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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교리 논쟁(Ⅰ)

by 파스칼바이런 2012. 7. 27.

 

교리 논쟁(Ⅰ)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기초로 삼으려고 결심하였을 때, 이 교회가 자신이 생각한 대로 하나로 단결되어 있지 못하고 극심한 내부 투쟁으로 분열되어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당시 여러가지 이단(異端)으로 인해 교회는 단일성을 상실하였고 많은 신학적  문제가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는 324년에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자 즉시 교회의 내적 일치를 회복하고 여러 가지 난관을  제국의 종교회의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당시 신학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세 가지였다. 즉 성삼론(聖三論), 그리스도론, 의화론(義化論, 또는 구원론)이었다. 이 문제들은 300년 동안 교회의 신학적 쟁점이 되었다.

 

성삼론

 

1. 신의 단일론적 학파

 

천주성삼에 대한 교리 문제에 있어서 필요한 사항은 성부와 성자의 내적 관계를 자세하게 정리하고 이를 계시(啓示)의 입장에서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서는 이 성삼의 신비를 구체적이 아닌 일반적 용어로 언급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문제는 2세기 말까지는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靈知主義者)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이단적으로 설명하였을 때, 즉 그리스도를 하나의 창조물로 변형시키려고 하였을 때에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신(神)의 단일성을 조화시킬 필요가 있게 되었다.

 

여기서 2세기말에 두 가지의 이단적인 ‘신의 단일론적 학파’ 가 생겨났다. 하나는 성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성부의 양자(養子)라는 양자설(養子說, Adoptianism)이며 다른 하나는 삼위(三位)라는 하나의 신의 세 형태에 불과하다는 양식론(樣式論, Modalism)이다.

 

양자론 :   이 학설은 그리스도를 하나의 순수한 인간으로 보고 인간인 그리스도가 어느 한 순간에 ―아마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중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는 말씀이 있었을 때에― 신의 능력으로 신격화(神格化)되어 양자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본래의 참된 신은 오직 성부뿐이며, 그리스도는 양자 관계에 의한 신이라고 설명하였다.

 

양식론 :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신(唯一神)의 한 형태만을 보았다. 그 유일신은 때에 따라 성부로 나타나기도 하고 성자나 성령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식론자들은 성부께서 인간을 위해 수난을 받으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성부수난주창자라고 불려지기도 하였다. 이 극단적인 단일론자들은 교회의 결정에 의해서 모두 로마에서 배격되었다.

 

190년경에 빅톨 교황(189-198/199)은 로마에서 양자설을 전파하려던 테오도투스를 파문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양식론을 주창한 프락세스에 대해서는 명백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다만 후시대에 사벨리우스가 양식론을 주장하였을 때에 갈리스투스 교황(217-222)이 이 학설을 단죄하였다. 그 후 이 이단은 로마의 신학자인 노바씨아누스에 의해 250년경에 최종적으로 거부되었다.

 

2. 아리우스 사상

 

로고스(말씀) 그리스도론 (Logos Christology) :   이 교리는 오리제네스에 의해 연구, 보급되었다. 그러나 이는 성삼의 내적 순서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난관에 처하게 되었다. 비록 이 그리스도론이 성서를 따라서 ‘로고스 그리스도’ 의 신성(神性)을 주장하고 있지만, 성삼에 있어 서열상으로 성자인 그리스도를 성부에 종속시켰고 성령을 성자의 아래 위치에 놓았다. 따라서 성령과 성자는 성부와 같은 신성을 갖고 있지만, 이 신성은 성부에게서 유래된 하급의 것으로 보았다.

 

결과적으로, 실제로 있을 수 없는 하나의 다신론적 일신론(多神論的 一神論)의  주장을 내세운 셈이다. 오리제네스의 이러한 견해는 상반된 두 신학파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의 출발점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부와 성자의 공동본체론(共同本體論)을 주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단일성을 주장하였고, 안티오키아 학파는 로고스 그리스도는 다만 제2의 신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구별된다고 강조하였다. 3세기 중엽에 안티오키아 학파의 루치아누스는 성삼교리에 있어서 성자의 성부종속설(聖父從屬說)을 주창하여 아리우스 사상의 기원이 되었다.

 

아리우스(260-336) :   313년  알렉산드리아의 바우칼리스 교회의 목자가 된 아리우스는 엄격한 금욕주의자이며 웅변가였다. 그는 318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알렉산델과 충돌하였다. 그 이유는 아리우스가 그의 설교, 편지, 저서 등에서 엄격한 성자의 성부종속론을 주장함으로써 신의 단일론적 경향을 갖고 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의식적으로 도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로고스를 신에서 분리시켜, 로고스는 참된 신이 아니며, 신성과 다른 본성과 속성을 갖고 있으며, 창조물 중에서 인간보다 높은 첫 창조물이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함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에서 축출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그의 가르침은 이단으로 단죄되어 그는 파문을 받았다. 이제 아리우스는 그의 안티오키아 학파 친구들에게 가서 니코메디아의 주교인 에우세비우스의 보호를 받았다. 그 후에 아리우스의 친구들이 그를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갈도록 도와주었을 때에 거기에서 데모, 야간집회 등 난동이 일어났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회 내정에 간섭하는 비극이 초래되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교들을 니체아에 소집하여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니체아 공의회(325) :   여기에 참석한 주교들은 5명의 서방교회의 주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 로마 제국의 주교들이었다. 교황 실베스텔 1세(314-335)는 연로하여 참석치 못하고 대신 두 장로를 파견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는 자신의 교리를 변호하고 17명의 주교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오랜 격론 끝에 정통파가 승리하여 니체아 신경(信經)속에 정통 교리가 정의되었다. 즉  그리스도는 성부의 본체에서 탄생한 창조물이 아닌 신의 외아들이며 성부와 "같은" 본체를 지닌 참된 신이다. 이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모든 교회에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신앙의 적으로 교회에서 축출되었다고 알리면서 이들의 저서들을 불태울 것을 명령하였다.

 

이 공의회의 결정은 불변의 교리였으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의 태도를 바꾸어 328년에 추방된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복직시켰다. 이에 대해 328년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된  아타나시우스가 자기 성직자단에 아리우스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여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후 아리우스 문제는 계속 교회 안에서 혼란을 일으켰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   동 로마 제국의 황제인 테오도시우스는 아리우스 논쟁을 끝맺기 위해서 콘스탄티노플에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때에 신학자들은 신 안에서의  위격(位格)과 본성의 의미를 정의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신격(神格)은  다만 세 신성의 내적 관계에서만 존재하고 이 세 신격안에 하나의 신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325년, 니체아 공의회 신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첨가되었다.

 

'주님이시여,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을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이 신경은 예절의 한 부분이 되어 처음에는 성세성사와 관련시켜 사용되었고 미사예절에 들어온 것은 6세기부터이며, 로마에서는 1014년에 황제 헨리 2세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 성삼의 교리는 가톨릭교회에서 확실한 결론에 이르렀다. 이제 신학 문제는 그리스도론으로 옮겨가게 되었다.