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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5월25일 성 베다 사제 학자

by 파스칼바이런 2011. 10. 27.

축일 5월 25일 성 베다(Bede)

St. Bede the Venerable

St. Bede, Benedictine, Doctor,

San Beda detto il Venerabile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신분: 신부, 교회학자, 역사가

활동연도: 672/673-735년

같은이름: 비드

 

 

성 베다(Beda)

 

영국 타인(Tyne) 강 남쪽 지역의 노섬브리아(Northumbria) 왕국에서 태어난 성 베다(Beda)는 7세 때 친척들에 의해 캔터베리(Canterbury) 위어머스(Wearmouth)의 성 베드로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수도원 원장인 성 베네딕투스 비스코프(Benedictus Biscop, 1월 12일)의 지도하에 교육을 받았다.

685년부터는 성 베네딕투스 비스코프가 새로 지은 재로우(Jarrow)의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옮겨 그곳의 원장인 성 체올프리두스(Ceolfridus, 9월 25일)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성장한 뒤에 그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고, 19세에 부제품 그리고 30세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몇 차례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는 늘 수도원 안에서 생활하면서 주로 성경 연구에 전념했으며, 수도원 내의 교육과 저술 활동에 몸을 바쳤다.

 

그는 당대의 가장 박학한 사람으로 존경받았고, 영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경에 관한 그의 주해서들은 당대에 가장 권위가 있었고 중요시되었으나, 그는 역사가로서 더 유명하다.

그의 "영국 교회사"는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역사서이다.

그는 또한 영문법과 연대기 작업을 하였고 찬미가와 시를 썼다.

이외에도 그는 서한집과 강론집 그리고 순교록을 썼는데, 이들 책들이 모두 라틴어로 저술되었지만 그는 영어로 집필한 저술가로도 이름이 나 있다.

만년에 그는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성 요한 복음서"를 번역하였고, 세비야(Sevilla)의 성 이시도루스(Isidorus, 4월 4일)의 저서들을 추출하였다.

그는 735년 5월 26일 재로우의 수도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재로우에 묻혔다가 더럼(Durham)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더럼 성당의 갈릴리 경당에 묻혀 있다.

 

성 베다는 일생 동안 기도하고 노동하며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한 수도자였으나 그의 학문적 업적으로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그의 지혜와 학문을 높이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존자'(Venerable)라는 칭호를 덧붙였고, 이 칭호는 853년 아헨(Aachen)의 교회회의에서 공식화되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겸손하였으며, '영국 역사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가 교회학자로 선언하였고,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는 성 베다를 일컬어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 '우리 스승이신 베다 존자'라고 하였다.

그는 단테(Dante)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의 '천국 편'에 등장하는 유일한 영국인이기도 하다.

비드(Bede)로도 불리는 그는 1100년 이전까지 영국 전례력에서 5월 26일에 기념되다가 1969년부터 5월 25일로 확정되어 기념되고 있다.

 


 

 

성 베다 사제 학자

 

 

 St. Bede the Venerable, Priest, Monk, Scholar

 

673년 위어마우스 수도원 근교에서 태어났다.

성 베네딕도 비스코프에게 교육을 받았고 수도원에 입회한 후 사제가 되어 가르치고 저술하는데 생애를 바쳤다.

교부들의 전승을 따르고 성서를 주석하는 신학 및 역사학의 저술을 남겼다. 735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 베다의 임종에 대한 커버스트의 편지에서

(Nn. 4-6 PL 90, 64-66)

 

나는 그리스도를 보고 싶습니다.

 

예수 승천 대축일 전 화요일이 되었을 때 베다 형제의 병세는 악화되어 숨결이 매우 거칠었고 발은 약간 부어올랐다.

그러나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온종일 우리에게 학습을 지도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자신이 저술하려는 것을 받아쓰게 하였다.

다른 여러 가지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습 과제를 지금 속히 배우십시오.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아있을지는, 잠시 후 나를 지으신 분께서 데리고 가실는지 모르니까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가 자신의 죽음이 언제 올지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수면도 취하지 않고 감사드리면서 그날 밤을 지새웠다.

수요일 아침이 밝아 오자 우리가 이미 시작했던 것을 지체하지 말고 끝마치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아홉시까지 그 일을 했다. 아홉시가 되자 그날 늘 하던 대로 유해 행렬을 했다. 우리 중 하나가 그의 곁에 남아 있었는데, 그는 베다 형제께" 스승님, 스승께서 받아쓰게 하신 그 책은 아직도 한 장이 더 남아 있습니다.

저희 질문에 계속 대답하시는 것은 무리가 되시겠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펜을 뾰족하게 깎고 나서 빨리 쓰시오." 그 형제는 성인이 지시하는 대로 했다.

 

오후 세시가 되자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옷장 속에는 몇 가지 선물, 후추가루, 수건 그리고 향이 있습니다. 빨리 달려가서 우리 수도원의 사제들을 모시고 오십시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은 비록 적은 것이지만 그분들께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사제들이 왔을 때 모두 모아 놓고 말씀하면서 각 개인에게 자기를 위하여 미사와 기도를 바쳐 달라고 권고하며 간청했다.

그들은 기꺼이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그들의 얼굴을 이 세상에서 얼마 더 보지 못할 것같이 생각된다고 말했을 때 형제들은 모두 큰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다음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 때 모두 기뻐했다.

"나를 지으신 분의 마음에 드신다면, 지금 이 시간이 내가 존재하기 전 무로부터 나를 지어내신 분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나는 오래 살아왔고 자비로우신 심판관께서는 내 일생을 당신 섭리로써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다가왔으니 내 몸이 해체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갈망합니다.

내 영혼은 영광 속에 나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감화를 주는 다른 여러 가지 말씀을 하면서 저녁이 될 때까지 이날을 기쁘게 보냈다.

 

내가 이미 말했던 윌버트라는 젊은 형제가 다시 "스승님, 아직도 쓰지 못한 문장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는 " 그 문장을 빨리 쓰십시오." 라고 대답했다. 잠시 후 젊은 형제가 "이제 다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자 스승은 " 그 말이 맞습니다. 다 되었습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손으로 내 머리를 받쳐 주시오.

내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도록 내가 즐겨 기도했던 성당을 향해 기대어 앉기를 정말 원합니다." 그리고 나서 방바닥에 누워 영광송을 외우기 시작하여 "성령께"를 외울 때는 숨을 거두었다.

그가 항상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그토록 노력한 것을 생각하면 자기가 그리워하던 천국의 기쁨으로 틀림없이 옮겨 갔다고 우리는 믿는다.

(가톨릭홈에서)

 


 

 

 

웨어마우스에서 태어난 그는 성 베네딕도 비스코프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영국 쟈로우이 베네딕도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을 그곳에서 자신이 표현한대로 "신성을 찬양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지냈다.

자연주의자이며 역사학자, 시인이었던 그는 또한 훌륭한 신학자였다.

간단한 설교로써 성서를 쉽고도 감동적으로 깨닫게 하였다.

그분의 시 중에서는 동정녀 성 마리아를 찬양하는 매우 아름다운 시가 몇 편 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밝은 하늘처럼 빛날 것이며 대중을 바로 이끈 지도자들은 별처럼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다니 12,3).

이 구역의 예언은 성 베다에 대해서도 적용될 것이다.

그는 베네딕토회의 수도자로서 4세기부터 5세에 걸쳐 게르만 민족이 이탈리아, 그리스 등에 침입해 찬란한 문화의 꽃을 뿌리 채 멸망시키려고 했을 때 이를 보호해 뒷날 서양 문명의 귀중한 모태가 되도록 한 것은 주로 그의 공로 덕분이라 할 것이다.

또한 그는 당시의 신학과 기타 일반 학문의 방면에 있어서도 큰 공적을 남겼다.

 

그는 672년 영국 웨어마우스 쟈로우의 세인트 피터와 세인트 폴 수도원 근처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이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베네딕토 비스콥 원장과 체오프리드의 지도 아래 교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베다는 매우 급속히 지식이 진보해 교사인 수사까지 놀라게 했으나 그의 경건한 신심도 이에 못지않게 뛰어나 모든 덕을 닦는데 극히 열심 했다.

이리하여 19세로서 일찍이 부제가 되고 나서 신학 연구에 전념하기 11년 만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나 그 뒤에도 연구를 계속해 마침내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성인이라는 평판은 이미 그 수도원에서부터 영국 전토에 퍼져 주교, 국왕과 같은 권력자도 그와 교제하며 그의 예지와 덕행의 빛이 충만한 말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더욱이 그의 말이 일층 더 권위를 지니게 한 것은 그의 성스러운 생활인데, 일반 사제, 수도자들도 그의 고결한 모범을 우러러보고서는 엄숙히 정장을 하고, 스스로 반성해 개과천선에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St. Bede, Benedictine, Doctor

 

성인이 무엇보다 힘을 쓴 것은 성서 지식의 보급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보급을 위해 거의 모든 성서의 주해서를 저술했다.

또한 여력을 기울여 물리, 천문, 식물 등의 방면에서도 박학한 지식을 쌓아 많은 저서를 발간했고, 동양 문화를 서양에 소개하는 일에도 크게 공헌한 바 있었다.

이상을 보고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베다는 직접 선교 사업으로 진리를 수많은 나라에 전한 성 보니파시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와는 달리 주로 문필로써 사람들 사이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끊임없는 노고 때문이었는지 위의 질병과 호흡 곤란 등으로 고생하면서도 담당하고 있던 신학생에게 하는 강의를 중단하지 않고 공동 기도에도 출석할 뿐 아니라 한밤중에도 다윗의 시편을 외우며 주님께 기도드린 때가 많았다고 한다.

병약의 몸인 그가 주님께 불리어 그의 찬란한 공적의 보수를 받기 위해 천국으로 떠난 것은 735년 5월 26일 마침 주님 승천 축일이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겸손했으며 영국사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가 교회 박사로 선언했고,

성 보니파시오는 베다를 일컬어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우리 스승이신 복자 베다’라 했다. 그는 단테의 천국 편에 나오는 유일한 영국인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St. Bede’s Tomb

Photo ⓒ The Dean and Chapter, Durham Cathed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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