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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묵상글 모음

소통(疏通)의 비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by 파스칼바이런 2012. 1. 2.

소통(疏通)의 비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비가 많이 내리던 날 한 자매님이 비에 젖어 성당으로 들어와 저와 상담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집무실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신 안에는 마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길을 지나는데 자신 안에 있는 마귀가 이 성당에 들어가 보좌신부와 상담을 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사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또 마귀와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교만과 육욕과 세상 것에 집착해 사는 사람이라고 해석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외로운 사람이고 그래서 자기 자신이나 마귀와도 사귈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제 예상대로 그 자매는 보험 설계사를 하면서 경쟁을 하여 남들 위에 서기 위해 노력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마귀와 밤에 관계를 한다고 하며 실제로 남자와 사귀어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임을 자신도 인정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디 사는지 다시 궁금해져서 “서울 목동 사신다고 했나요?” 라고 물었더니, 목소리가 목이 쉰 남자 목소리로 변하며, 저를 무섭게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언제 목동이라고 했어요? 마포라고 했지.”

비도 오고 작은 방에 둘이 있는데 그렇게 변하는 모습을 보니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러나 겁먹은 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되었기에 오히려 제가 야단을 쳤습니다.

“자매님은 한 번 들은 걸 다 기억하세요?”

그랬더니 다시 수그러들었습니다.

 

역시 이런 분은 자아가 너무 강하여 남이 실수하는 것을 못 받아줍니다.

또 남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대화의 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니 외로워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저 기도 해 주고 보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게 됩니다.

사회적 동물이란 이유는 혼자서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다운 삶이란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삶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알지 못하면 끝까지 남자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자신이 남자임을 알게 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할 때 비로소 참으로 여자가 됩니다.

결혼한 여자는 임신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게 되고, 또 젖을 먹이는데, 그런 모든 경험들은 관계 맺지 않으면 알 수도 또 체험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모든 관계는 서로를 알아가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한 사람이 누구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대충 이름과 나이까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아픈 상처는 없는지, 주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종교관은 무엇인지를 대화를 통해 알아갑니다.

이렇게 서로 알아가면서 서로는 서로의 심장 속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문제는 서로 소통이 되지 않을 때입니다.

소통의 문제에 대해 장자는 이러한 비유를 듭니다.

 

노나라 시절입니다. 창가를 보고 있던 임금 앞에 바닷새 한마리가 날아들어 왔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임금은 그 바닷새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바닷새를 위해 매일 잔지를 열었고 귀한 음식과 술을 주고 풍악을 울렸습니다.  하지만 그 바닷새는 시름시름 앓다가 사흘 뒤에 죽고 맙니다.

 

노나라 임금은 자기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바닷새를 자기 식으로만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관계 맺기 위해서는 자신을 떠나서 상대 안으로 들어가 상대의 언어를 배워야합니다.  따라서 자아가 강한 사람은 항상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장자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상대를 보려고 하는 폭력적인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로 비유합니다.

무너진 우물 안 개구리가 저 멀리 넓은 동해에서 온 자라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 무너진 우물이 좋아. 밖으로 나가면 난간 위에서 뛰어놀고, 안으로 들어오면 벽돌 빠진 구멍 속에서 쉴 수 도 있어. 겨드랑이까지 물이 차오르게 하고, 턱을 받치고 놀지. 진흙을 차고 놀 때는 발등까지 흙에 묻히고 말이야. 장구벌레, 게, 올챙이 모두 나를 부러워하지. 웅덩이 물을 독차지해서 마음대로 노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몰라. 자네도 들어와 보겠나?”

 

동해에서 온 자라는 왼발을 미처 우물에 넣기도 전에 오른쪽 무릎이 걸려 꼼짝할 수 없게 되자 뒤로 물러나 개구리에게 동해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놀던 바다는 천리 거리로도 그 크기를 말할 수 없고, 천리 길이로도 그 깊이를 말할 수 없다네, 우(禹)임금 때 10년 동안에 아홉 번이나 홍수가 났지만 그 물이 불어나지 않았고, 탕(湯)임금 때는 8년 동안에 일곱 번이나 몹시 가물었지만 바닷물이 줄지 않았어. 시간이 길거나 짧다고 변하지도 않고, 비가 많거나 적다고 불어나거나 줄어드는 일도 없는 것. 이것이 동해의 큰 즐거움일세.” <장자의 우물 안 개구리에서 발췌>

 

노나라 임금이 바닷새에게 폭력을 가한 것이 우물 안 개구리가 자기가 아는 전부로 상대를 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는 소통도 관계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거북이의 말을 믿고 우물을 빠져 나와 바다로 향하면 관계는 시작되고, 그렇지 않으면 또 혼자 자신의 세계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소통(疏: 트일 소, 通: 통할 통)이란 말 그대로 막힌 것이 트여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벗어나 상대 쪽으로 가지 않으면 소통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를 떠나 상대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인간 안으로 들어오셨고, 지금도 말씀과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기에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줄 아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저도 유학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공부가 싫기도 했지만 새롭게 언어를 배우고 알지 못하는 곳에 적응해야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떠났더니 더 풍요로운 저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다른 언어나 문화, 신학까지 익히고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소통하면 이렇게 상대가 내 일부분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떠나기까지가 얼마나 힘든지요.

 

우리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이 당신을 떠나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셔도 우리가 계속 우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그 분과 한 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만이 흠도 티도 없이 순결한 까닭에 자신을 온전히 떠나 그 분 나라로 들어갔고 그 분의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또 하느님도 자신을 떠나 성모님 안으로 들어와 사람이라는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인간이 되시고, 인간은 하느님이 됩니다.

온전히 자신을 떠날 줄 아셨던 마리아 안으로 온전히 들어오신 하느님은 성모님으로부터 사람이 되는 모든 것을 받고 배우셨기에, 하느님이시면서도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십니다.

 

오늘 갑자기 부탁을 해서 이미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한 부부에게 관면혼배를 해 주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7살짜리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매일 지나다니며 보던 저희 성당에 다니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중학교 때부터 냉담하던 아버지가 냉담을 풀고 신앙이 없는 어머니는 교리 반에 들기로 하였습니다.

그 꼬마 아이는 매일 다니던 그 길옆에 있는 성당에 들어와 보고 싶었던 것이고 지난주에 부모님을 데리고 성탄 미사에 오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준 어린이는 이미 누구와도 소통할 준비가 되어있는 깨끗한 영혼인 것입니다.

성모님은 그런 어린이의 영혼처럼 가장 먼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 하느님을 만났고 또 우리도 함께 들어가 그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동해에서 온 거북이만이 바다의 넓고 깊음을 알듯이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소통한 성모님만이 그 넓고 깊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 넓고 깊은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이 가져온 사랑의 증표인 그리스도를 보며 우리도 바다로 나오라고 손짓하고 계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수원교구 오산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