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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사도시대의 교회(Ⅰ)

by 파스칼바이런 2012. 7. 23.

 

 사도시대의 교회(Ⅰ)

- 유대인 그리스도교 -

 

 

사도시대를 시대적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승천에서부터 마지막 사도의 사망까지로 본다. 사도시대의 종말은 바로 계시시대(啓示時代)가 문을  닫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시대는 계시의 사도시대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기간의 한계를 확정할 수는 없고, 그 경계선을 그리스도인의 제 1,2세대로 보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하였던 이들이 그의 계시를 수행하던 시대(약 30~110년경)까지 연장하여 규정하고 있다.

 

사도시대에 두 그룹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공존하고  있었다. 하나는 아직도 엄격한 유대사상을 보존하면서 실천하던 팔레스티나 지역의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이며, 다른 하나는 팔레스티나 지역 밖에서 개종한 그리스 인, 헬레니스트(Hellenist: 그리스어를 쓰는 유대인)  기타 비(非)유대인으로 구성된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다. 그런데 이 초창기 교회의 모습을 알려주던 주요 사료(史料)인 사도행전은 유대인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제외하고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쓴 그리스 인 저자가, 아람 말을 사용하던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해서 관심과 호의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초창기의 교회는 아람 말을 썼고 오랫동안 유대 사회 속에 머물고 있었다. 다행히도 오늘날 수많은 사료의 발견은 이 사도시대의 교회상을 저술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

 

사도시대의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루살렘 교회와  갈릴래아 지방의 교회, 사마리아 지방의 교회, 요르단 서안(Transjordan) 지역의 교회가 있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밖의 교회들에 대해서 명백한 언급은 없지만 사마리아 교회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는 암시를 보여주고 있다(사도 8,4-25; 15,3; 21,8-14). 그리고 다른 두 교회들에 대해서는  고대 유대인 그리스도교의 비문(碑文)이나 초기 교부(敎父), 저술가, 교회사가들이  그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유스티노, 헤제시푸스, 에피파니우스,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을 그 대표적 교회인 예루살렘 모교회(母敎會)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교회와 그 역사는 30년경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성령강림으로 시작되었다. 이 역사적 사건 후, 복음은 사도들, 특히 베드로에 의해 선포되어(사도 2,14-36;  3,26; 4,8-12), 이 교회는 복음선포적 교회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복음선포(Kerygma)의 주제는 예수의  부활(사도 2,24.39; 3,15; 4,10)과 구약 예언들의 성취(사도 3,20)였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행위인 예수 부활을 자신들이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기적을 통해 증거했다. 특히 신을 믿어왔던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그 희망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히면서 개종을 요구하였다(사도 2,38; 3,19).

 

예루살렘 교회는 그리스도의 업적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목격자들인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단(使徒團)과 신도들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첫 그리스도교인들은 바리사이 파, 사두가이 파, 에쎄느 파와 같은 유대교 종파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그들은 할손례,  정화례(淨化禮), 안식일을 지키며 유대 백성의 종교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신도들은 그들의 특유한 공동체 ―이를 에끌레시아(ecclesia: 교회)라고 했음― 를 형성하는 동시에 예수를 '주님'(Kyrios)이라고 부르며 그들 고유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른 유대교인들은  예수의 고향 이름을 따서 이들을 나자렛 파라고 했다. 그들은  유대교의 공동기도에 참석한 안식일  다음날에(사도 20,7) 개인집에서 집회를 가졌다(사도 2,46; 12,12; 16,40; 20,9). 집회는 훈시와 예절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훈시에는 미신도들에 대한 예비자 교리교육 그리고 신도들을 향한 호교론적인 강론 즉 메시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설교(사도 20,11), 신앙과 애덕실천을 위한 권유(사도 14, 22, 15; 32) 등이 있었다. 다음에 예절 부분에서는 성찬식 즉  성체성사의 집전이 있었고(사도 2,7;  20,7), 집회를 사회하던 사도나 장로(사도 6,4) 또는 은혜를 받은 신도의 기도로 모임은 끝났다. 예루살렘 공동체의 특수한 생활상은 무엇보다도 상호부조(相互扶助)의  경제조직이다. 신도들은 "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누구 하나라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으며"(사도 4,32),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사도 2,45),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놓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받았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 34-35).

 

한 예로 바르나바는 자기 밭을 판 돈을 사도들에게  바치고(사도 4,36-37), 사도들의 제자로서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다(사도 1,1-22; 13,4-15.  28). 그러나 반대로  아나니아와 삽피라 부부는 땅을 팔아 받은 돈의 일부만을 바쳤기 때문에 죽음의  벌을 받았다. 그러나 재산의 공동소유는 의무적인 것이 아니었다(사도 5, 3-4).

그들의 죽음은 사도들과 공동체, 나아가서는 하느님을 속인  죄의 결과였다(사도 5,4). 그런데 이러한 상호부조의 행위는  협동정신과 형제적 사랑뿐 아니라 현세의 재물에 집착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감화되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경제조직은 교회 내부에 문제를 일으켰다. 식량배급에 있어 헬레니스트 과부들이 푸대접을 받자 히브리 인(본토 유대인)들에 대한 불평이 터졌다. 사도들은 헬레니스트들 중에서 7명을 뽑아 기도와 안수를 통해 부제(대표로는 스테파노)로 임명하여(사도  6,1-6) 그들의 동료 일꾼으로서 헬레니스트들의 식량배급뿐 아니라 설교와 세례거행의 임무를 부여하였다(사도 6,807. 53; 8,12-13. 36-38). 부제에 해당되는 직책은 히브리 인들에게도 이미 있었다. 즉 장로 또는 원로로서(사도 11,30) 대표는 야고보였다. 따라서 예루살렘 모교회는 성직계급의 질서를  갖춘 공동체였다. 복음선포, 교회관리, 영신지도, 성사집행의 직무를 갖고 있던 사도단, 사도들의  보조 단체로 히브리 인 신도들을 돌보던 장로단과 헬레니스트 신도들을 책임진 부제단이었다.

 

그러나 36년 스테파노의 순교와 헬레니스트에 대한 박해로 이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고 또 베드로  사도와 다른 사도들이 예루살렘 밖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되어 장로단이 예루살렘에서 유일한 성직자단이 되었다. 특히 베드로 사도가 43년경에 예루살렘을  떠난 후(사도 12,17) 유대교적인  전통에 충실하였던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지방주교― 가 되자 이 교회는 더욱 유대주의가 강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되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초창기 그리스도교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 야고보 그룹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으나, 다른 유대 문헌들(히브리 복음서, 토마스 복음서, 야고보의 묵시록, 끌레멘스 강론집 등)에 의하면 야고보 주위에는 많은 예수 친척들이 핵심적인 세력 단체로서 히브리 인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62년 야고보가 순교하자 예수의 사촌인 시몬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권을 계승했으나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이 공동체는 그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상실하였다.

 

야고보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에는 반(反)  로마 메시아니즘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유대인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이 유대 민족주의에 승복하기를 거부하여, 제1차  유대전쟁(66~70년) 동안에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에서 요르단 서안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과격한 유대 민족주의의 발생과 바오로 사도의 이방인  그리스도교의 성장로 인하여 그리스도교와  유대 사상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