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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묵상글 모음

죄와 받아들임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15.
죄와 받아들임

죄와 받아들임

 

 

제가 25세가 되어서 처음으로 성소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개인적으로는 매우 힘든 시기였습니다. 한 번도 바뀌어 본 적이 없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인생관이, 어디에서 솟아나는지 모르는 뜬금없는 성소에 대한 희망 때문에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느님께 ‘제가 결혼해서 아이 많이 나아서 사제와 수녀를 많이 만드는 것이 당신께는 더 이익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만약 저를 사제성소로 불러주시는 것이라면 확실한 표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제 뜻을 꺾고 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라고 청하였습니다.

 

하루는 이런 고민을 혼자 하면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답답한 마음에 성당에 올라와 마당에 있는 성모상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동상이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술이 취하여 그런 줄 알고 눈을 비비며 더 자세히 쳐다보았는데 여전히 그 분의 살갗은 정말 사람의 살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에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고 감히 동상을 쳐다보지 못하였습니다. 눈을 들어 힐끗힐끗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다시 눈을 들어보니 이젠 예전처럼 그냥 동상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술에 너무 취하여 헛것을 본 것이라고 스스로는 겸손한 결정을 내리고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술에 취해 헛것을 본 것이라고 생각하려 한 이유는 제 스스로가 사제가 되기 싫어서 어떤 표징도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지 참다운 겸손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기 위해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시고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하며 정말로 그물을 내리니 그물이 찢어질 듯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때의 베드로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이것이 겸손의 모습일까요?

예수님께서 게라사 지방에 가서 무덤에 살던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물론 그 마귀들은 돼지 떼에 들어갔고 돼지 떼는 다 물에 빠져죽고 맙니다. 그 때 그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께 달려와서 자기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예수님을 그 지방을 떠나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나 게라사 지방 사람들에게나 표징을 보여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럴만한 사람이 못 되어서 그 분을 떠나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받는 것이 두려워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겸손의 탈을 쓴 교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참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하고 그 분을 따랐지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합니다. 아직 온전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있지 못했고 아직도 그 분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부족한 면은 예수님께서 그의 발을 씻어주시려 하실 때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발을 씻으려고 하시자, “주님,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역시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발을 씻으려고 하는 것, 즉 그 분이 그렇게까지 자신 앞에서 낮아지시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는 겸손의 말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베드로는 자신은 그렇지 못한데, 예수님은 그렇게까지 자신을 사랑해주시는 것이 부담되어 그 사랑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가지지 못한다.”

즉 당신이 하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과 아무런 관계가 아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사랑하지 못하기에 더 큰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죄란 하느님과의 관계를 원치 않기에 그 분과 그 분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와는 먼저 하느님의 뜻보다는 유혹자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하와의 뜻을 받아들여 함께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이 첫 부부가 모든 인류의 조상이 되어 그 죄를 모든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죄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기에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왕족일 수 있었던 이들이 그 신분을 스스로 포기하고 천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천민이 낳는 아이들은 누구나 천민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분상승을 위해서 우리는 다시 왕족의 부모로부터 태어나야합니다. 왕족은 임금의 가족들이고 임금의 뜻을 받아들이는 이들입니다.

 

성모님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겠느냐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순종합니다. 구세주가 된다는 것도, 구세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도 인간 모든 죄의 보속을 위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하시는 것도 잘 아시고 계셨지만,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하며 겸손한 탈을 쓰고 하느님 뜻을 사양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교만이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더 내세우는 것이라면, 참된 겸손은 자신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시게 되었고 두 분의 하느님께 대한 순종으로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 두 분의 후손으로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첫 조상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잃었던 하늘나라 백성의 시민권을 새로운 조상인 그리스도와 마리아를 시작으로 되찾게 된 것입니다.

 

남자 혼자, 혹은 여자 혼자 자녀를 출산하지는 못합니다. 둘이 함께 자녀를 출산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죄의 백성이 출산되었다면,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순결함으로 죄 없는 백성이 출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혼자만 깨끗한 제물이 되어 인류를 구원했다고 생각한다면, 하느님 아버지 혼자만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혼자 세상을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사도요한도 세상 어떤 것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겨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은 성령님 안에서 남-여 짝을 이루어 탄생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죄에 물들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짝으로서 새로운 죄 없는 세대를 탄생시키는 어머니의 역할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조차도 성모님으로부터 인성을 취하시는데 만약 성모님이 죄에 물드신 분이었다면 예수님도 그 죄 있는 육체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조차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하느님을 당신 안에 온전히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아주 조금의 죄도 없어서 온 우주보다도 크신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였다는 사실 자체가 하와의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게 했던 죄가 전혀 없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브리엘의 인사처럼 성모님만이 은총이 가득하시고, 성령님으로 가득차시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시고 사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런 의미로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바로 나의 구원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남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서 당연히 원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을 받아들여 세상에 오시게 하실 수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렇게 세상에 오신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리스도의 원죄 없음도 부정하는 것이고, 그래서 나의 구원도 온전할 수 없음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심은 우리 구원과 직결되는 교리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수원교구 오산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