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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이달의 성인] 성 빈센트 페레르(1350-1419)

by 파스칼바이런 2012. 3. 7.

 

[이달의 성인] 성 빈센트 페레르(1350-1419)

윤 클레멘트 신부

 

 

도미니코회의 수도사제였고 유명한 설교가였던 그는 스페인의 발렌시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 이름이 영국인 성씨인 것은 그의 아버지가 영국인 윌리엄 페레르인데, 스페인에서 정착하고 스페인인 어머니 코스탄자 미구엘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머리가 명석하고 신심이 깊었던 그는 어린나이에 도미니코 수도회에 들어가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한 끼를 단식하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와 동정녀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을 배웠다.

 

그는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이미 카탈로니아의 레리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는데, 1374년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 사제로 서품된 후에는 바르셀로나에서 가르쳤고, 그 후 톨레도로 가서 신학과 히브리어를 더 공부했다.

 

그는 스물아홉이 되던 해에는 발렌시아의 도미니코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는데, 그는 자신의 수도회와 교회를 위하여 온전히 헌신한다.

그는 랍비 바울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을 성공적으로 개종시키는데, 후에 랍비 바울은 카르타지나의 주교가 된다.

 

그의 절친한 친구 중에 위대한 교회법 법률가인 루나의 베드로 추기경이 있었는데, 그는 제노바의 추기경 로버트를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로버트 추기경은 당시의 클레멘스 7세의 교황 선출을 무효로 선언하고, 아비뇽에 또 하나의 교황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후에 루나의 베드로 추기경 자신이 교황과 대립하며 아비뇽에서 교황 레오 13세가 된다.

처음에는 기쁘게 자신의 친구인 교황을 도왔지만, 결국은 자신의 친구인 교황 레오 13세가 교회의 일치와 사랑을 추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방어하는 데에 더 기울이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를 떠나기로 한다.

 

그는 마흔아홉이 되던 1399년에, 친구인 루나의 베드로 교황이 있던 아비뇽을 떠나, 본래의 자신의 모습인 선교사 겸 설교가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로부터 13년간을 그는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참회와 회심을 설교했다.

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오고 고백성사를 보았으며, 수도생활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는 주로 죄, 죽음과 지옥, 심판, 영원함 등에 대한 것들이었는데, 그의 강론은 참으로 힘이 있고 열정적이었으며 듣는 이들은 곧 그들의 죄를 뉘우치고 돌아와 고백성사를 보곤 하였다.

몇 명의 동료 사제들이 그의 설교와 선교 직무들을 돕기도 하였다.

 

수많은 설교 여행으로 많은 이들을 회심케 했던 그는 또한 교회일치를 위해서도 용기 있게 말하곤 했는데,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친구였던 레오 13세와 수많은 주교와 추기경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말라빠진 뼈들과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417년에는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교회일치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

 

[2009년 3월 29일 사순 제4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금주의 성인] 성 빈첸시오 페레르

(St. Vincent Ferrer, 4월 5일)

1350-1419. 스페인 발렌시아 출생. 사제. 설교가

 

 

성 빈첸시오 페레르는 시대의 명 설교가로 이름을 널리 떨쳤습니다.

성인은 몸과 마음을 다해 하느님 말씀을 전했고 또 자신이 말한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보여줬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스페인은 물론 프랑스와 스위스 등 여러 국가를 돌며 하느님 사랑과 신앙의 신비를 전달했습니다.

성인이 이같은 명 설교가로 거듭난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부르심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똑같은 말을 해도 성인의 입을 거치면 영적 기운이 한껏 감돌았습니다.

성인의 설교에 감동한 많은 이들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인은 스페인어로 이야기했지만 프랑스 사람에겐 프랑스어로, 영국 사람에겐 영어로 들렸다고 합니다.

넓은 광장에서 연설할 때 맨 멀리 떨어져서 성인이 보이지도 않는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에게까지 성인의 말이 또렷하게 전해졌습니다.

 

성인은 꿈에 예수 그리스도가 성 도미니코,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나타나 사람들의 죄를 경고하고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고 알릴 것을 계시받았습니다.

이러한 계시는 성인이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하느님 말씀을 전한 원동력이었습니다.

 

18살 나이에 도미니코회에 입회한 성인은 기도하듯 공부하고 공부하듯 기도하는 생활로 자신을 가르치던 교수들을 뛰어넘는 학식을 지니게 됐습니다.

물론 철저한 금욕적 생활로 영성도 함께 높아졌습니다.

 

성인의 설교에는 이같은 성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나 있었기에 많은이들이 감화됐던 것이 아닐까요.

 

성인은 이 밖에도 당시 두 명의 교황으로 나뉘어 분열된 교회를 거침없이 비판하며 교회 일치와 통합을 위해서도 노력했습니다.

 

[평화신문, 2010년 4월 4일, 박수정 기자]

 


 

 

 

천주의 설교자회(도미니코수도회)에서

정의의 천사인 명 설교가 - 축일은 4월 5일

 

 

중세기 뛰어난 설교가 중의 한 사람인 성 빈첸시오 페레리오는 1350년 스페인의 「발렌시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성모에 대한 신심이 남달리 두터웠던 빈첸시오 페레리오는 18세에 도미니꼬 수도원에 들어 갔다.

 

「바르세르나」, 「빠리」등지에서 신학 공부에 전념했던 빈첸시오 페레리오는 3년 동안 성서만을 완독, 성서를 완전히 외웠으며 1384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설득력 있고 감동적인 강론으로 「정의의 천사」라 불리웠던 빈첸시오 페레리오는 스페인은 물론 스위스ㆍ프랑스ㆍ이태리ㆍ잉글랜드ㆍ스코틀랜드ㆍ아일랜드 등지를 돌아다니며 강론을 행했다.

 

빈첸시오 페레리오는 하느님으로부터 신기한 능력을 부여 받았는데, 그 중 하나는 그의 강론을 듣는 각 나라 사람들이 그가 「스페인」어로 강론을 해도 각자의 모국어로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또 그의 강론을 들은 수천 명의 죄인들이 회개하였을 뿐아니라 유대인 및 비기독교인ㆍ우상숭배자들도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강론 전에 꼭 기도를 바쳤던 빈첸시오 페레리오는 항상 엄한 대제를 지키고 기도에 힘썼으며,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회개한 자와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또한 빈첸시오 페레리오는 수많은 병자들과 절름발이 등을 치유해 주기도 했다.

 

『무슨 일을 하든 너 자신을 생각지 말고 하느님을 생각하라』는 것을 그의 모토로 삼았던 빈첸시오 페레리오는 1419년 4월 5일 프랑스 「완누」에서 눈을 감았다.

 

위대한 설교가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는데 일생을 바쳤던 성 빈첸시오 페레리오의 측일은 4월 5일이다.

 

[가톨릭신문, 1982년 4월 4일]

 


 

축일 4월 5일 성 빈첸시오 페레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