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12월 27일 성 요한(John) Saint John, Apostle and Evangelist San Giovanni Apostolo ed evangelista St. Jannes, Ap. Evangelista 신분: 사도, 복음사가 활동연도: +100년경? 같은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성 요한(Joannes)은 갈릴래아의 어부로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야고보(Jacobus, 7월 25일)의 동생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겐네사렛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삯군들과 배를 남겨둔 채 예수를 따라 나섰다(마태 4,21-22; 마르 1,19-20; 루카 5,10-11). 이들 형제는 성격이 매우 급하고 또 흥분을 잘 하였기 때문에(마르 10,35-41), 예수님은 그들을 '천둥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마르 3,17).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중요한 행적, 예를 들어 예수님이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렸을 때(마르 5,37; 루카 8,51),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마태 17,1; 마르 9,2; 루카 9,28), 게세마니(Gethsemane) 동산의 기도(마태 26,37; 마르 14,33)와 같은 극히 중요한 시기에 베드로(Petrus)와 함께 예수님 곁에 있었다. 또 성서 여기저기에는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라는 인상을 주며, 최후의 만찬 때에 스승의 가슴에 기댔던 사람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그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맡기셨다(요한 19,25-27). 뿐만 아니라 부활 아침에는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달려갔고(요한 20,1-5), 그분의 부활을 믿었으며,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보았다(요한 21,7).
사도행전에서도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활동하며 투옥당하기도 했다. 성 바오로(Paulus)는 야고보와 게파(베드로)와 함께 요한을 일컬어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렀다(갈라 2,9). 후일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진리를 증언한 탓으로 파트모스(Patmos) 섬에서 유배생활을 했고(묵시 1,9), 에페수스(Ephesus)에서 여생을 지내다가 그곳에서 수를 다하고 선종하였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예로니모, 9월 30일)에 따르면 성 요한은 너무나 연세가 높아서 군중들에게 설교할 수 없었고, 다만 간단한 말만 하였다고 한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신약성경의 네 번째 복음서와 서간 3개 그리고 묵시록은 성 요한의 저작물이라고 전해져온다. 사도 요한의 문장은 독수리이다. 그 이유는 요한 복음서의 서두가 매우 높은 위치에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요한 1서 주해]에서 (Tract. 1,1.3: PL 35,1978.1980)
생명 자체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말씀을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육신이 되신 이 말씀께서 육신을 취하신 것은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복음 사가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라고 말할 때 표현하는 대로 말씀의 존재는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방금 들은 서간의 말씀은 다음의 복음서 말씀으로 확증됩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여기에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손으로 만져 본 그리스도의 실제 몸이 아니고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요한은 덧붙여 말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어떻게 나타나셨습니까?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지만 아직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당신을 보고 천상 빵으로 받아 모시는 천사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무엇을 또 말합니까? "마침내 사람들도 천사의 빵을 먹게 되었다."고 성서는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생명 자체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나타나심으로 영적으로만 볼 수 있었던 것이 육신의 눈으로도 볼 수 있게 되어 영혼이 치유되었습니다. 사실 말씀은 영적으로만 봅니다. 그러나 육신은 육신의 눈으로도 봅니다. 우리가 육신을 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씀으로 볼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신이 되시어 우리 마음을 고쳐 주심으로 말씀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신이 되시어 우리 마음을 고쳐 주심으로 말씀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복음 사가는 또 말합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라는 이 말을 좀더 명확히 말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나셨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들어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사도들은 육신으로 현존하시는 주님 자신을 보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실제로 들어 그것을 우리에게 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듣기는 했지만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직접 보고 들은 사도들보다 덜 복된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만일 우리가 덜 복된 사람들이라면 복음사가는 다음 말씀을 덧붙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과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았지만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그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입니다." 그리고 복음 사가는 다음 말씀으로 끝마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글을 써보냅니다." 충만한 기쁨은 바로 이 친교에, 이 사랑에 그리고 이 일치에 있습니다.
복음사가의 상징(福音史家의 象徵)
마태오는 그의 복음이 예수님의 인간성을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어 사람의 얼굴로 나타낸다(편집자 주 : 세리 출신이었던 마태오 사도는 은행원과 회계업무자의 수호성인으로 보통 장부를 펼쳐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진다).
그리고 마르코는 그리스도의 품위를 강조했고, 복음의 서두가 사자의 울음처럼 장중하게 시작되므로 사자로 나타냈다. 또한 황소는 주로 제사의 제물로 쓰이는데 루카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를 대신 속죄하는 제사라고 묘사했기 때문에 황소로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창공을 높이 나는 독수리처럼 예수님의 신성을 기록했기 때문에 독수리로 나타냈다.
* 마르코복음: 종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책(민중공동체) - 사자. * 마태오복음: 왕이신 그리스도께 관한 책(예수님 추종 공동체, 교리교사의 복음서) - 사람. * 루카복음: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책(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 - 소. * 요한복음: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책(섬김, 나눔의 사랑의 공동체) - 독수리.
St John Resting on Jesus’ Chest-UNKNOWN MASTER, German c. 1320. Walnut, 141 x 73 x 48 cm. Museum Mayer van den Bergh, Antwerp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 성 요한
이 조각품은 보면 볼수록 많은 사람에게 평화스럽고 따뜻한 인상을 주어 명상하는 데 좋은 작품이다. 20대의 젊은 예수님에게 십대 후반인 요한이 몸을 기대고 있다. 마치 절친한 친구에게 전적인 믿음을 가지고 의지하고 있는 이 장면은 형님과 아우와 같은 우정을 표현하고 있다.
우선 조각된 두 인물 사이에는 간격이 없이 밀착되어 있어 절친한 친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마치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인상을 준다. 요한의 오른 손바닥은 예수님의 오른 손바닥에 포개어 놓고 있고 예수님의 왼손은 요한의 어깨를 부드럽게 사랑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이것은 농도 짙은 영적인 사랑의 교감(交感)에서 나오는 행위이며 신뢰인 것이다.
예수님과 요한 두 사람의 복장도 친밀감과 우정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어 부드럽고 평화스런 느낌을 준다. 이 조각품은 원래 수세기 동안 수녀원 명상의 방에 있던 작품이라고 하는데 수녀들에게 이 작품을 통하여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사실 기도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야 함을 본보기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도는 질문하거나 이야기하는 시간이라기보다 사랑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하여 기도란 신(神)의 마음에 나의 머리를 기대는 것이며 그 분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는 완전한 복종을 의미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이 보여 주는 것처럼 신에 대한 완전한 복종은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는데 우선적으로 앞서야 하는 것이다.
(글.정지풍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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