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사도시대의 교회(Ⅲ)

by 파스칼바이런 2012. 7. 23.

 

 사도시대의 교회()

- 교회의 내분과 이단 -

 

교회의 내분(內紛)

 

사도시대에는 유대 민족주의가 극단화되어가면서, 이로부터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강력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70년의 예루살렘  함락은 유대교는 물론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그 영향력을 약화 또는 상실케 하는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더우기 바오로 사도의 노력으로 그리스도교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점차 발전하여, 신도들로 하여금 유대교적  유대(紐帶)에서 탈피케 하였다. 결과적으로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이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49년에 이러한 교회의 내분을 보여주는 두 사건, 즉 예루살렘 공의회와 안티오키아 사건이 있었다.

 

예루살렘 공의회 :   바오로 사도는 바르나바와 함께 48년에 선교 여행에서 안티오키아에 돌아와 신도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사도 14,26-28). 그런데 49년에 유대아에서 온 사람들이  할례(割禮)는 모든 신도들에게  의무적인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안티오키아  교회를 혼란케  하였다(사도 15,1-2). 이러한 할례의무화의 주장은 당시에 로마 제국과 투쟁하고 있던  유대 민족의 정치적 환경과 관련되어 있었다.

 

유대인 입장에서 볼 때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아직 유대 공동체에 속하여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할례받지 않는 이들을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은 유대교에 반역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따라서 유대 민족주의의  압력에 굴복한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유대인 공동체의 그리스도교 일원(一員)이 되는  데 그 증표(證標)안 할례를  요구하였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가 이스라엘의 세속적 목적과 연결될 위험을 깨닫고 할례의무화에 대한 요구를 단호하게 배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쟁점(爭點)의 중대성으로 보아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등을 예루살렘에 파견하여 사도들에게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였다(사도 15,2).  이에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은 회의를 열어 다시 할례에 대해 논의하였다. 여기서 바리사이 파 출신의 신도들은  이방인의 할례를 주장하였으나(사도 15,5),  사도들을 대표하여 베드로는 개종한 이방인들에게는 할례의 의무가  없다고 토론을 종결지었다(사도  15,10).

 

이어서 원로들을 대표한 야고보 역시 바오로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이방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음란한 행동을 금지하는 노아계명만을 지키면  된다는 절충적인 보충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야고보의 제의로 공의회의  결정을 알리는 서신은 바오로와 바르나바 등을 통해서 안티오키아 교회에 전달되었다(사도 15,20-22).

 

이러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공동체 사이에 간격이 생기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이는 이후 수년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안티오키아 사건 :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방인의 할례 문제에 대해 확정적으로  결말을 지었다. 그러나 유대 민족주의에 자극을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애국적인  감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49년말에 베드로는 선교 여행 중에 안티오키아에 들렀다. 처음에 그는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번갈아가면서 지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신도들이 도착한 후에 베드로가 이방인  신도들과 식사하는 것을 중지하자,  이에 대해 바오로는 신랄하게 책망하였다(갈라 2,11-14). 여기서 베드로의 행동과 바오로의  비난은 각기 다른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방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소중하게 여기던 바오로에게는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의 멍에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반면에  베드로는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유대 민족주의의 압력에 의해 유대교로 되돌아갈 위험을  염려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유대교의 율법에 함께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유대인 신도들을 지키고자 하였다. 두 사도들의 견해는 서로 조화될 수는 없지만 둘 다 합리적인 것이었다. 바오로는 이때에 유대인 그리스도교는 더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으로 단념하였고 이방인들 사이의 교회 장래만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대인 그리스도교가 비록 그 영향력을 상실해가지만 유지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의 행동을 겁장이의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하며 또 바오로의 견해는 일방적이며 개인적  변론에 해당되는 것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교가 이방인들 사이에서 더욱 더 팽창되고 있는 반면에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 사건으로 알 수 있다.

 

이단(異端)

 

70년의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영지주의(靈知主義)로 알려진 이원론(二元論)적 경향의 이단이 유대인 그리스도교의 영역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영지주의는 유대인 그리스도교의 이단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단적인  유대인 그리스도교 그룹에 속하는 이들로서는 에비온 파, 엘케사이 파, 니콜라오 파, 체린투스, 시몬 파, 메난데르 파 등이 있었다. 이들은 율법을 존중하여 안식일과 할례의 의무를 충실하게 준수하였으나  노아 계명을 배척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의 동정녀 출생(童貞女出生)과 신성(神性)을 거부하여 예수는 신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태어난 인간이며 모세가 말한 예언자 또는 위인으로서 세례 때에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그에게 내려왔다가 수난 이전에 성부께 돌아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유대적 그리스도교의 이단은 2세기초부터 영지주의로 발전되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 철학, 이교도의 신비적 구원관, 동양의 신화적 우주개벽설과 점성학 등을 혼합하여 성서를 공상적 비유로 해석하였다. 즉 우주의 창조, 인간의 구원관과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유출설(流出說), 이원론, 정령설(精靈說)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영지주의를 주장한 이들로서는 사투르니노스, 바르벨로 그노시스 파, 세드 파, 카르포크라테스, 바실리데스 등이 있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빛의 세계(플레로마)에 있는 미지(未知)의 최고신과 조물주(데미우르고스)를 구별 또는 대립시켜놓았다. 최고신으로부터 수많은 정령(아이온)들이 유출되어 그 중에 한 정령인 데미우르고스에 속하는 일곱 천사 또는 일곱 통치자들에 의해 우주와 인간이 창조되었고 이 일곱 신들의 지도자가 구약의 신인 야훼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정령들이 최고신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마지막 최하급의 상태로 어두움과 악의 세계에 속한다고 설명하였다. 영지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은 이런 물질세계에서 벗어나 최고신의 세계인 플레로마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빛의  세계(플레로마)로 돌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사명을 띠고 한 정령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