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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5월27일 켄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by 파스칼바이런 2011. 10. 27.

축일 5월 27일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e)

Saint Augustine of Canterbury, Bishop

Sant’ Agostino di Canterbury Vescovo

St. Augustinus, E. D.

Born:at Rome, Italy

Died:26 May 605 in Canterbury, England of natural causes;

신분: 선교사, 대주교 / 활동지역: 캔터베리(Canterbury)

활동연도: +604/605년

같은이름: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오스틴

 

 

캔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의 가문이나 청소년 시절 혹은 교육과정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없다.

다만 그는 이탈리아의 로마(Roma) 태생으로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와 친분이 있었고,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던 베네딕토회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595년 그는 이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고, 이듬해에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로부터 앵글로 색슨족을 복음화시키라는 사명을 받고 40명의 수도자들과 함께 영국으로 파견되었다.

성 베다(Beda, 5월 25일)에 의하면 그는 이미 영국에 도착하기 전에 주교로 승품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아를(Arles)의 대주교에 의해 주교 수품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597년 봄에 프랑크 왕국의 도움으로 영국 켄트(Kent) 왕국의 해안가 타네트(Thanet) 섬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미 영국에 진출해 있던 선교사들과 켄트의 왕인 성 에텔베르트(Ethelbert, 2월 26일)의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에는 아일랜드 교회와 로마 교회의 관습에 많은 차이가 있어서 선교활동에 장애가 많았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켄트의 수도인 캔터베리에 주교좌를 정하고 활동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와 활동은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다.

수많은 개종자들이 탄생했고 그의 설교와 모범을 보고 성 에텔베르트 왕과 신하들이 597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왕이 하사한 땅 위에 주교좌 성당을 세우고 도시 외곽에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 수도원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베네딕토회 수도원이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켈트(Celtic) 전례를 고수하려는 주교들이 로마 전례의 규율과 관습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는 여생을 켄트에서 보내면서 런던(London)과 로체스터(Rochester) 교구를 설정하고 주교를 임명하였다.

그는 캔터베리의 첫 번째 대주교이자 '영국의 사도'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오스틴(Austin)으로도 불린다.

 

※ 성녀 모니카(Monica)의 아들로서 교회학자이며 교부인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e: 축일 8월 28일) 주교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축일 5월27일 켄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597년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로마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 있는 그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도록 영국에 파견하였다.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후 에덜버트왕의 협력을 얻어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귀의시켰고 특히 켄트 왕국에서는 몇 개의 교구를 설립했다. 605년경 5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597년에 약 40명의 수사들이 조그만 무리를 이루어 영국의 앵글로 색슨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다.

이 무리를 이끈 사람은 로마에 있는 그들 수도원의 원장인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들이 겨우 프랑스의 한 지방인 골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앵글로 색슨족의 포악함과 영국 운하의 믿을 수 없는 물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우구스티누그는 로마로 되돌아가서 그들을 파견한 대그레고리오 교황을 만났는데 그것은 그들의 공포가 근거가 없는 것임을 교황에게 확인받고자 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선교단은 다시 출발하여 이번에는 운하를 건너서 에텔버르트 왕이 통치하는 켄트 지역에 상륙했는데 이 왕은 그리스도인 왕비와 결혼한 이방인이었다.

에텔버르트는 그들을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고 캔터베리에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으며 그 해가 다 가기 전인 597년 성령 강림 주일에 그 자신이 세례를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랑스에서 주교로 성성된 후 캔터베리로 돌아와 그곳에 자신의 주교좌를 세웠다. 그는 1070년에 준공되어 오늘날까지 서 있는 현재의 대성당 자리에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신앙이 차츰 전파되어감에 따라 다른 주교좌들이 런던과 로체스터에 설립되었다.

 

선교 사업은 때때로 지지부진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도 언제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앵글로색슨족 그리스도인들과 앵글로 색슨족의 침입에 의하여 서부 잉글랜드로 쫓겨 간 브리튼 원주민 그리스도인들을 화해시키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브리튼족이 롭마와는 다른 몇 가지 켈트 관습을 포기하게 하는 것도 실패했고 그들의 쓰라림을 참고 자기를 도와서 정복자들인 앵글로색슨족을 복음화하자는 권고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노력하며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제시한 선교 원칙들 -당시로서는 상당히 계몽된-을 깊이 유념했다.

그것은 이방인의 성전과 관습을 파괴하기보다는 정화하고, 이교 예식과 축제를 크리스천 축제로 바꾸며, 가능한 한 지방 관습을 지속시키라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604년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영국에 도착한지 7년이란 짧은 시일에 이룩한 제한된 성공은 결국 영국의 회개에 있어서 장기적인 결실을 맺게 되었다.

참으로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국의 사도’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늘날 매우 인간적인 성인으로 부각된다.

그는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처럼 신경 쇠약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예를 들면 그의 첫 번째 영국행은 크게 우회하여 로마로 되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실수를 했으며 브리튼의 그리스도인들과 화평을 맺으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그는 때때로 자기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더 큰 자기 확신을 갖기 위하여 로마에 편지를 써 보냈다.

그는 심지어 그레고리오 교황으로부터 자존심에 대한 완곡한 경고를 듣기까지 했다.

 

교황은 그에게 "최소한으로 두려워하고 주어진 놀라운 일들을 받아들일 것이며, 자신감을 가짐으로써 연약한 마음이 부풀어 오르게 되도록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부분적인 성공만이라도 받아들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내심은 오늘날의 사도들과 개척자들에게 좌절감에도 불구하고 투쟁하며 점진적인 성취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보낸 편지에 대그레고리오 교황은 이렇게 썼다.

"높은 곳에 올라가려는 사람은 한걸음씩 올라가야지 뛰어서는 안 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로마에서 출생하여 로마 성 안드레아 수도원 원장으로 일하던 성인은 596년 교황 대그레고리오에 의해 영국으로 파견되었다.

그 후 성인은 켄터베리의 주교로 부임하여 수많은 개종자를 탄생시켰으며, 왕이 하사한 땅에 성당과 베네딕도 수도원을 세웠다.

여생을 켄트에서 복음 선교에 바치며, 런던과 로체스터 주교좌를 설정한 성인은 켄터베리의 대주교이자 영국의 사도로 추앙받고 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4세기에 민족 대이동이 있었을 때에 앵글로색슨족은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에 침입해

이미 그리스도교화한 토민들을 죽이고, 정복했으므로 그 지방의 교회도 한 때 전멸의 비운을 보게 되었다.

 

로마에 있는 베네딕토회 대수도원장 성 그레고리오는 590년경 선교사로서 브리타니아에 가서 앵글로 색슨족에게 전교하려고 애썼으나 그 전에 선출되어 교황위에 오르게 되었으므로 자기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설립한 베네딕토회 성 안드레라 수도원의 원장인 아우구스티노를 대신 파견하기로 했다.

전승에 의하면 그 당시 그레고리오는 로마에서 잘생긴 앵글로 색슨족의 청년 수명이 노예로서 매매되는 것을 보고 동정에 못 이겨 그들을 사들여 자유의 몸으로 해서 교리를 배우게 하고 세례를 준 다음 베네딕토회 수사인 선교사 40명과 같이 아우구스티노를 원장으로 596년경 고국인 영국에 파견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부임 도중 앵글로 색슨족의 잔학한 점이나 종교를 가장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화시키려는 결심마저 상실하고 로마로 돌아오려고 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교황은 서간을 보내어 그들을 타이르며 온갖 환난을 무릅쓰고라도 사도적 사명을 완수하라고 격려하고 보리타니아에 있는 왕후와 귀족들에게 보내는 소개장 등도 마련해 주었으므로 아우구스티노 일행은 이에 용기를 얻어 여행을 계속해 597년 초에 국왕 에델베르트가 있는 수도에 도착했던 것이다.

 

다행히 왕비 벨다는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프랑스 국왕 가리베르트의 딸로서 역시 신자였고 아우구스티노 일행의 사정을 은밀히 에델베르트에게 주선해 주었으므로 왕도 자발적으로 교리 공부를 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자국 내의 포교는 쾌히 승낙했다.

 

이리하여 아우구스티노 일행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중에 앵글로색슨족 사람들은

그들 선교사의 성스러운 일상생활을 보고 그리스도교가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복음을 듣고, 드디어 그 해의 성령 강림 대축일에는 일찍이 에델베르트 왕을 위시하여 귀족,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의 영세자가 나게 되었다.

 

이런 예기치 못한 대성공에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께 감사와 기쁨에 충만하여 다시 더 많은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그레고리오 교황에게 요청했던바 교황은 즉시 그의 원의대로 베네딕토회 수사 중에서 선교사를 보내며 아우구스티노를 캔터베리의 주교로 임명했다.

에델베르트 왕은 그의 주교좌로서 유명한 구세주의 대성전을 건립하고 또한 대대의 영국 국왕의 유해는 그곳에 매장하도록 결정했다.

 

그 뒤 아우구스티노는 한 층 더 열심히 분발해 전교에 종사하고 얼마 안 되어 앵글로색슨족의 거의 전부를 교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개종시킨 후에도 민중의 이교적 미신을 타파하는 데 결코 과격한 수단은 취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사랑과 친절한 태도로써 임하고, 그들의 이교시대의 예배당을 성당으로서 참된 하느님을 공경케 하고, 이교의 제사나 기타의 연중행사도 그리스도교적 색채를 붙여 행하는 것으로 허락함으로써 저절로 그들의 이교적 습관을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변경하도록 인도했다. 이 계획은 대성공하여 민중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신을 떠나 진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한편 앵글로 색슨인에게 정복된 영국의 구토인(舊土人) 브리타니아족의 구원도 결코 등한히 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이미 교회의 신자였으나 여러 가지의 사정으로 말미암아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으므로 아우구스티노는 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에세구스에 가서 어떤 때는 조용히 타이르고 어떤 때는 주님의 힘에 의지해 기적을 행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그들을 올바른 진리의 길에 돌아오도록 힘을 기울였으나 불행하게도 모든 노력은 허무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은총을 거역한 민족은 성인의 예언과 같이 주님의 분노를 사게 되어 원수의 손에 온전히 멸망해 버렸던 것이다.

브리타니아 인에 대한 전교가 아름답지 못한 것을 본 아우구스티노는 큰 하느님의 섭리로 그 끊임없는 기도와 활동의 생애를 끝마쳤다.

 

그는 세상에서 캔터베리의 첫 번째 대주교이자 영국의 사도로 추앙을 받고 있으나. 폴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헝가리 등의 개종도 영국에서 그 지방에 건너간 그의 동료인 베네딕토회의 선교사, 특히 성 보니파시오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우구스티노는 전 게르만 민족의 사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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