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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사진>/▣ 세계명화산책

폴 세뤼지에(Paul Serusier)

by 파스칼바이런 2013. 7. 25.

폴 세뤼지에(Paul Serusier)

1864년 11월 9일 ~ 1927년 10월 7일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전위 예술 나비파 운동, 생테티슴, 클루아조니즘의 영감을 준 프랑스의 화가.

 

교육

세뤼지에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0년대 중반에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하면서 반장으로 지냈다. 1888년 여름에 퐁타방으로 여행을 가서 폴 고갱 주변의 소규모 미술가 그룹에 참가하였다. 퐁타방 미술가 부락에 있는 동안 그는 고갱의 면밀한 관리 아래에 《부적》(The Talisman)으로 알려진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순수 추상미술에 가까운 클루아조니즘의 극심한 훈련이었다. 그는 나비파라는 화가 그룹의 일원으로서 후기인상주의 화가가 되었다. 세뤼지에는 폴 고갱과 함께 이 그룹의 이름을 지었다. 피에르 보나르, 에드와르 뷔야르, 모리스 드니는 이 그룹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이 되었으나 당시 그다지 중심이 되는 인물들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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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파(Nabis 派)는 고갱에게 영향을 받은 폴 세뤼지에(Louis-Paul-Henri Serusier, 1863~1927)가 파리의 젊은 화가들을 모아 이룬 집단이다. 인상주의에 염증을 느낀 젊고 반항적인 화가들이 주 였다.

 

히브리어로 예언자라는 의미인 '나비'는 자신들의 미술이 과거의 종교의 기능을 대신한다는 뜻으로 시인 카자리스(Henri Cazalis)가 붙였다. 나비파의 대부분은 파리의 콩세르 고등학교와 세뤼지에가 간사로 있던 아케데미 쥘리앙을 다니던 이들이었다. 반항적인 젊은이였던 이들은 보라리 가(街)의 카페에 모여 고갱의 작품경향을 토론하였고 제식적인 저녁식사를 가졌으며 세뤼지에의 작업실을 '사원'으로 불렀다. 인상파가 말 그대로 자연의 인상 - 미묘한 색채 - 을 분석해 묘사하는 것이라면 나비파는 작가 자신의 내면을 분석하여 화면을 완성해 나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나비파 작품 안의 형태나 색채는 현실과는 상관없이 작가의 해석으로 좌우됐다. 하지만 1900년 이후 나비파의 화가들은 나비파라는 흐름 속에서도 자신만의 강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류가 줄어들었고, 1903년 나비파를 후원해 주던 〈라르뷔 블랑슈(La Revue Blanche)〉가 폐간되자 해체되었다.

 

나중에 그는 아카데미 랑송에서 교육을 하였고 1921년에 ABC 《회화 첫걸음》(de la peinture)을 출판하였다. 그 뒤 모흘레에서 사망하였다.

 

 

폴 세뤼지에의 작품 《부적》(Le Talisman)

1888년 판화, 27 x 21.5 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강변의 세탁부》(Laundresses at the River)

1892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Boys on a Riverbank 1906년

 

《풍경》(Landscape) 1912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Breton Wrestling Match

1894 / Oil on canvas, 92 x 73 cm

Mus?e d'Orsay, Paris

 

Melancholy 1890년

 

폴 랑송의 초상화

1890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