중의 성가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이미 초세기부터 미사와 시간 전례 중에 이 성가를 불러왔으니, 5-6세기를 거치면서 그 본문과 음악적 형태가 결정적으로 확립되어 이후로 계속 불린 이 노래는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교회의 전통적인 ‘전례 성가’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교회는 이미 9세기부터 이 성가를 ‘고레고리오’라는 이름을 따서 지칭하였으니8), 이전의 성가를 받아들여 본문과 선율을 확립하는 데에 대 그레고리오(Gregorius Magnus, 590-604) 교황이 큰 기여를 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며, 그레고리오 성가에 대한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이 대표적 권위는, 논란이 없지는 않으나, 여러 사료와 가설들을 통해 지지되고 있다.9)
앞에서 성가의 본질은 기도문이요 성가를 부른다는 것은 더욱 장엄하게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이야 말로 라틴어로 된 전례문 그 자체에서 우러나온 것으로써, 전례문에 철저히 복종하여 전례문 자체가 담지하고 있는 깊은 신학과 고상한 아름다움을 떠받들어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성가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 선율이 표현하고 있는 전례문 자체에 대해 신학적으로 그리고 수사학적으로 얼마나 깊이 접근할 수 있는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거룩히 부르기 위해서는, 먼저 전례문 안에 담겨 있는 신학과 그날 전례의 정황에 따라 강조되는 주제를 깊이 이해해야 하므로 라틴어와 신학에 대한 지식과 소양이 전제된다. 바로 이 신학적 내용과 주제가 선율로 표현되고 강조되는 것이다. 또한 라틴어 본문이 지니는 운율 구조에 선율이 직결되어 있으므로, 라틴어의 음운을 올바로 이해하고 발음할 줄 알아야 하며, ‘고저 강세’(accentus tonicus) 및 ‘장단 강세’(accentus metricus) 그리고 ‘꾸르수스’(cursus)의 구조에 따라 ‘선율 강세’(ictus)의 위치를 파악할 줄 알아야 비로소 선율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이 노래하는 전례문의 역사’ 및 ‘라틴어의 운율 구조에 따른 그레고리오 성가의 이해’에 대해서는 <사목정보> 2월호 및 3월호에서 각각 따로 다룰 것이다.
1) 이에 관해서는 신호철, “전례의 성사성과 전례 개혁”, (신앙과 삶), 제22호(2010), 173-200쪽에서 따로 다루었다. 2) “전례 헌장” 5-13항 참조. 3)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 시작된 초월적 은총에 대한 인간적 인식이 초월적인 인식으로 넘어가는 것을 “새로운 눈뜸”, “내적 감각의 열림”이라고 표현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정종휴 역, “전례의 정신”, 성바오로출판사, 서울 2008, 128-149쪽 참조. 4) 신약성경에서 인간 감각의 성화가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사도 2,1-13)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에도 인간 감각의 성화가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산에서 예수님의 거룩히 빛나는 얼굴을 제자들이 본 사건’(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과 ‘베드로가 주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사건’(마태 16,13-20; 마르 8,27-30; 루카 9,18-21)을 들 수 있다. 5) “전례 헌장” 14-20항 참조. 아우르는 분류 방법이 신선했다. 6) AUGUSTINUS, Enarrationes in Psalmos(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40), Ps 72,1. 7) “전례 헌장” 112항 참조 : “… 그것은 특히 말씀이 결부된 거룩한 노래로서 성대한 전례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8) 정확히 “cantus gregorianus”라고 한 것은 히르샤우(Hirschau) 수도원의 원장인 귀욤(Guillaume, +1091)에게서 처음 발견된다. 그러나 이미 9세기에 성 레오(Leo, 847-855)는 수도원장인 오노라투스(Honoratus)에게 “그레고리오 성가의”(gregoriani carminis) 감미로움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는데, 여기서는 ‘cantus’라는 명사 대신에 그 유의어인 ‘carmen’을 사용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Cfr. M. RIGHETTI, Introduzione Generale(Storia Liturgica 1), Milano 1964, 656쪽. 9) Cfr. RIGHETTI, Introduzione Generale, 657-659쪽.
신호철 신부(부산교구), 1996년 사제품을 받았다. 2009년 로마 교황청립전례대학원에서 전례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2009년부터 현재까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목정보, 2011년 2월호]
|
'<가톨릭 관련> > ◆ 교회음악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악 속의 하느님] 십자가를 끌어안은 사랑 (0) | 2011.10.23 |
---|---|
[음악 속의 하느님] 가브리엘 포레 ‘장 라신느의 찬가’ (0) | 2011.10.23 |
[음악 속의 하느님] 기~쁨~이 넘쳐 뛸~때 (0) | 2011.10.23 |
(27)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올리브산의 그리스도’ (0) | 2011.10.22 |
(26)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架上七言)’ (0) | 2011.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