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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사도시대의 교회(Ⅱ)

by 파스칼바이런 2012. 7. 23.

 

 사도시대의 교회()

- 이방인 그리스도교 -

 

 

시리아 그리스도교 공동체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주로 팔레스티나 본토의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본토 이외의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가운데 성장하면서, 동시에 복음은 이교인들에게도 전달되었다. 그중에 시리아는 사도시대에 그리스도교가 크게 발전한  지역이었으며, 특히 이방인  그리스도교의 확산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 대표적 공동체로서 다마스커스 교회와 안티오키아 교회가 있었다. 당시의 로마 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집트)에 버금가는 대도시인 안티오키아에 설립된 교회는 예루살렘 다음가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그리스 문화권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에서 헬레니스트 계의 저자는 이 교회를 잘 묘사하고 있다. 반면에 같은 시리아 지역이지만 아람 어계에 속한 다마스커스 교회에 대해서 사도행전을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서 성서적 문헌 이회에 다른 사료(史料)를 통해서 우리는 두 공동체를 동등하게 언급해야 한다.

 

1) 다마스커스 교회.     사도행전에 의하면,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37년에 유대인들의 박해로 예루살렘에서 물러나온 헬레니스트들이 다마스커스 지역인 페니키아에서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11,19). 38년에 사울(후에 바오로)이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커스에 파견되었다(사도 9,1-2). 개종 후에 그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설교하였다(사도 9,20). 또한 이 다마스커스 신도들 중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는데(사도 9,20) 그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사도 22,12).

 

따라서 다마스커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37년에 설립되었고 헬레니스트들과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성서 이외의 다른 문헌,  즉 사해문서(死海文書)의 쿰란 사본에 속하는 자독  문헌 또는 다마스커스 문헌에 의하면, 사해 서북부의 쿰란 지역에 거주하던 에쎄느 파(유대교의 한 종파)에서 개종한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첫 다마스커스 교회에 있었다.

 

그것은 다마스커스 공동체와 자독 공동체 사이에 많은 유사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스테파노의 설교중에 인용되고 있는 아모스서의 한 구절(5,25-27)이 다마스커스 문헌(IX, 11)에서도 발견되었고, 또  에쎄느 그리스도교 개종자의 저서인 「12 성조의 성약서」라는 다마스커스 문헌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본거지는 다마스커스 도읍이 아니라, 다마스커스에서 페트라에 이르는 나바태아 왕국의 한 마을인 코크바였다. 이 마을은 다마스커스에서 남서쪽으로 10마일 떨어져 있었다. 바오로가 개종 후에 아라비아로 가서 3년간(38~41년)  지냈는데(갈라 1,17-18), 이는 바로 자독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의 코크바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2) 안티오키아 교회.    안티오키아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고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주민은 주로 시리아 인들이었고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도 있었다. 이 도시의 복음화는 다마스커스에서와 같이 37년에 예루살렘에서 나온 헬레니트스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말씀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파되었으나, 그리스 말을 하는 헬레니스트―키프로스와 키레네 출신―몇 사람은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설교하여 많은 이들이  개종하였다(사도 11,19-21).

 

이후 안티오키아 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공동체로서 등장하였다. 42년에 예루살렘에서의 사도단은 바르나바를 이곳에 파견하였다(사도 11,22). 안티오키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크게 발전하여, 글라우디오 황제(41-54년)시대에 처음으로, 그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란 의미로 그리스도인(Christians)이라 불렸다(사도 11,26). 이러한 명칭은 로마 외교인 수에토니오의 저서인 「글라우디오의  생애」에서도 나타난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제는 더이상 유대교의 한 종파가 아니라 독립된 큰 단체로서 인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이 교회에서는 지방교회의 장로, 부제와 독립된 지위에서 활동하던 예언자 또는 교사라고 불리는 선교사들을 많이 볼 수 있다(사도 13,1). 이들은 안티오키아에 본거지를 두고 사도들과 긴밀한 접촉을 가지면서―특히 아시아 지역에서―전교하였다.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는  항상 그의 선교 여행을 이곳에서부터 시작하였다(사도 13,4; 15,40; 18,23).

 

안티오키아는 완전히 분리된 두 공동체 즉 유대인 공동체와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병존하는 첫 도시였다. 갈라디아 서(2,11-14)에 의하면,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그들의 관습, 즉 개종한 이방인들과의 식사 금지법을  엄수하였다. 그런데 성찬례는  식사중에 거행되었기 때문에 두 공동체의 신도들이 함께 이 예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안티오키아 교회에 내분을 일으켰다.

 

로마 그리스도교 공동체

 

로마 전기작가인 수에토니오에 의하면, 로마에서 유대교인들과 유대계 그리스도교 신도들 사이에 충돌사건이 일어나,  이 소식을  들은 글라우디아  황제는 50년에 이 유대인들을 축출하였다(「글라우디아의 생애」 15,4). 사실  바오로 사도는 축출된 신도들  중에서 아퀼라와 부리스킬라 부부를 고린토에서 51년에 만나 로마 교회 소식을 들었다(사도  18,2). 또한 그가 57-58년 겨울에 로마 신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로마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크게 성장하여 있었다(로마 1,8).

 

아울러 성령강림 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받은 이들 중에 로마 인들이 있을 수 있다면(사도 2,10), 이미 초기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로마 공동체의 가장 오래된 전설이나 전승된 증언들에  의하면, 베드로 사도가 로마 교회를 세웠다고 보고 있다. 그는 43년 옥중에서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나와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사도 12,17) 갔다가 49년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하였다(사도 15,7)

 

성서적 문헌은 43년부터 49년 사이의 베드로의 활동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에 의하면 44년에 베드로는 로마에 와서 25년간 머물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교회사」Ⅱ, 14/16).

따라서 로마 교회는 베드로에 의해서 43-49년에 설립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예루살렘의 공의회 이후 베드로는 다시 로마에 거주하면서 63-64년에 그의 첫 편지를 썼고(1베드 5,13), 네로 황제의 박해시에(64년 7월경) 순교하였다(로마의 끌레멘스의 「고린토 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5-6장: 에우세비오의 「교회사」Ⅱ, 25).

베드로는 로마 주교들의 모든 명단에서 첫 자리에 놓여있는 로마 교회의 창설 사도로서 언급되고 있다. 베드로 사도를 계승해온 주교들의 명단은  이미 160년경에 헤제시포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리옹의 이레네오 역시  180년경에 로마에서 이러한 명단을  찾아냈다(「이단자를 논박함」Ⅲ, 1,1; 3,2).

 

그런데 두 사람은 모두 로마 주교의 명단을 언급하는 데에 있어서 역사 및 연대기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교리상의 목적에 의해서였다. 이단을 반박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참된 가르침을 로마 교회의 사도적 전래를  통해서 밝히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로마 주교들의 명단의 순서는 신앙의 순수성과 교리의  견고성을 보장해주는 구실을 하였다.우리는 초기 로마 주교들의 재위(在位)기간이 기입되지 않아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데 놀랄 필요는  없다.

 

로마 주교 명단에 대한 역사적 관심은 후기(4세기초)에 생긴 것이며, 교회사의 시조인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가 처음으로 28명의 교황의 재위기간을 기입하였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부터 15대 교황 제피리노(198/9?-217)까지는 연대가 확실치 않고, 이후는 상대적 신빙성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