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담 원인 분석 / 그 예방을 위한 기획
냉담자 문제는 영영 풀리지 않는 한국천주교회의 숙제로만 남을 것인가? 복음화의 최대장애는 역시 냉담자 증가에 있음이 지적됐다. 이에 왜 한국교회가 그토록 많은 냉담자를 낳고 있는지, 그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들이는 방안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이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여러가지 이유로 냉담에 빠진 그들의 고백을 통해 과연 무엇이 문제이고 교회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함께 지혜를 모으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1. 개신교서 개종 후 냉담한 경우
이미현씨(가명. 아녜스. 35세)는 국민학교 5학년 때 친구따라 예배당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개신교 신자가 됐다. 그러나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학교 앞에 성당이 있었던 관계로 자연스럽게 가톨릭의 분위기를 접하게 됐고 자신의 종교적 심성이 개신교 쪽보다는 가톨릭 쪽에 더 많이 기울고 있음을 발견하게 됐다.
언제부턴가 예배당에서의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텅 빈 성당엘 들러 묵상을 하고 제대 주변을 서성이며 개종의 싹을 키워온 이씨는 대학 1학년 때 드디어 예비자 교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인연이 닿지 않아서 인지 세례를 받지 못하고 졸업 후 우여곡절 끝에 지난 87년 가톨릭에 입교하게 됐다.
이후 이씨의 개종에 자극 받은 가족과 일가친척들의 갈등은 시작됐다. 개신교 신학대학 학생이었던 사촌오빠의 {마리아교} {마귀교} 라는 비방에 시달려야 했으며 개척교회 목사의 열성 등은 이씨의 개종에 따르려는 모친과 일가친척들의 심정을 혼란으로 몰고 가기만 했다. 이씨 자신도 어머니를 포함해 일가친척들에게 굳이 개종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오랜 세월을 두고 가톨릭 교회를 접해오면서 분명한 동기와 확신을 갖고 개종했지만 가족들이야 단순히 [거름지고 장에 가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개신교와 비교해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가톨릭으로 무작정 개종한다는 것이 이씨가 생각하기엔 위험할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것도 하느님의 뜻인가? 어머니를 포함해 이모와 외숙모 사촌언니등 6명이 영세하는 계기가 생겼다. 개신교의 고질적 병폐중의 하나인 분파싸움이 벌어지고 목사와 장로가 대립하는 것을 보고 말로만 사랑을 부르짖는 지도자들의 위선에 갈등을 느껴온 이들은 이씨의 삼촌이 대세를 받고 죽은 후 장례를 치르는 동안 신자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봉사에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6개월 예비자 교리를 받고 88년 가톨릭에 입교한 이씨의 모친과 일가친척들이 그러나 영세와 함께 적응에의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첫째는 개종자를 고려한 예비자 교육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그 결과 이들은 성모신심과 고해성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개신교에서 마리아교니 우상숭배니 하며 귀가 따갑도록 세뇌되어온 이들에게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또한 통성기도 등으로 직접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던 이들이 [다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 신부에게 죄를 고백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많았다고 말했다.
둘째는 교회와 함께 제 단체들이 지니고 있는 두터운 벽을 뚫고 들어갈 수 가 없었다고 말한다. 봉사활동에 관심이 많아 빈첸시오회에 가입했던 이씨의 사촌언니는 {따돌림을 받는 기분이었다} 고 말했다. 개신교에서의 왕성한 활동에 비추어 막상 가톨릭 교회에서는 자신이 설자리가 없었다고, 그 기득권을 가진 신자들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성직. 수도자 등 교회 지도자들의 무관심을 들었다. 예비자 교리 6개월 동안 한번도 진지한 대화 시간을 가질 수 없었고 영세 후 가정 방문은 물론 몇 년째 냉담하고 있어도 대모를 포함해 누구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개신교 목사는 가정방문을 통해 기도를 해주는 것은 물론 집안의 경조사를 일일이 다 챙겨주고 심지어 식구들 생일날이면 어김없이 카드를 보내주는 등 정성이 대단했다고.
아무튼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주일미사는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오던 이들은 이씨의 부친이 교통사고로 인해 사망하는 것을 계기로 냉담 길에 들어섰다. 가족들의 개종 후 사업이 번창해 이웃의 부러움속에 살아온 이씨의 부친은 마음으로 영세준비를 해왔다. 그러던 중 89년5월 공장을 증축하고 축복식을 가졌는데 공교롭게도 그 다음날 사고를 당했던 것.
이를 계기로 가족들은 {천사같이 좋은 일 하고 베풀며 사는데 웬 날벼락이냐} 며 신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씨의 모친은 최근 들어 신앙을 되찾고 레지오 활동에 열심이다. 모친이 신앙생활을 재개하기까지는 이씨와 몇몇 신자들의 특별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여전히 냉담중에 있는 일가친척들을 보는 이씨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개신교는 신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 개개인에 관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인도하고 있는 반면 우리 가톨릭 교회는 주일미사에 빠져도 누구 하나 관심 갖는 사람이 없다} 고 말하는 이씨는 우리교회, 교회내 단체, 신자 개개인의 벽이 너무나 두텁다고 지적한다.
비록 교회가 신앙인의 집단이지만 인간적인 의지처를 잃게 되면 신앙생활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는 이씨는 당장 성직자나 수도자 혹은 평신도들이 냉담자를 찾아 나선다면, 그래서 그들이 인간적인 정과 신뢰를 느낄 수 있다면 의외로 쉽게 교회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2. 이혼으로 냉담한 경우
무역업을 하고 있는 우남씩씨(가명.요한 34세)는 넉살이 좋다고 할만큼 사교성이 강하고 모든 일에 앞장사는 활력이 넘치는 대표적인 30대 중반의 남자다. 우씨는 부모님들의 영세입교로 국민학교 3학년때 세례를 받고 주일학교에 다니면서부터 특유의 친화력으로 선후배들과 어울리며 학교와 성당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성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랐다.
우씨는 대학교 재학중에는 상당기간을 교리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쳐왔고 이 시기에 같은 본당의 교리교사와 사랑에 빠져 교사회 속에서도 공인될 커플로 지내다 7년간의 열애끝에 5년전에 결혼했다. 결혼당시 의욕적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나 여러가지 어려움으로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던 우씨는 결혼할때 당분간은 아이를 갖지 않기로 아내와 합의하고 아내도 우씨의 성공을 위해 여러모로 어려움을 견뎌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씨는 그동안 사귄 성당친구들과 모임도 가지고 그런대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고정적인 수입이 없이 가계의 어려움이 계속되자 아내와의 불화가 잦아졌고 우씨는 친구와 비교되는 자신의 처지와 아내와의 불화등으로 미사에 자주 빠지게 되었고 그리 신앙심이 깊지않던 양가에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것을 권유하지도 않았다. 우씨는 미사를 궐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렸으나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상담할 곳이 마땅치 않았고 부모님집에서의 상담도 신앙 문제는 늘 뒷전으로 취급됐다.
결국 결혼 2년만에 이혼에 이르고만 우씨는 그길로 냉담하게 되었다. 우씨는 이혼의 상처가 아물즈음 성당에 다시 나갈 생각을 가지기도 했으나 이혼자체가 큰 죄라는 생각때문에 냉담생활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이혼후의 신앙생활에 대해 본당신부와 상의해 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우씨는 {이혼문제로 상담을 해보았지만 [이혼해서는 안된다. 무조건 참고 살아라]고만 할뿐 별다른 말이 없었고 이혼후 신부님이 이혼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역시 소식이 없었다} 며 이혼한 자신에 대한 신자들의 눈총이 따가워 성당에 나갈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이혼 사실을 아는 신자 친구나 어른들 역시 신앙문제에 대해서 별반 언급을 하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는 등 일반적인 대화만 해왔고 이혼후 성사생활에 대해 대다수가 부정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오랜 기간의 주일학교 활동과 교리교사를 지낸 우씨의 경우를 취재하면서 먼저 느낀 것을 우리 교회가 신앙생활을 잘 하는 울타리 안의 양들만을 대상으로 사목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이혼자체로 어떤 제재를 가하지는 않는다. 재혼하지 않는 한 성사생활도 할 수 있고 교회의 모든 활동에 참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혼한 신자들은 스스로를 단죄하고 냉담에 이른다.
따라서 교회는 보다 적극적으로 이런 길 잃은 양을 위한 사목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이혼자를 돕고 그들이 자신을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염려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라고 사목자와 전신자 공동체에 호소하는 바이다. 그들은 세례받은 자들로서 교회생활에 참여할 수 있고 진정 참여해야 하는 까닭이다(가정공동체 84항)는 말씀처럼 교회 또한 이런 입장을 너무도 잘 견지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떨어져 나간 신자에 대해 그들 자신의 문제로만 맡겨두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교회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때 늘 거론되는 친교의 부족은 바로 이런 점에서도 나타난다. 우씨의 경우 주변의 많은 신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위로하고 사랑의 상처를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면 그들에게 인간적으로 의지해서라도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씨도 이 부분을 가장 아쉬워했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정기도의 부족이다. 특히 신세대 부부 가정일수록 이 부분은 약한데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현 사회추세와 맞물려 신앙인이면서도 자신들의 문제를 일차적으로 신앙적으로 해결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이 현추세다. 우씨의 경우 결혼 초엔 두 사람 다 교리교사출신으로 두어달은 아침저녁 기도를 같이 바쳤으나 시간이 지난 수록 각자 기도생활을 하거나 아예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근의 교회내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혼자 기도하는 경우가 76.8%로 신앙이 자꾸 개인적으로 되어가는 추세다. 이에 대해 한 사목자는 {교회는 친교의 공동체이므로 신앙은 사회성을 가져야하고 이렇게 함께 하는 가운데 희생과 봉사라는 교회정신을 실천하게 된다} 면서 개인적인 신앙을 고집하는 것은 결국 이기적으로 흘러 신앙과 생활을 유리시키게 된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80년에 23건의 혼인중 1건 84년 10건의 혼인중 한건, 90년 8.5건의 혼인중 한건, 92년 7.9건의 혼인중 한건, 현재는 6건의 혼인중 한건으로 점차 늘어가고 있으며 신자들도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우씨의 경우처럼 결혼 5년만의 경우가 전체 이혼의 40%를 차지하고 있어 그 심각성이 더하고 있으며 우씨는 이혼전에 교리적인 대화만이 아니라 이혼자체까지도 고려한 솔직한 상담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분위기와 창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3. 사목자와 불화로 냉담한 경우
중년의 황진식(가명.46세)씨는 10여년전 친구의 권유를 받고 영세한 후 성당에 다니면서 같은 나이의 중년신자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아 레지오 주회와 본당일 등으로 일주일에 두 세번은 성당에 나갈 정도로 활동이 왕성한 사람이었다. 6년전부터는 그의 이러한 활동력이 인정을 받아 본당평협에서 일을 하게 됐으며 황씨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야말로 신명나게 일했다고 한다.
자신이 활동하던 당시 50대 중반의 본당신부는 주로 경청하는 편이었으며 일의 결정에 있어서도 신자들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편이었기에 본당 어디에서나 활력이 넘쳤다고 한다. 그러나 4년전 사제인사이동으로 30대 후반의 새주임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내 여기저기서 불협화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 부임한 주임신부는 각종 회의에서 신자들의 의견보다는 자신의 고집대로 일을 결정했고 각종 신심단체에 대한 지원도 자신의 취향에 맞는 곳만 지원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자 새주임신부와 가깝게 지내지 못하는 신자들의 소외감과 불만이 쌓여갔고 황씨도 마찬가지였다. 신자들과 술자리가 있으면 본당신부가 꼭 화제가 되곤 하던 상황에 답답해하던 황씨는 자신이 본당신부와 대화를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황씨가 어렵게 본당신부를 만난 자리에서 본당일 처리에 있어서의 문제와 신자들의 불만등을 얘기하며 재고해줄 것을 요청하자 본당신부는 {사제는 목자요, 신자는 양떼로 자신은 본당전체를 관할할 책임이 있으니 모든 신자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어 그런 오해들이 있는 것 같다} 라고 말하고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본당신부는 황씨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신자들을 의식적으로 피했으며 평협개편때도 자주 어울리는 신자들로 자리를 채워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주소가 관할구역내에 있지않으면서도 친분관계로 교적을 옮기지 않던 신자들이 교적을 정리해 타본당으로 가버리고 황씨도 주일미사를 다른 본당에서 참례하기 시작했다. 타본당에서 이곳저곳을 떠돌며 미사만 겨우 참석하던 황씨는 신앙에 대한 회의까지 겹쳐 한두번 주일미사를 빠지기 시작하다 결국 2년전부터 냉담하게 되고 말았다.
성직자와의 불화로 냉담에 이른 황씨는 그동안 자신이 겪은 심정을 대체로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었다.
첫째로는 {사제가 봉사직분보다 성직에의 권위를 앞세우는 부분이 너무 많다} 고 지적하고 {사제의 희생적 생활을 고려할 때 그 권위는 상당부분 이해 받을 수 있고 인정되어져야 하는 것이지만 독선에 가까운 권위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되지 못한다} 며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폭넓은 인간관계가 필요하다고 황씨는 말했다.
둘째로는 {기도생활이나 강론등 신자들에게 보여지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준비가 소홀하면서 자신의 권위만을 내세우려는 것은 목자로서의 태도가 아니다} 며 {독선적인 성직자는 흔히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권위를 앞세우는 것 같다} 고 말했다.
{성직자도 일차적으로 약점을 지닌 인간으로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함께 기도할때 신자들이 더욱 존경할 수 있을 것} 이라는 황씨는 신학교 교육이 지식적인 것보다 덕성과 영성적인 측면에서 보다 강화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셋째로 {사제의 품성은 보다 인내롭고 온유해야 한다} 는 것이었다. 신앙생활의 모든 부분에 있어 부족한 신자가 철모르게 행동한다 하더라도 인내롭고 친절하게 이끌고 고쳐주어야지 격한 행동과 언어로 윽박지르면 해당 당사자뿐 아니라 그모습을 보고 있는 신자들의 마음까지 상하게 되고 신앙을 저버리는 경우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묻는 질문에 황씨는 {늘 마음 한구석이 도망친 빚쟁이 마음처럼 무거웠다} 면서 하루라도 빨리 성당에 다시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2백주년 기념 사목회의 사회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바람직한 성직자상으로 91.9%가 {신자들의 사정을 이해하는 자애로운 모습} 을 꼽았고 {위엄을 갖추고 신자들에게 엄격하게 대하는 모습}은 3.9%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볼때 황씨의 냉담사례는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4. 교적 찾을 수 없어 냉담한 경우
한동일(가명. 요셉.34세)씨. 비교적 젊은 나이에 중견 건설회사의 홍보담당과장에 오를만큼 빠른 증진의 길을 걸어왔다. 가족은 홀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딸이 하나 있다. 조금은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보낸탓에 그에게 있어 경제적인 안정은 중요하게 다가왔고, 외아들로 외롭게 자라온 환경은 학교생활이나 사회활동에 있어 적극적인 모습을 지니게 했다.
그가 살아온 여러 환경적 요인과 그의 능력 그리고 회사의 요구는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그에게 정신없이 바쁜 직장생활을 요구해왔고 하나하나 일이 성취됨에 따라 그 나름의 행복에 젖어 왔다. 결과적으로 그는 빠쁜 출세(?)의 길을 걸어왔고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한씨는 [이게 사는 게 아닌데] [무엇을 위해 내가 이렇게 쫓기며 사나] 하는 회의를 갖게 됐다. 또한 결혼과 함께 돌봐야할 처자가 생기고 이는 곧 [내 일만이 아닌 가족과 함께] 라는 시간적인 여유를 요구해왔다.
이런 삶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에게 큰 짐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신앙생활로의 회귀였다. 대학생 시절 교리교사회 운영문제로 담당 수녀와 대립한 후 발을 끊게 된 성당이 항상 가슴 한 쪽 구석에 앙금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수녀와의 대립으로 성당엘 나가지 않았던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지만 한씨의 신앙생활의 굴곡을 들여다 보면 교회의 무성의, 교회 제도의 허점, 일선 사목자의 무사안일, 개인의 교회에 대한 무지 등이 많이 엿보인다.
62년생인 한씨는 세례받은 연도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66년인가 67년쯤 어머니(골롬바)와 함께 유아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한씨는 모친과 자신을 스스럼없이 [밀가루 신자] 라고 부른다. 즉 정식으로 교리를 받고 원의에 따라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당시 교회를 통해 얻게 되는 구호품에 끌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어쨌던 하느님의 섭리로 세례를 받은 한씨는 벌이에 바쁜 어머니 보다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며 성당엘 다녔다. 얼마후 교회의 도움으로 비슷한 처지의 가난했던 사람들이 집단부락으로 이사를 하게 됐는데 한씨네 가족은 그 혜택에서 제외되는 사건을 겪게 된다.
살기가 힘들어 교회의 도움을 바라보고 입교했던 한씨의 모친은 즉시 성당과 멀어지고 지금까지도 교회에 대한 반감을 못버리고 있다고 한다. 공평하지 못했던 교회의 구호사업이 냉담자를 양성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자연히 한씨도 집단부락으로 이사간 친구들과 멀어지고 새 친구를 사귀면서 교회와 멀어지게 됐다.
비록 냉담한다는 의식을 가질 나이는 아니지만 약 10여년간을 교회와 무관하게 살아온 한씨. 그러나 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릴때 부르던 세례명이 기억나 학적부 종교란에는 항상 천주교를 적어넣었다. 다행히 가톨릭계 중학교에 입학한 한씨는 종교부에 가입, 교회와 가까워지는 듯했으나 서클활동 차원을 넘지 못했다.
이후 개신교 재단의 고동학교에 입학하게 된 한씨는 셀에 가입하면서 성당엘 나가게 됐다. 첫영성체 교리도 받지 않고 성체를 모시는 등 절차상의 문제를 나중에 발견하게 되지만 한씨는 자기의지로 신앙을 되찾고 열심히 본당과 셀활동을 해왔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는 교리교사로 열심히 살았으며 후배 교사들로 부터 존경을 받기도 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교사를 그만두고서도 후배들의 자문에 응해온 한씨는 어느날 교사회 담당 수녀가 교사회에 대한 자신의 영향권을 제거하기 위해 험담을 늘어놓는 사실을 알고 회의를 느끼며 차츰 냉담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변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교적을 찾게 되면 성당엘 나갈 것 같습니다. 몇 년전부터 교적을 찾기 위해 몇몇 성당과 교구청에 문의 해보았지만 찾을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고 주변의 알만한 사람들에게 물어도 해결책을 얻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재개함에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고 있는 점을 한씨는 이렇게 말했다. 교적이 없는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게 뿌리가 없는 삶을 사는 것 같아 쉽지 않다고 한씨는 말한다. 어떤 때는 너무 어려서의 일이라 정말 자신이 세례를 받았는지 조차 의심이 들기도 한단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교리를 받고 영세할까도 생각중이란다.
{비록 죄인이지만 교회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앗습니다. 무지한 탓에 그 원인이 있겠지만 개인을 탓하기전에 교회에서 먼저 냉담자를 쉽게 돌아올 수 잇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냉담자만을 상담하고 그 상당을 통해 모든 절차를 안내하는 기관을 만들어 주면 좋겠습니다}
여러가지 복합적인 원인으로 한씨는 냉담생활을 거듭해왔지만 지금은 다시 신앙생활을 하고싶은 간절한 원의를 갖고 있다.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고민하고 핑계를 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교회가 포용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씨가 쉽게 교회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5. 본당 직원 불친절로 냉담한 경우
[가톨릭 교회는 공기업인가?] 유아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해 지금은 환갑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김근일(가명. 베드로. 54세)씨가 최근 갖게 된 의문이다.
올 가을 그가 아들의 혼배를 준비하면서 겪어야 했던 일이다. 사정상 일반 예식장에서 혼배를 하게 된 그는 신앙인 이기 때문에 관면혼배라도 받기 위해 성당을 찾아갔다. 본당 사무장에게 필요한 서류를 물어보고 결혼 2주전에 성당 사무실을 찾아간 그는 난감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사무장의 이야기를 잘못 알아들은 그는 관면 혼배에 필요한 호적등본대신 주민등록 등본을 갖고 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를 포함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두 명의 증인등 다섯 명은 사제를 만나 보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다.
{호적등본은 내 아들이 장가간 경력이 있나 없나를 알아보기 위한 것인데 오랫동안 이 성당에서 활동한 내 아들을 아는 사무실 직원이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하고 따져 묻자 직원의 대답은 간결했다.
{구비서류가 준비되지 않으면 신부님과의 면담은 불가능하니 다시 서류를 준비해 오라}는 극히 사무적인 말 한 마디일 뿐이다. 김씨는 {이 본당에서 사목위원도 했던 내 얼굴을 봐서라도 이렇게 바쁜 시간을 쪼개서 온 일행을 그냥 돌려보내서야 되겠느냐. 신부님 얼굴이라도 뵙도록 해달라} 고 사정해보았지만 사무원은 묵묵 부답. 결국 아들과 며느리는 관면혼배도 못한 채 일반 예식장에서 결혼, 냉담신자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같은 예는 김씨의 친형에게도 일어났다. 어려서 추운 겨울 새벽미사 복사를 서기 위해 귀가 얼어터지는 고통을 참고 매일 미사에 참석했다는 그의 형은 성장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냉담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자녀들과 부인이 성당에 나가는 것을 말리기보다 적극 권장했던 그가 관면혼배를 하지 않고 일반예식장에서 결혼한 그의 아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당 사제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전화를 받은 사제는 대뜸 {관면혼배는 결혼 전에 하는 것입니다}며 냉랭한 반응이 보이자 그는 {미처 몰랐습니다} 라며 관면혼배를 거듭 요청했다. 그러나 그 사제는 {안됩니다. 주교님의 강력한 권고 사항이라 곤란합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그는 자신의 냉담은 물론 자녀들 역시 냉담신자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물론 그 사제가 말 그대로 관면혼배를 주지 않겠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신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그에게 야단을 치기 위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근일씨의 형의 반응으로 {그렇다면 그만 두라}는 식으로 냉소적이었다는 것이다.
김근일씨는 {나와 우리 형의 경우처럼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왔는데도 불구하고 이같은 경우에 교회를 등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신앙생활을 얼마하지 않은 이들은 오죽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가톨릭 교회의 행정이 관료주의적 공기업의 이미지를 그대로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관면혼배에 필요한 세례증명서와 호적등본이 교회법적으로 완벽한 혼배를 하기위한 서류라지만 그 본당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사람에게 서류가 구비되지 않았다고 사제와의 면담조차 거부당한 그로써는 당연히 느끼는 감정이다. 또 그는 {현대는 완벽한 서비스 시대} 라고 전제하고 {본당의 행정조직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신자들의 편에서서 일을 해야지 행정위주의 권위를 보인다면 이로 인해 교회를 등지는 이들이 얼마든지 생겨날 것} 이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바쁜 현대인, 그 만큼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사는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신자이기에 관면혼배라도 하기위해 본당문을 두드렸는데 구비서류가 없다고 냉랭하게 대하는 직원의 한 마디가 다시 피어오르려는 신앙심에 찬물을 끼얹고 만다.
물론 완벽한 혼배성사를 위해 교회가 요구하는 서류의 의미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김씨의 경우 처럼 본당 사무실 직원이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이일로 냉담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김근일씨가 {가톨릭은 공기업 같고 개신교는 서비스가 완벽한 사기업같다} 라고 한 말에는 가톨릭의 관료주의적 행정, 권위주의적 행정이 신자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케 한다.
김근일씨의 냉담이유는 그가 잘했다고 보기 이전에 세상에 열린 교회로서 봉사하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추기위해서는 좀더 탄력적이고 인간적인 교회행정이 모색되어야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6. 영세후 방치된 경우
{교리를 배우는 동안에는 곧 영세한다는 생각에 설레임과 기대가 컸 습니다. 저도 세례를 받는 날에는 여러분들이 축하와 격려를 해주시고 선물도 주시고 해서 매우 즐거웠고 제 인생이 새롭게 펼쳐질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영세 이후 사정은 제 기대와는 크게 달라습니다}.
성당에 발길을 끊은지 만 3년이 되어가는 박동일(가명.34)씨. 영세까지의 과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던 그의 경험에 비추어 현재 [냉담중] 이라는 사실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리 달갑지 않다. 박씨가 가톨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클 선배중에 제가 잘 따르던 한분이 천주교 신자였어요. 호기심에 몇 번 성당에 함께 가 보기도 했고, 그때부터 가톨릭에 관한 얘기나 정보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됐지요}.
그러던 박씨는 군대생활 중에 몇 차례 성당을 찾은 것 말고는 제대와 대학졸업, 취업 때까지 성당을 다시 찾을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언젠가는 성당에 다시 나가야겠다} 는 생각은 늘 가슴에 품고 있었지만.
입사 2년만에 근무지를 타지로 옮기면서 [마음먹고] 예비자 교리반을 찾았다. 그러나 처음 들어간 교리반에선 끝내 중도 탈락하고 말았다. 진급을 앞둔 직장생활, 아이 출산 등으로 교리시간에 너무 많이 빠진게 원인이었다. 6개월 정도 기다렸다가 다시 도전(?)해서 그는 세례를 받았다. 결국 박씨는 세례재수생인 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려운 가운데서도 참 열심히 매달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막 피어나야 할 박씨의 신앙생활은 그러나 금새 내리막길로 치닫고 만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교리때 배웠던 내용들을 영세 후 앞으로의 생활에 어떻게 연결시켜 나가야 할런지 매우 막연했습니다. 예비자때처럼 자상하게 가르쳐주거나 안내해주는 이도 별로 없었고, 이제 세례를 받았다는 생각에 왠지 이것저것 묻는 것이 참 쑥스럽더군요. 주일미사에 나와서도 허전하고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박씨도 본당 레지오에 가입해 활동한 경험이 있다. {수녀님이 다른 설명은 없이 그냥 단장님을 소개해주고 다음주부터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박씨가 들어간 레지오 팀은 가장 젊은이들로 구성됐다고 했지만 모두가 적게는 5~6년에서 10년 넘게 연장자들이었다. 서먹하게 생각되던 박씨는 결국 회사일등 사정을 들어 탈퇴하게 된다.
박씨가 레지오 활동을 그만 둔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를 얻지 못한 때문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형식에 치우친 주회나 활동보고] 등은 매우 답답함을 느끼게 했고, 2차 주회에서 오가는 얘기들도 박씨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혹 다른 활동단체에 나가면 어떨까 싶어 둘러봐도 마땅한 곳이 없었다. {성당에 나가서도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이 차츰 부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왜 이리 속이 좁고 옹졸한 놈일까하는 생각도 수차례 해봤습니다만 한번 뜸해진 마음은 쉽게 돌아서지 않더군요}.
설상가상으로 출장이 잦아지면서 본당 주일미사에 나가는 것도 어렵게 되고, 출장지에서 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형식적이 되거나 아니면 아예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즈음 박씨는 매우 난처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한번은 동료들과 얘기끝에 종교문제가 화제로 나왔어요. 제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중엔 개신교 신자도 있었습니다. 얼마가지 않아 도대체 천주교가 어떤건지 조리있게 설명을 할 수가 없어 곤란했습니다. 교리때들은 내용들을 떠올려 설명을 할려고 애썼지만 솔직히 제가 가진 교리지식으론 제대로 설명이 안되죠}.
박씨는 자기도 답답한 마음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라고 알려진 것이 창피하고 후회스러웠다} 고 털어놨다.
{성당에서 공지사항이나 유인물 같은 것을 보면 교회에서하는 교육이나 피정들이 꽤 많은 것 같은데 막상 제가 할 곳을 찾을 때는 눈에 띄지 않더라고요. 다 하는 사람들만 하는 것 같고, 또 그런 사람들만 계속해서 모이는 것 같고....}
박씨는 자신의 경험을 볼 때 {영세를 분기점으로 해서 전과 후가 너무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 같다} 고 말했다. 즉 이 둘을 이어 주면서 계속해서 신자들을 이끌고 교육시키는 일들이 크게 부족하다는 얘기였다. 가족이나 주위에 신자가 드문 박씨 같은 경우는 특히 영세 후에 방치되는 사례가 많을 것 이라는게 그의 주장이다.
박씨는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제가 레지오를 그만 둘 때도, 성당에 뜸 할 때도 누구 한사람 속시원하게 얘기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가 느끼는 만큼 그분들도 저를 대하기가 서먹했나봅니다}.
7. 가정 신앙교육 부족으로 냉담
2년전부터 냉담해온 홍정환(가명.32)씨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잘타는 성격으로 5년전에 결혼해 1남1녀를 두고 있는 가장이다. 신자인 홍씨의 아버지는 외인이었던 어머니와 결혼하면서 관면혼배를 받았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권유로 결혼후 바로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결혼당시 직장을 다니던 아버지는 홍씨가 국민학교에 들아갈 무렵 건설업을 시작했고 사업의 성공을 위해 뛰어다니다 보니 자연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적어지게 됐다. 가정에서의 기도생활을 이끌어 오던 아버지가 기도시간에 빠지는 날이 많아지자 가정 기도생활은 차츰 뜸해져갔다.
특히 아버지의 사업이 몇번고비를 맞으면서 어머니마저 사업 자금 마련을 위해 바빠져 그나마 간간히 바쳐오던 가정기도가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렸다고 홍씨는 기억했다. 부모님들은 홍씨의 교리교육을 주일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더 신경을 쓰지않았고 홍씨가 교리상의 의문점을 물어도 형식적인 답변만을 할뿐 자세한 것은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물어보라는 부모님의 대답을 들어야 했다.
홍씨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아버지의 사업도 안정됐으나 부모님은 홍씨의 교리교육보다는 진학에 관심을 두면서 공부를 잘했던 홍씨가 성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염려스러워 했다.
{부모님들은 주일미사도 빠지지 않고 신자분들과도 잘어울리시면서도 동생과 나에게 신앙에 대해 별로 말씀하지 않으셨고 내가 시험공부등으로 주일미사에 빠져도 크게 꾸중하는 일이 없었다}고 홍씨는 말했다. 더욱이 홍씨는 지방에서 상경해 서울의 대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학업과 입학초기 대학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휩쓸려 주일미사에 궐하는 경우가 자주 생기게 됐다.
대학과 군대생활동안의 신앙생활에 대해 홍씨는 {아마도 나에게 신앙의 뿌리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주일학교 교육의 기억은 커면서 주일미사를 지켜야 한다는 등의 의무감과 부담감으로만 작용했다}고 한다.
홍씨는 {집에서 성서를 가족과 함께 읽고 기도하는 모습보다 방학때마다 주일학교시절의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과 성탄, 산간학교, 청년회 모임 등등의 행사때의 체험이나 추억만이 남아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홍씨는 졸업후 대학시절에 사귀던 아가씨와 서울에서 결혼을 하게됐다. 결혼 상대자가 외인이었으므로 홍씨는 부모님의 교적본당에서 관면혼배를 받고 서울에서 따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당시 홍씨는 교회혼인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고 단지 거쳐야 할 관문으로만 여겨 약혼식을 대신한다는 생각으로 혼인전 교육도 형식적으로 하고 말았으며 부모님들도 관면혼배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지않았다고 한다. 결혼후의 신앙생활에 대해 홍씨는 바쁜 직장생활과 함께 신앙의 여유가 없었고 집에서 함께 기도를 하려고 해도 가정기도에 대한 별 기억이 없어 잘 안되었다고 한다.
결국 결혼후 3년만에 냉담에 빠진 홍씨는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자신이 받은 것처럼 유아세례를 받게 했으나 그저 단순한 의무감이었고 큰 아이가 4살이 될때까지 성호경을 가르쳐 본 것 외에는 성서이야기등을 들려줘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홍씨는 {교회내에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가정용 교리 교재가 있어 이야기책 읽어주듯 교회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 말했다. 덧붙여 홍씨는 {연령, 취미, 직업등 사회환경이 비슷한 부부끼리의 이런 모임이 있으면 좋겟다} 면서 이런 모임들을 통해 다른 가정의 신앙생활을 배울수 있고 자극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 아이의 유아세례후부터 성당에 발길을 끊어버린 홍씨는 자신이 왜 냉담했는지 잘모르겠다고 한다. 홍씨는 그저 자신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겠는가 말하면서 언젠가 다시 나가게 될 것이라고 웃었다.
홍씨의 경우는 자신의 말처럼 신앙에 스스로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것 외에는 냉담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교회는 가정이 첫 교리교사라고 가르치는데 요즘 가정의 세태는 냉담자의 산실이 되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8. 교회 단체 폐쇄성으로 냉담
2남2녀 중 셋째인 박명호 (가명. 크리산도. 40세)씨는 유아세례를 받았다. 아버지만 신앙을 갖지 않았을 뿐 형제들은 어머니의 정성에 힘입어 모두 어려서 세례를 받거나 유아세례를 받아 비교적 좋은 신앙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고 일찍 복사단에 들어 또래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박씨가 중3이 되던해 소도시였지만 성당과 가까운 시내에 살고 있던 박씨 가족은 갑자기 대도시로 이사를 해야 했다. 직장 생활을 하던 박씨의 부친이 대도시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씨는 전학이 어려워 혼자 남아 계속 학교를 다녀야 했다. 어쩔수 없이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친척집에서 통학을 해야했고 예상치 못한 외로움에 부닥쳐야만 했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주일이면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어머니와 형제들이 없는 성당은 박씨에게 큰 위안이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성당이 예전같지 않아서 일까? 차츰 박씨는 주일이면 성당을 찾기보다는 가고 오는 데 몇시간을 소비하며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집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박씨에게 주일은 성당에 가는 날이 아니라 힘들고 피곤하지만 집에 갔다오는 날로 바뀌어 버렸고 자연 냉담의 길로 들어섰다.
근 1년 가까이 성당을 멀리하던 박씨는 집이 있는 대도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옛날과 같이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됐고 집 가까이에 있는 성당을 찾게 됐다. 그러나 예전의 성당이 아니었다. 우선 든든한 후원자이던 형과 누나가 없었고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는 친구가 없었다. 무엇보다 지난 1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 있으면서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해있었다.
어머니의 감시 때문에 주일미사만 간신히 다니던 박씨는 2학년이 되면서 주일학교 고등부에 들게 됐다. 그러나 박씨는 본당 학생회에 적응 할 수 없었다. 오래 전부터 함께 지내온 기존 회원들의 마음속에 자신이 지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고 말한다. 어쩌다 사소한 폭력사건에 휘말려 성당 어른들께 창피를 당하고서는 또 다시 냉담길에 들어섰다.
대학생이 되고서는 교리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고등부 학생회 출신들이 이미 선점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그래도 교리교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비슷한 처지(신영세자나 전입온 신자)의 주변 사람들을 모아 대학부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포용성 있는 단체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도 얼마 안가 해체되고 말았다. 본당 신부나 수녀의 이해 부족에서 인지 대학부의 일이라는 것이 교리교사회의 주변을 맴돌면서 그들의 뒷치닥거리나 하는 정도였다. 어쩔수 없이 통합하자는 의견도 제시해보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무산되고 말았다. 자연 대학부의 활동은 위축되고 창립된지 1년도 안돼 해체됐다.
냉담과 신앙생활 재개를 오락가락하던 박씨는 대학졸업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또 한번 단체에 가입하게 된다. 자선활동을 목표로하는 단체였지만 활동보다는 친목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다. 박씨는 다시한번 갈등에 빠지게 됐다. 친구가 필요했거나 사업상 대인관계를 넓혀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졸지에 자신도 그런 부류에 휩쓸리고 만것이다.
{신앙생활이 꼭 단체활동을 수반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활동을 통해 신앙이 성숙되고 사랑을 실천하는 참 신앙인이 되는것 아닙니까? 본당의 제 단체가 존재하는 이유도 함께 모여 기도하고 힘을 합쳐 이웃과 보다 더 큰 사랑을 나누기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교회의 많은 단체들은 친목단체의 수준을 못벗어나는 것 같아요. 기도 보다는 주회를 통한 친목도모나 일상사에 대한 관심나누기가 더 중요한 것 같고, 선행은 몇 푼의 돈으로 땜질하려하지요. 그러다 보니 끼리끼리의 만남이 편하고 이방인에 대한 관심과 포용은 뒷전이지요}
박씨는 스스로를 냉담자라고는 보지 않는다. 가끔 생각날때면 성당을 찾고 신앙인의 자세로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적인 상심으로 종종 성당을 멀리해왔고 지금도 최소한의 주일의무도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판공성사도 궐한지 4년이 넘었다. 언젠가는 다시 시작해야죠. 그러나 솔직히 공동체에 뛰어들어 신자들과 부태낄 것을 생각하면 부담스럽습니다.
9. 성당일에 매달린 아내 때문에 냉담
올해로 영세한지 20년째 되는 박무일씨(가명. 50).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와 아내가 있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다. 그러나 박씨에겐 지나온 20년 가까운 세월이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고통과 인내의 나날들이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신자로서 살아온 시간 대부분을 냉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내는 이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지만}.
자신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인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넋두리만 늘어놓는게 아닌지 의문과 자괴감이 앞선다며 말문을 연 박씨의 경우는 사실 흔치는 않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그래서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는 독특한 경우였다.
개신교 신자였던 박씨는 결혼을 앞두고 개종, 통신교리를 배우고 영세한 후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특별한 조건을 따질 것도 없이 열심한 신자라면 좋겠다고 선택한 상태였다. 그러나 신혼을 맛볼 겨를도 없이 박씨에겐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성당일에만 매달리느라 가정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처음엔 저러다 말려니 했지만 갈수록 심해졌고 다툼이 잦아졌습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아내는 하루 24시간중 잠자는 시간만 빼고는 성당일에 몰두했다. 아침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기 일쑤였고 집에서도 성당에 관계된 일을 놓치 않았다.
퇴근해 와서 라면을 끊여 먹어야 하는 자신은 괜찮다하더라도 커가면서 세심한 관심과 사랑이 있어할 자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아내가 하는 일은 본당. 교구 일까지 해서 열가지가 넘었습니다}. 대화로 마음을 돌려 보려 했으나 매번 다툼으로 끝날 뿐이었다.
{한번은 말다툼 끝에 과로했던 탓인지 제가 갑자기 코에서 피를 쏟으며 쓰저진적이 있습니다. 급하게 응급처지를 하고는 누웠는데 아내는 또 성당에 가더군요.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정의 일이라 생각하니 선뜻 누구에게 상담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아내의 이름을 알만한 사람은 아는 처지이니 쉽게 말을 끄집어 낼 입장도 못되었다. 갈등과 괴로움 속에서 직장생활 역시 편할리 없었고 성당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하게 되었다.
박씨의 신앙생활은 결혼후 불과 몇년을 못넘기도 결국 냉담에 빠지고 말았다. 그 기간은 10년을 넘게 계속됐다. 천직으로 알고 몸담았던 공직에서도 떠나야 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자신의 본심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갈등에 시달려온 박씨는 어렵게 냉담에서 깨어날 기회를 찾았다. 부족한 교리지식 탓이라 여긴 그는 꾸르실료를 다녀오고 성령세미나도 받았다. 평신도 신학강좌도 들으며 신앙의 살을 찌우고 어떻게든 이 현실을 극복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인간적인 한계는 또 한번 그를 냉담에 빠트렸다. 지난 94년 가을 무렵부터였다. {그땐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그전의 냉담때와는 저 자신도 변한걸 느꼈습니다. 아내의 얼굴도 보기 싫었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궁리만 했습니다}.
[이혼] 만이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박씨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고집스럽고 소심한 성격탓에 건강까지 악화된 아내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가 성당 일에 매달리는 속사정을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연금과 지금의 벌이로도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편이고, 아이들도 그와중에서 곱게 자라주고 있습니다. 활동하면서 상대적인 빈곤을 느끼는지 가끔씩 불만을 얘기하긴 합니다만.....}
박씨는 교회의 상담전화를 이용했다가 실망만 느낀 적도 있다. 견딜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갖고 상담을 청했는데도 너무나 무성의한, 전문성이 결여된 대답만 하더라는 것이다.
{본당 신부님을 찾아가서 얘길 꺼낸다는게 말처럼 쉽지 않을 겁니다. 수천명의 신자를 상대하는 입장에서 부담만 지우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저같은 사람들도 찾아가서 상담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전문적인 상담기관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꼭 냉담을 예방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익명성이 보장되면서 전문 지식을 갖고 신앙생활 상담이 가능한 장치 말입니다.
박씨는 지난 성탄절에 고해성사를 받고 냉담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난 14개월의 냉담경험이 쓰라린 상처로 남아있다고 한다. {배울만큼 배우고 알만한 상황에서 신앙을 등졌다는 것이 더욱 후회스럽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또 {한번 냉담한 사람은 그 마음이 무디어져 다른 사람보다 더욱 불성실한 삶에로 추락할 가능성이 많은 것 같다} 고 덧붙였다.
10. 본당의 비민주적 운영으로 냉담
중소기업의 중견간부로 삼십대후반의 강경주(가명.38)씨는 일남일녀를 둔 평범한 가장으로 나서기를 싫어하고 자기 일에만 충실한 사람이다. 대학시절 친구의 권유로 입교해 20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해온 강씨는 본당일에 있어서도 이런 자신의 성격 탓인지 주일미사 참여와 가입한 단체에서 자신이 맡은 일만 묵묵히 해왔다.
10년전 결혼과 함께 현재의 본당으로 교적을 옮긴 강씨는 당시 본당신부의 권유로 삼사십대 신자들로 구성된 한 액션단체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평협 소속으로 본당의 각종행사에 봉사하는 업무를 주로 해왔고 회원들 간의 결속도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5년정도 이단체에서 활동해오던 강씨는 본당신부와 평협의 지시에 의해 단순히 일만해야 하는 단체의 임무와 비민주적인 활동지시에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강씨는 당시 단체 활동에 대해 {본당신부나 평협의 지시에 따라 일만해야 하는 일꾼에 불과했다} 면서 {우리단체의 간부나 회원들의 의견이나 건의는 형식에 불과했고 시키면 시키는대로 막노동과 같은 일을 봉사라는 미명아래 해야했다} 고 술회했다.
강씨는 {시키면 당연히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신부님과 평협간부나 이런 일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단체 구성원들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고 말하고 {같은 연령층 중에도 재력이 있거나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평협에 속해 산하단체인 우리에게 동참이 아니라 지시를 할 때 느끼는 소외감이나 자괴감은 참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고 말했다.
{본당에서까지 사회적 신분으로 대우가 다르다는 것은 교회가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라는 모습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며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몇몇 신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부추기는 것} 이라고 강씨는 강변했다.
이런 일들로 해서 본당에서의 단체활동에 염증을 느끼던 강씨는 삼십대 중반이 되면서 회사에서 중견간부가 돼 회사일에 대한 중압감을 느끼기 시작하자 가시방석같았던 단체모임에서 자연스럽게 빠지게 됐다.
본당일에 소원해지자 성당에 가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고 힘이 들기 시작한 강씨는 주일미사를 궐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다가 1년전부터는 아예 냉담하고 있다.
{솔직히 안보면 그만인데 성당에 가서 마음 상하고 남을 미워하는 그런 일들이 부담스러웠다} 는 강씨는 {신앙이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면서 {본당은 신자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분위기를 유지해야 한다} 고 밝혔다.
강씨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우리 교회공동체는 너무 마음맞는 사람들끼리만 몰려다니는 경향이 많다} 고 지적하면서 {일의 결정과 추진에 있어 대화와 타협을 통해 좋은 방안을 도출해내고 실무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기보다는 힘있고 마음맞는 몇몇 신자나 사목자에 의해 본당이 명령 하달식으로만 운영된다면 신앙적으로는 순종할지 몰라도 인간적으로는 누가 승복하겠느냐} 고 반문했다.
한마디로 민주적인 교회운영이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는 강씨는 {사회는 세계화 민주화를 향해 날로 바뀌어 가는데 우리 교회는 아직도 사목자나 몇몇 신자들의 독단적 결정에 이끌려 다니는 봉건적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 말했다.
11. 죄의식에서 비롯된 냉담
김정호(가명.라이문도.44세)씨는 부인과 두 딸을 두고 있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한 가장이다. 아이들에게는 자상하고 전지전능한(?) 아버지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아내에게는 인생의 동반자로서 튼튼한 버팀목이 되고자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김씨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졸업후 모 대기업에 취직해 정상적인 승진의 길을 걸었으며 대학원 공부까지 할수 있었다. 대학원 졸업후 선을 본 김씨는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을 고려하게 되고 자연히 부인의 신앙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으로 교리반에 나갔다.
당시의 심정을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부인될)사람이 좋았죠. 그런데 그 사람이 지닌 종교적인 심성이 나를 참 편하게 했어요. 학교에서는 이공계열 서적만 뒤적이고 직장에서는 연구실에 틀어박혀 삭막한 삶을 살던 나에게 동반자가 생기고 부수적(?)으로 종교를 갖게 된다는 것은 큰 축복이었지요}
김씨의 결혼생활을 무엇과도 바꿀수 없을만큼 행복했다. 비록 퇴근이 늦어 신심단체나 액션단체에 가입할 여건이 되지는 못했지만 부인과 함께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여가를 즐기며 삶을 풍요롭게 가꾸어 왔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이 하나둘 생기고 여느 가정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아이들이 크면서 씀씀이가 많아진 김씨는 집안경제를 생각해야 했다. 적지 않은 월급이었지만 두 아이들 뒷바라지 하기에는 양이 차지않았다. 김씨는 여유와 풍요로운 삶의 질을 중요시했고 이를 위해서는 경제적인 안정이 중요하다는 신조를 지니고 있었다. 직장생활의 한계를 가끔 겪어오기도 하던 터라 힘들었지만 사표를 내고 친구와 함께 오퍼상을 시작했다.
{사업이란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을 했지만 생각지도 않은 일로 고민을 해야했습니다} 김씨는 자금을 관리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윤리적인 문제에 부딪쳐야 했다. 업주들과 교분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술집을 드러들어야 했고 2차 3차 하다보면 아가씨들이 있는 술집을 자주 찾게 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내 사업을 위해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자리를 주선하는 구나] 하는 소극적인 죄의식을 가졌다고 김씨는 말했다. 그러나 술자리가 반복되면서, 또 손님을 접대하는 입장에서 김씨 자신도 술자리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했다. 음주량이 많아지면서 자제력을 잃게되고 일행과 함께 외도까지 하게 되는 경우도 생겼던 것이다. 이밖에도 김씨의 윤리의식을 좀먹는 일도 많았다. 탈세를 위해 이중장부를 만들어야 했고 명절이면 크고 작은 뇌물성 돈봉투를 돌려야 했던 것이다.
사업체를 꾸려가지 위한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일들이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김씨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우리 사회의 구조와 풍토에서는 어쩔 수 없는, 관행이 되다시피한 이런 일들이 막상 신앙인 김정호씨 자신에게는 큰 갈등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고해성사를 자주 봤습니다. 그리고 돈 좀 적게 벌고 마음 편히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어디 사업이란게 그렇습니까?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동업이라 내 마음대로 할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힘들었습니다. 갈등은 쌓이고 옳지 못한 일은 반복되고....고해성사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김씨는 힘들었지만 주일미사는 참례하려고 노력했고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고심했다.그러던 어느 주일 미사강론을 듣던 김씨는 더이상 신앙생활이 힘들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신부는 대수롭지않게 [신앙인의 죄의식] 을 얘기하면서 흑백논리 식으로 죄에 빠진 인간을 사정없이 질타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죄속에서 살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주변 환경들 때문에 어쩔수 없었음을 핑계 삼아 신앙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신부님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그 강론은 내 신앙의 끈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김씨는 3년째 냉담하고 있다. 가족들에게는 열심히 성당에 다닐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을 실천못하는 것이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김씨는 많은 신앙인들이 알게 모르게 죄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우리 교회는 죄많은 인간을 무조건 단죄하는 곳이 아니라 회개하여 돌아오게 하는 곳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12. 금전거래에 얽혀 냉담
{아무리 신자라고 하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는 비신자와 다를바가 없더군요. 어려울때 너무나 어이없게 당한 일이라 충격과 때론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읍니다}.
박소현(가명.54)씨. 금전문제로 너무나 곤란한 경우를, 그것도 두번씩이나 겪으면서 그 상대가 모두 같은 신자였다는 사실에 허탈감과 함께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고 했다. 결혼 32년째를 맞는 그녀는 남편과 함께 80년대초 지금의 장소에 정착했다. 어렵게 마련한 전세금으로 세를 들었다. 소속본당의 총회장 집이었으니 박씨는 내심 반가웠다.
{한참을 살다가 갑자기 회장님이 이 집을 살 마음이 없느냐고 하더군요. 상의 끝에 무리를 해서라도 사기로 하고 구두로 계약을 했습니다. 한가지, 다 낡은 그 집을 저희 책임하에 개조한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본당 회장님이니까 믿었었고, 그 자리에서 바로 매매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어서 계약서를 따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불찰이었다. 집을 개축한후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주인은 계약한 사실을 부인하며 집을 비워 달라고 요구했다.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세를 들었는데 그 전세금까지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세입자가 임의로 집을 고치고 전세금까지 가져갔다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데 기가 막혔습니다. 아들이 세무서 과장으로 있으니 해볼테면 해보라는 것이었어요}.
장마철에 박씨 가족은 결국 내쫓겨 본당 여성회장 집에 기거하게 됐다. 전세금 40만원도 빚을 내 물어줬고 공사대금은 한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그 와중에 아들등 주인집 가족들의 폭언과 협박이 계속됐다. 엄청난 상처를 입은 박씨는 이후 1년 넘게 성당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어떻게 이런 일을 당할수가 있는지, 같은 신자가 그럴수가 있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고 말했다.
그후 수녀님의 권유로 마음을 돌려 꾸르실료를 수료하고 레지오 단장으로 활동하는 등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박씨는 몇년뒤 또 한차례 시련을 당한다. 남편이 호텔신축 사업에 관여했다가 직원의 사기행각으로 자금난에 몰리게 된 것, 실제 사장은 다른 사람이었고 남편에게 사업을 맡긴 것이다. 사업규모는 당시로선 그 지역에서 가장 대규모였다. 그때까지 박씨는 여러 사람들에게 사업자금을 빌려 썼고, 그중엔 신자들도 두 명 있었다.
그러나 사건이 터지자 {자금압박으로 더 이상 공사를 할 수 없다} 는 괴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돈을 돌려받지 못할 것} 이라는 소문도 들렸다. 박씨는 채권자들을 찾아가 사정을 호소하고 꼬박꼬박 이자를 줄테니 기다려 줄 것을 요청했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채권자들 가운데 신자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유독 신자들만 나서서 {빌려간 돈을 내놓으라} 며 윽박 질렀다.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나서서 이들을 선동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는 다름아닌 본당 사목위원이었던 김모씨였다.
김씨는 이들을 선동해 빚독촉을 하게 할 뿐아니라 {고의로 사고를 일으켜 돈을 떼먹으려 한다}면서 박씨가족을 사기꾼으로 몰았다. 결국 이들의 고소로 말미암아 박씨의 남편은 구속될 처지에 놓이게된다.
{당시 고소장을 접수 하면서 김씨가 주동이 되어 사목위원 10여명과 본당 신부님이 직접 서명한 진성서를 함께 제출했습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습니다만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서 관계자도 신자였는데 고소인 피고소인이 모두 천주교 신자라는게 자신이 보기에도 부끄러우니 서로 합의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얘기까지 할 정도였어요}.
그러나 얼마안가서 신자들을 선동했던 김씨가 당시 이 사건을 빌미로 호텔사업을 가로채려는 무리들과 한패였다는 사실이 들통났고 박씨 가족의 누명도 함께 벗겨지게 됐다.
박씨는 사목위원들과 김씨가 있는 자리에서 사과를 받았고, 본당 신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오해를 푸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박씨와 가족들이 입은 상처와 아픔은 이미 깊을대로 깊어진 상태였다.
{인간적으로 내 돈이 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면 누구나 쉽지 않겠어요. 하지만 비신자들도 사정을 이해해주고 아량을 베풀어 주는데 신자들이 어떻게 그럴수가 있는지 너무나 깊은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박씨는 친오빠가 신부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처음 어려움을 겪었던 그 집 주인도 가족중에 신부님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씨는 {집안에 신부님이 계시다는데 뭘 못믿겠느냐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덧붙였다.
13. 이향으로 인한 냉담
권순식(가명 55세.테오도로)씨는 고향에서 물려받은 농사만을 지으며 묵묵히 살아온 전형적인 농부로 슬하에 2남1녀를 둔 태중교우였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을 때 권씨는 공소회장을 맡기도 하는 등 주변에서 예수쟁이로 불릴만큼 열심한 신자였다.
{땅과 함께 살때처럼 마음 편한 적이 없었지요. 그때는 하루에 일용할 양식이 있었고 한마음으로 같이 생활하던 신자들이 있었어요} 라며 지난 날에 대한 진한 향수를 들려준 권씨는 지금부터 10년전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해왔다.
권씨의 이주의 첫째 이유는 자녀들의 교육문제였다. 권씨가 살던 마을은 면소재지에서 10여km 떨어진 곳으로 학교는 초등학교 분교 하나만이 있었고 아이들이 도시에 있는 상급학교로 진학하자 이중살림에서 오는 부담이 컸다.
막노동을 하면서 날마다 손에 쥐는 현금에 재미를 붙인 권씨는 10년 전 아예 고향의 땅을 팔고 도시로 이주해왔다. {딱히 돈때문이 아니라 부모없이 저희들끼리 학교가고 밥해먹고 아이들의 모습도 애처로웠고 또 도시에 보내놓고 나니 아이들이 주일미사도 참석하지 않는 등 아이들의 신앙문제에 있어서도 고민이 많았지요}
권씨는 처음에 아이들이 도시에 나가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도록 권유했으나 아이들은 도시본당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처음 몇번만 본당에 나갔다가 성당에 발을 끊었다고 한다.
권씨의 아이들은 시골에서 왔다는 열등감이 있는데다 미사가 끝나면 친한 친구들끼리만 모여 놀고 누구도 자신들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어 처음 몇번은 서먹서먹한 채로 주일미사만을 나갔지만 성당에 가는 것이 부담스러워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도시로 이주해온 권씨는 아이들의 이런 행동을 나무라면서 자신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권씨는 주일미사를 빠지지 않기 위해 일을 나가는 일요일이면 새벽미사를 참례하고 가는등 처음 얼마간은 꾸준히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않자 차츰 본당에 나가는 것과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부담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공소생활을 할때는 누구나 한집 같았어요. 힘든 농사일 속에서 공소예절이 끝나고 신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막걸리라도 함께 한잔하다보면 신앙생활의 기쁨이 절로 솟아났고 교리를 몰라도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 일주일 내내 주일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지요}
한다미로 권씨는 그동안의 도시생활에 대해 [외로웠다] 고 표현한다. 미사를 마치고 혼자만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왜 그렇게 을씨년스러웠는지 몰랐다는 권씨는 {신앙을 혼자서 지키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았다}면서 {배운 것이 있든 없든 신앙생활은 즐겁고 기뻐야 하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 와서 느낀 것은 소외감 뿐이었다} 고 말한다.
경제적인 문제도 많이 작용을 했지만 권씨는 지금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고향에 돌아가서 예전처럼 흙과 함께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권씨에게 도시본당의 신자들은 너무 무정했다.
처음 권씨가 도시본당에 나갔을 때 본당신부를 찾아 인사를 했지만 그 이후 본당신부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받아보지 못했고 본당단체라도 들고 싶어 여기 저기를 기웃거려 봤지만 어떤 곳에서도 선뜻 자리를 내주는 곳이 없었다. 또한 시골에서 생활할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많은 생활비와 각종 기부금도 권씨의 기를 죽게 만들었다.
권씨에 따르면 권씨와 같은 처지의 많은 이향신자들이 도시본당에 가면 [촌놈]이라고 따돌림 받는다고 아예 미사참례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권씨는 [천주교 신자들이 무뚝뚝하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고 여기다가 가진 것 없이 도시로 나오는 이향민들의 자격지심까지 합쳐 농촌을 떠나온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기란 더욱 어렵다} 고 말했다.
권씨는 {각 교구마다 이향신자들을 사목하는 부서가 있어 교구내에서나 혹은 타교구에서 전입해오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처음 얼마간 관심을 가지고 지도해 주었으면 좋겠다} 고 밝혔다. |
지금은 '냉담자'라는 말 대신에 '쉬는 교우'란 표현을 쓰지만, 위의 냉담사례들을 살펴보면 인간적으로 볼 때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으나, 아쉬운 것은 신앙생활이 결코 남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잊고, 인간적으로 감정적인 면이 우선 강하여 스스로 쉽게 무너지고 좌절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본당을 위해서도....또는 신부님을 위해서도, 자기 배우자를 위해서도, 아니면 어느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도 가 아닙니다. 내가 세례를 받음으로 주님 은총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고, 이 지상에서 천국을 만들어 살다가 훗날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한마디로 이 세상에서 '잘 살다가 잘 죽는 삶'을 위한 것이 신앙생활이랄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내가 온 몸을 던져 믿음속에 산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쉽게 떠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저 한 발을 신앙에 담구었다가 상황에 따라 쉽게 발을 빼는 약한 믿음에서 스스로 무너지고 냉담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인간은 자기 본위, 자기 위로로 살아가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면을 지녔기에 어떠한 경우에서든 사목 차원에서는 이를 외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모든 상황을 사전에 염두에 두고 본당과 모든 교우들이 마음을 열고 어려움에 처한 교우를 위해 좀 더 이해하고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배려가 있을 때 우선은 쉽게 무너지고 떠나는 경우를 방지할 수 있으며, 어떠한 난관속에서도 견뎌낼 수 있는 믿음을 갖출 수 있는 때까지 계속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결코 한 사람이라도 너무 쉽게 져 버리거나 포기하는 것은 '잃은 양 한 마리'를 방치하거나 쉽게 잊어 버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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